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이라는 환상
: ‘미회복의 몸’을 보는 더 건강한 방식에 대하여
To lose money is to lose a little of yourself.
To lose honor is to lose half of yourself.
To lose your health is to lose all of yourself.
살면서 한 번쯤은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거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보통은 ‘그 무엇보다도 너의 건강이 최우선이니, 건강을 먼저 챙기면서 일해라’는 따듯한 당부의 말로, 혹은 어서 치료를 받고 생활 습관을 교정해 본디의 건강한 몸을 회복해야 한다는 조언의 말로 사용되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이 말만큼 무서운 저주를 찾기가 힘들다.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 당신은 다른 것들까지 다 잃게 될 것이라는 예언은 그 말이 꽤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더욱 섬뜩하다.
우리는 아픈 친구에게 빨리 나으라는 메시지와 함께 회복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약이나 죽, 따뜻한 차를 선물한다. 감기 몸살 같은 비교적 흔하고 쉽게 걸렸다 쉽게 나을 수 있는 병에 있어서라면 그런 것들이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겠다. 그런데 만약 친구가 앓고 있는 병이 비염이나, 아토피라면? 이들은 질환으로 분류되며 질환을 앓는 당사자에게 굉장한 고통을 주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이들이 ‘병’으로 인지된다기보다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특징이나 개성처럼 여겨지는 것 같다. 아마 완치되기는 어렵고, 시중에 나온 약은 증상을 완화하는 정도로만 이용되며, 결국은 평생 관리하며 살아가야 하는 대표적인 질환이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친구가 앓고 있는 병이 조금 더 ‘심각해 보이는’ 병이라면 어떨까? 치료도 어렵고,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초래하거나, 심한 경우 죽음에도 이룰 수 있는 만성질환을 친구가 앓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앞에서 빨리 나으라는 말을,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거래”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해도 되는 걸까?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거야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거다, 그러니 건강을 먼저 챙기도록 해라’라는 말에는 건강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녹아있다. 첫째로, 우리 사회는 건강을 잃는 순간 모든 걸 잃을 만큼, 건강한 사람들 위주로 구성된 사회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은 개개인이 직접 챙겨야만 한다. 즉, 우리 사회는 극도로 건강중심적인 사회다.
건강중심사회는 조한진희의 저서『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저자는 건강중심사회를 ‘모든 사람이 건강하다는 것을 전제로, 건강한 시민만을 표준의 몸으로 삼아 직조된 사회’라 정의한다. 이런 사회에서 건강하지 않음은 보편적이지 않고, 예외적인, 그래서 ‘비정상적’인 것이며, 시정되어야 할 ‘문제’로 여겨진다. 특히 사람의 가치를 그의 생산성으로 판단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시각은 더 강화된다. 아픈 사람은 ‘1인분의 몫’을 하지 못하기에 자주 미안해하며, 아픔에도 불구하고 1인분 이상의 몫을 해내는, 이를테면 스티븐 호킹과 같은 사람들은 병마와 싸워 이긴 영웅이나 인간이 가진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묘사된다.
건강한 몸을 ‘정상’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아픈 몸은 열등해진다. 이제 건강함과 건강하지 않음은 단순한 신체적 상태가 아니다. 이는 좋음과 나쁨, 성실함과 게으름, 더 나아가서는 선함과 악함과 같은 하나의 가치 체계로 존재한다. 건강을 잃은 사람은 어서 노력해서 그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지 못한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 되거나(“그러게 운동 좀 했어야지!”), 바보 같은 사람이 되거나(“뭘 그렇게 잘못 먹어서 이렇게 됐대요?”), 악한 사람이 되거나(“그렇게 살더니, 벌 받은 거지”) 혹은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빨리 나을 생각을 해야지, 너 때문에 우리가 무슨 고생이냐?”). 바로 질병의 개인화다.
