더 풍부한 세상을 사는 법
에디터 / 연푸른
엠넷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아마 이 글이 업로드 될 때쯤에는 이미 끝나 있겠지. 마지막 우승자는 어느 팀이 되었으려나.
원래도 춤을 좋아하는 나는 그동안 거의 심장을 부여잡으며 스우파 영상 클립을 반복 재생했다. 뒤로 갈수록 프로그램 진행 방식에 대한 여러가지 불만이 생겨 전만큼 방송을 잘 챙겨보지는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나의 알고리즘 한 켠에는 모니카와 립제이, 가비가 돌아다닌다.
간혹 댄서가 직접 스우파 무대를 리뷰하는 영상이 추천되기도 한다. 내가 종종 방문하는 채널은 ‘루다의 댄스 연구소 Ruda’s Dance Lab’ 혹은 ‘느낌알자나 ALZANA the feels’ 같은 채널이다. 춤은 그냥 봐도 멋있다, 잘 춘다 혹은 별로다 정도의 감정을 느낄 수 있지만, 이런 채널의 영상을 보면 그제야 난 내가 어디에서 좋다는 감정을 느꼈고 또 어디에서 아쉬움을 느꼈는지를 알아챌 수 있다. 나는 춤을 보며 희열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해내지는 못한다. 그냥 좋으면 좋은거라 생각하고 넘어갈 때가 많은데, 이 채널은 내가 왜 희열을 느꼈는지 그 이유를 꽤나 잘 찾아준다.
물론 원래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설명을 듣고 나니 그제서야 그 설명대로 감정을 느끼는 것 아니냐 지적할 수도 있다. 나는 굉장히 귀가 얇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도 꽤나 맞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채널의 설명을 듣고 나면, 그제야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동작이 보이고 듣지 못했던 음악이 들린다. 그리 유심히 보지 않았던 구도가 비로소 보이고, 왜 내가 무대를 꽉 차 있다고 혹은 비어있다고 느꼈는지도 설명이 된다. 전체 100의 무대에서 20밖에 보지 못하던 내 시야가 60, 70까지 넓어진다. 그래서 영상이 끝나면 늘 생각한다. 내가 이 영상을 보지 않았다면 얼마나 억울할 뻔 했냐고.
춤이 아닌 다른 예술 작품을 볼 때도 난 늘 비슷한 종류의 억울함을 느낀다. 분명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은 100, 120의 정성을 들여서 작품을 만들었을텐데. 작은 요소 하나하나에도 의미가 담겨 있을텐데. 아는 게 적고 눈치가 없는 나는 그 중 고작 20, 30만 볼 수 있다. 남들은 70, 80을 느낄 때 나는 같은 돈 주고 20밖에 보지 못하다니 이건 정말이지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도 연극 대사 속 숨겨진 상징을 이해하고 싶고, 드라마 속 캐릭터에서 현실의 사회 문제를 읽어내고 싶다. 소설 작가가 특정 인물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지 파악하고 싶고, 그것이 나의 시선과 다르다면 반대 의견의 제시하고 싶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독해력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족한 눈치는 남의 감상을 듣는 것으로 보완한다. 공연을 보고 나면 연출가 인터뷰나 비평문을 찾아 읽어 보고, 드라마나 영화를 본 후에는 영화 전문 잡지나 언론사 문화 리뷰를 찾아본다. 가끔은 문화 연구나 미디어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논문집을 찾아보기도 하고,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 다른 사람이 남긴 감상을 읽고, 브런치에 영화 제목을 검색한다. 정보가 없는 작품은 티켓 판매 페이지에 나오는 설명이라도 다시 읽는다. 그러고 나면 내 불완전한 20만큼의 이해가 30이나 40정도로는 늘어날 수도 있다. 이렇게 여기저기서 힌트와 관점을 얻어 삼키며 조금씩 예술을 읽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다.
배움의 속도가 내 기대만큼 빠르지 않기 때문에 나는 종종 이래도 되는 걸까하는 의심을 하곤 한다. 이렇게 얻은 감상을 나의 감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다른 사람의 감상을 내 것인양 흡수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왜 이 사람은 나랑 같은 작품을 보고 이런 글을 써내고, 나는 이 글을 읽고서야 겨우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거지? 정말 억울하고, 답답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래도 안 읽을 수 없으니 다시 읽다가도 또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에 부딪히고....... 그게 매번 반복된다.
예술만 나를 힘들게 한다면 그래도 편했을 것이다. 제대로 된 독해를 위해 이런저런 배움을 필요로 하는 영역은 예술만이 아니다. 신문 기사의 정치면과 국제면, 경제면은 나처럼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에겐 정말이지 높은 벽이다. 물론 기사에 적혀있는 의미 그대로는 나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 나라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난 배경이 무엇이며, 그게 다른 국가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이 회사의 주식이 폭락하거나 폭등한 것이 어떤 변화를 반영한 것인지, 이 사람의 이런 발언을 한 것이 어떤 정치적 맥락에서 일어난 일인지를 파악할 수 없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파악해내는게 문자 그대로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게 문제이고.
일상에서도 배워야 할 건 수두룩하다. 우리 주변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나만을 기준으로 이들을 해석하고 규정하려고 한다면 분명 누군가는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과거의 나는 내 주변에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이 뭐가 문제인지 알지 못했고, 장애와 정신병을 욕설로 쓰는 것이 당연한 공간에서 전혀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고 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그게 문제고 잘못된 것임을 배웠고, 의도적인 무지가 멍청한 논쟁과 애꿎은 피해자를 만들 수 있음을 알았으며, 보지 않던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내 세상은 세 배로 넓어졌다.
어쩌면 나는 지금도 자주 실수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을 수도 있다. 그걸 멈추기 위해서라도 나는 계속 배워야한다. 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고, 다시 내가 사는 세상을 다시 좁히고 싶지도 않다. 세상을 편협하게 살지 않기 위해서는 배워야할 것들이 정말로 많다.
나는 세상을 더 풍부하게 읽어내고 싶다. 남들은 다 이해하는 예술 작품과 사회 현상을 나 혼자 이해하지 못하고 살고 싶지 않다. 멍청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모르고 죽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모르면 볼 수 없으니까. 대체 어디까지 배워야하는지, 배움에 끝이 없다는 게 가끔 짜증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난 더 넓고 깊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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