질병의 개인화는 질병의 원인을 개인의 성격이나 생활 습관에서 찾는 사고방식이다. ‘죄를 지어서 병에 걸렸다’는 징벌 서사가 대표적이다. 과거 이 ‘죄’의 자리에는 보통 종교적으로 신실하지 못하거나 어떤 악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들어가곤 했고, 따라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한 후 신이나 신의 대리인의 축복을 받고 나니 얼굴이 환해지고 아픔이 씻은 듯이 가셨더라’와 같은 이야기가 유행했다. 물론, 이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는 그리 와닿지 않는 서사다. 그러나 징벌 서사 자체가 모습을 감춘 것은 아니다. 이제는 그 ‘죄’의 자리에 ‘부정적인 생각을 해서’나 ‘잠을 충분히 자지 않아서’와 같은 자기관리의 실패가 위치했을 뿐이다. 새로운 ‘죄’의 등장과 함께 건강한 음식 섭취, 감사하는 습관과 명상과 같은 생활 습관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저속노화’나 ‘갓생’같은 이름을 달고 쏟아져나오고, 이에 따라 건강을 잃은 사람은 자기관리에 실패한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그 스스로는 발병의 원인이 자기관리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아는 개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게으른 사람’으로 보는 사회적 시각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이를 내면화하기도 한다. 결국 아픈 사람은 신체적 아픔에 더해, 나는 게으른 사람이 아님을 증명해야 할 것 같다는 강박, 내가 정말 무언가를 잘못했는가에 대한 끝없는 자기 의심 그리고 사회의 편견과 싸워야 한다.
이렇듯 건강중심사회에서는 건강 관리의 성공과 실패가 모두 개인적 차원에서 논의된다. 동시에 사람을 피로하게 만들고 일상을 불균형으로 몰고 가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문제 제기는 쉽게 뒷순위로 밀려난다. 매일 꾸준한 운동으로 건강을 지켜야 하지만 야근은 해야 하고, 잠을 충분히 자야 하지만 끝없이 자신을 착취해야 하며, 건강한 식습관을 가져야 하지만 회식은 가야 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병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고 개인을 탓하는 것은 ‘스트레스받지 마세요’라는 의사의 조언만큼이나 무의미하지만, 동시에 일상적이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에게 빨리 나을 것을, 즉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빠져나와서 어서 본디의 건강한 상태를 회복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이런 사회가 질병을 대하는 자세다. 물론 이런 태도는 당연하다. 당연히 아픈 것보다는 아프지 않은 것이 좋으니까. 병으로 인해 불편해지기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모두가 자연히 가지게 되는 욕구니까.
하지만 이런 태도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병에 걸려있는 사람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병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건강 방송에서는 온갖 몸에 좋다는 음식들이 매일 같이 소개되고,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 보면 특정 신체 증상을 어떤 병의 징후로 의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 나온다. 암을 기적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치료 방법과 병원 광고가, 그 방법으로 기적적으로 건강한 삶을 회복한 어느 환자의 이야기가, 혹은 병이 심해지면 겪게 될 수도 있다는 공포스럽고 비극적인 이미지가 인터넷 세상에 만연하다. 하지만 정작 병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실제 삶에 대한 이야기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질병 에세이나 환자 커뮤니티에서 찾을 수 있는 정보를 제외하면 찾기가 힘들다. 건강중심적인 사회에서 ‘아픈 삶’은 정상적인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환자의 최종 목표는 ‘완치’이며, 그렇기에 치료를 받기 전, 회복이 되기 전의 삶은 ‘정상’이 되기 전의 임시적인 상태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제대로 된 삶이 다시 시작된다. 건강중심적 사회에서 아픈 상태는 그저 예외적인 상태일 뿐이다.
하지만 당연히, 아픈 몸이 된다는 것이 결코 예외적이고 드문 일이 아니다. 또한 아픈 몸에서 회복되는 과정이 반드시 단기적이고, 완결성 있는 것도 아니다.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삶은 흘러가고, 그 삶 속에도 행복과 성취와 꿈과 미래가 있다. 건강이 삶의 전제 조건이고, 건강하지 않으면 ‘다 잃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아픈 몸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지운다. 조한진희는 아프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묻는 말에 ‘어항 속에 돌 하나가 더 얹어지는 것이 아니라 핏물 한 컵이 부어지면서 그 물의 밀도가 변하고 그에 따라 생태계가 바뀌는 일’이라 답했다. 질병은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서가 아니라 일상 전체를 재구성하는 전제로서 삶 속에 들어온다. 그러나 아픈 몸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병이 어떻게 일상을 재구성하는지,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아픈 몸을 위해 어떤 사회적 장치와 기반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하기 힘들다.
쯧쯧 그렇게 젊은 나이에…
위에서 언급한 ‘건강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태도와 인식은 특히 젊은 사람에게 더 많이 적용되는 듯하다. 많은 사회에서 ‘젊음’은 ‘건강’을 의미하는 또 다른 단어다. ‘젊음을 유지하는 건강한 생활 습관’, ‘젊음과 건강을 추구하는 저속노화’,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피부 건강식품’처럼 젊음과 건강을 동의어로 사용하는 문장들에 우린 이미 익숙하다. 젊음이라는 단어에는 넘치는 생명력에 대한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 ‘젊은’이라는 관용어는 종종 ‘혈기 왕성한’, ‘싱싱한’, ‘탄력 있는’, ‘적극적인’, 그리고 ‘건강한’과 같은 단어의 대체어로 사용되며,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젊음은 칭송받는다. 그러니 젊은이는 마땅히 건강해야 한다. 그 단단한 몸과 회복탄력성을 믿고 가끔은 무모한 모험에도 몸을 던져야 하며, 청춘에게만 허락된 유흥을 즐기며 젊음을 낭비하기도 해봐야 한다. 사회가 그리는 ‘청춘’은 건강하고 단단하다. 거기엔 아픔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젠 낡은 문구가 되어버린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말하는 아픔도 결코 신체적인 나약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젊고 아픈 사람’은 쉽게 부정되거나 비판받으며, 더 많은 편견에 부딪힌다. 거칠게 나눠보자면, 세상이 보는 젊고 아픈 사람은 둘 중 하나다. 꾀병을 피우는 요즘 애들(“하여튼 요즘 젊은 애들은 이렇게 비실비실해서 어디다 쓰겠어”) 혹은 엄청난 불행을 겪고 있는 가엾은 젊은이(“젊은 나이에 어쩌다가 저런 병에 걸렸을꼬 쯧쯧”).
전자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자. 의사나 헬스 트레이너가 종종 던지는 ‘아니, 젊은 사람이 벌써 몸이 왜 이래요?’ 같은 질문은 듣는 사람을 머쓱하게 만들고는 한다. ‘그러게요’ 같은 바보 같은 대답을 제외하곤 딱히 할 말도 없다. 젊고 아픈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왜 이러지, 참 이상하네’와 같은 반응을 자주 마주한다. 병증이 잘 보이지 않는 경우에는 병의 심각성을 이해받지 못하기도 하며, 병으로 인한 신체 증상에 대해 ‘의지가 약해서 그렇다’, 혹은 ‘일하기 싫어서 꾀병을 부린다.’ 같은 편견 어린 반응을 듣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는 같은 젊은 나이대의 사람들 역시 종종 가지고 있는 태도이다. 아프다는 이유로 단체 활동을 함께하지 못하거나 ‘청춘다운’ 모험에 뛰어들지 못할 경우, 이들은 종종 예민하거나, 사회성이 떨어지거나, 인생을 재미없게 사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젊고 아픈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병을 앓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정말 아프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설득해야 하며,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에게 요구되는 생산성과 활발함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래는 크론병을 앓고 있는 25살 청년의 이야기다. 2020년 시사IN의 기획 특집기사 ‘죽음의 미래’에서 가져왔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밤샘 작업과 술자리로 이루어진 캠퍼스 생활은 건강한 신체로만 가능한 것들이었다. 크론병 환자는 카페인, 알코올, 밀가루, 맵고 짠 음식을 입에 댈 수 없다. 안씨는 소주 대신 물을 홀짝이며 술자리를 버텼다.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복통 때문에 조퇴와 결석, 갑작스러운 불참도 잦았다. 겉으로 보이는 장애가 아니었으므로 의심받기 일쑤였다. “청춘은 ‘건강한’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까운 이들은 ‘군대 안 가도 되는 병’이라거나 ‘치킨이랑 술 못 먹는 병’ 정도로 크론병을 이해했다. 그러나 정작 그를 힘들게 한 건 자신이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두고 무능하다고 자책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아파도 이만큼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어요. 그렇게 일을 마구 벌려놓고 수습하지 못하는 내가 다시 원망스럽고.” 경쟁사회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있던 그는 아픈 몸을 미워했다.
한편,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아픈 젊은이들에겐 전혀 다른, 동정과 연민의 시선이 쏟아진다. 이들에게는 또 다른 서사가 만들어지는데, 이는 보통 눈물을 자아내는 이야기다. 긴 투병 생활을 이겨내고 ‘삶’으로 ‘복귀’한 청년들의 이야기는 감동스토리가 되어 인터넷에 퍼지고, 사람들은 이를 보며 희망을 얻는다. 여전히 투병 중인 안타까운 젊은이에겐 후원과 응원의 메시지가, ‘저렇게 아픈데도 긍정적이라니’ 같은 찡한 댓글이 쏟아진다. 삶의 증거 같은 젊은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대범해야 할 젊은이가 죽음의 존재를 바로 옆에서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안타깝다. 이런 젊은이들은 그들 개인이라기보단 ‘환자’로 존재한다. 아래는 유방암 4기 판정을 받은 33살 청년의 이야기다. 역시 2020년 시사IN의 기획 특집기사 ‘죽음의 미래’에서 가져왔다.
암환자의 민머리를 슬퍼하고 안타까워 하는 시선. 질병과 함께하는 삶이 늘 슬픔과 좌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울상이 된 지인들의 걱정과 위로를 받으며 ‘괜찮다’ 안심시키느라 매번 진을 뺐다. 사회가 질병에 대해 얼마나 낯설어하는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아픈 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쉽게 대상화되었다. 아프다는 사실보다, 아픈 몸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 때문에 슬펐다. 정씨는 질병과 함께 사는 소소한 일상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한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암 환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싶었다. 마지막 항암치료를 끝내고 머리가 다시 자라기 전에 ‘빡빡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친구들이 우러러보고 있는 ‘여자 부처’가 된 유쾌한 환자의 모습이었다. “아픈 사람이 질병에 대해 자꾸 얘기해야 덜 불편해질 것 같았어요. 이게 일상인 사람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요.”
사회는 젊은이들이 병을 극복하고 일어서서 이 사회를 이끄는 건강한 청년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있는 아픔을 지워버리기도 하며, 젊은 나이에 암과 싸우고, 병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난 청년의 이야기를 강조하기도 한다. 젊음에 대한 편견과 아픔에 대한 편견이 교차하는 곳에서 젊고 아픈 청년들은 지워지거나 대상화된다. 미셸 렌트 허슈는 그의 저서 『젊고 아픈 여자들』에서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당신의 ‘건강한’ 친구들에게 당신은 낯선 존재가 된다. 그들은 아마 당신을 이해하고 싶겠지만 그럴 수 없다. 당신이 만나는 나이 든 여성들에게도 당신은 낯선 존재다. 그들은 “그렇게 젊은 나이에”라고 말하며 쯧쯧 혀를 찬다.
언젠가 더 좋은 기술이 나오면
‘정상’인 몸을 상정하고, ‘비정상’인 몸들이 정상으로 ‘회복’되길 바라는 시각이 아픈 몸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열등하다고 평가되는 몸에 대해 이런 설명이 가능한데, 그 대표적인 몸이 장애를 가진 몸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장애인은 여러 기술적 도움을 통해 장애를 ‘극복’하고, 최종적으로는 비장애인처럼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휠체어에 타고 있던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되거나, 심봉사가 눈을 뜨는 것처럼 장애인이 비장애인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인식이다.
장애학자이자 기술 철학자인 애슐리 슈(Ashley Shew)에 의해 제시된 테크노에이블리즘(Technoableism)은 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장애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적 관점이다. 언젠가는 과학 기술이 장애인의 삶을 ‘구원’할 것이다. 의학기술과 로봇기술의 발전으로 시각장애인의 시신경이 회복되고, 청각장애인은 인공와우를 통해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며, 신체장애인은 로봇팔과 다리를 통해 비장애인처럼 걷고 움직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도 이동할 수 있는 경사로를 만드는 것보다는 로봇 다리를 연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문자 통역을 보급하는 것보다는 더 좋은 보청기와 인공와우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우선시된다.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거나 문자 통역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걷거나 듣는 것이 더 ‘정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슈는 이런 관점이 장애가 있는 몸을 수용하지 못하고, 기술을 통해 장애를 ‘교정’하고 ‘종식’시켜야 한다고 믿는 다분히 비장애중심주의적 관점이라 비판한다.
김초엽과 김원영은 공동저서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이러한 낙관적 상상이 장애를 결핍이나 손상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장애인이 현실 속에서 마주하는 문제의 해결을 유예하고 그저 ‘먼 훗날’만을 기약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현실 속 기술은 비장애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불편하며, 고장이 잦고, 소수의 사람만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비싸다. 장애인 당사자가 자신이 ‘정상’으로 ‘교정’되는 것에 대해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많은 이들에게 그들의 장애는 결핍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청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농문화가 있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만을 기대하는 사이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과 사회 참여는 무한히 연기된다. 김초엽은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불완전함과 함께 살아가는 기술, 그리고 미래를 추구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장애를 보는 사회적 인식은 아픈 몸을 보는 사회적 인식과 닮았다. 이런 몸들을 보는 시각은 결국 이들이 ‘비정상’이고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정상적이고 완전한 상태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어진다.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장애와 아픈 몸을 이해하고 이들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이런 몸을 ‘정상으로 회복되어야 할 몸’이 아닌, 그냥 몸 그 자체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물론 질병과 장애를 치료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장애가 있는 자기 자신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치료를 받길 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아픈 사람이 스스로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길 바라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치료와 회복만이 정답이라는 생각은 때론 너무 잔인하다.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면 영원히 2등 시민으로 남아버릴 것 같다는 불안감, 아프다는 사실 때문에 이제껏 일군 모든 것이 의미 없어질 것 같다는 공포, 그렇기에 반드시 회복되어야 하지만 회복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좌절감과 아픈 사람에 대한 낙인, 끝없이 유예되는 삶에 대한 무력감이 이들을 짓누른다. 만병통치약이 있을 수 없다면, 장애인을 일어나 걷게 할 기적이 존재할 수 없다면 질병과 장애를 ‘극복’하지 않아도, 자신의 몸을 ‘정상’으로 교정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회적 인식과 그런 몸들에게 더 친근한 사회 시스템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한 가지 우려되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을 비장애인이며, 건강한 몸을 가진, 즉 ‘정상’으로 여겨지는 몸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한다. 스스로 당사자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글을 쓰면서, 역시 당사자성이 없을 이들에게 이 글이 어떻게 읽힐지 고민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늙을 것이고, 늙은 몸은 높은 확률로 아픈 몸이나 장애를 가진 몸이 된다. 기대수명이 점점 길어지고, 늙은 몸이 다수가 되어가는 한국 사회에서 ‘젊고 건강하고 장애가 없는 몸’만이 정상적인 몸으로 여겨지는 건 문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이동권 보장 시위와 이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보며 늘 그런 생각을 한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는 것이 결코 비장애인에게 손해일 리가 없다고, 우리는 모두 결국 늙고 아픈 몸이 되어서 이동권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엘리베이터와 경사로를 기쁜 마음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늙은 몸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포용과 관용, 이해를 아픈 몸과 장애가 있는 몸에도 가질 필요가 있다. 한 사회가 ‘아픈 몸’과 ‘장애가 있는 몸’을 보는 시각은 그 사회가 ‘늙은 몸’을 보는 시각과 닮아있고, 우리는 모두 필연적으로 늙은 몸이 될 테니까.
위 글을 쓰는데 아래의 책과 기사를 많이 참고했다.
조한진희. (2019).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동녘.
미셸 렌트 허슈. (2022). 젊고 아픈 여자들. (정은주, 역). 마티.
김원영, 김초엽. (2021).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김영화 (2020년 11월 03일). [특집]’죽음의 미래’ - ②’아픈 몸’을 거부하는 사회에게. 시사IN.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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