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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_2024/24호_회복

24호_끝나지 않는 가려움 / 래곤

by 밍기적_ 2024. 8. 28.

대주제 : 회복

글 종류 : 수필

제목 : 끝나지 않는 가려움

 

Ch0. 끝나지 않는 가려움

늦은 밤이고, 방 안은 서늘하다. 

나는 저린 팔을 때리며 잠을 청하려고 노력한다. 팔로 시작해서 온몸으로 퍼지는 저릿한 오싹함에 수 차례 긁고, 때리고 발버둥치지만, 피가 맺히도록 긁어도 기분이 나쁜 것은 매한가지다. 결국 잠을 포기하고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대어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다. 증상의 원인은 이미 알고 있다. 공허함이다. 

사실 원인을 알고 있어도 주변에 털어놓을 수는 없다. 나는 소위 ‘좋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좋은 사람은 사람이 좋다는 것일까? 

나는 집안이 좋은 사람이고, 학벌이 좋은 사람이고, 성격이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재력가 입장에서는 난 불우이웃이고, 저학력자에, 성격파탄자일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떼어두고, 나 자신을 점수로 평가하자면, 나는 전체적으로 B+ 정도 되는 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평범하고도 좋은 삶이 지긋지긋하다. 

 

Ch1. 고등학교 때의 삶

어렸을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들이 있다. 

‘할아버지부터 교수셨지?’

‘부모가 둘 다 교수래!’

‘집안 사람들 중에 서울대 출신이 참 많네’

부모님 모두 멋진 교육자였고, 나는 그런 교육자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 모두 ‘평균 교수 연봉’ 정도로 수입이 괜찮았고, 덕분에 학원비, 과외비 걱정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연필을 쥐고 태어난 우리 집안을 좋게 보았고, 이는 나의 사회에서 크게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꽤나 드라마 시청자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아침에 커피와 클래식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엄마,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아빠, 외국에서 멋진 직장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언니. 그리고 대학원생으로 부모가 갔던 길을 걷는 나. 어디가서 소개할 때 꿀리지 않을 정도의 배경이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태어나서, 나는 많은 이득을 취한 것 또한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나는 이러한 예쁜 배경과, 실제로 내가 보는 현실 간의 괴리감이 혼란스러웠다. 

 

  • 허울 뿐인 좋은 집안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나는 더 많이 책을 잡았고, 더 많이 교양을 쌓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교양있는, 멋진 지성인일까? 지금의 나로서는, 그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우리 가족은 ‘교육자 집안’이라는 프레임에 갖힌 것 같다. 

사랑하는 나의 아빠, 아빠는 내가 연락을 끊은 지 몇 달 되었다. 사랑하는 나의 엄마, 엄마는 4년 동안 다투다가 최근에서야 소통을 시작했다. 사랑하는 나의 언니, 언니는 평생 우리 집안을 모르다가 최근에 한국에 와서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집안의 환상에 젖어있다는 것이다. 각자 다른 이상향을 꿈꾸었고, 그것을 가족 구성원에게 강조했기에, 이들은 반드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점인 우리 부모님부터 따지자면, 나의 부모는 애초에 서로 이어지면 안되는 인연이었다. 각자의 상처를 회복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이에 쫓겨, 잔소리에 쫓겨,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였다. 본인의 상처를 더 잘난 본인으로 감추기에 바빴고, 그랬기에 그들은 본인만의 스케치를 내게 강요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스케치는 그들이 생각하는 이데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알 것이다, 절대적인 완벽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본인의 환상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은 갈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내 아빠는 순종하는 여성을 원했고, 내 엄마는 고상한 남성을 원했다. 순종적이기에는 너무 능력이 좋은 엄마와, 고상하기에는 너무 정이 많은 아빠가 만나, 나와 내 언니가 태어났고, 그렇기에 우리의 어린 시절은 부모님이 만든 굴레의 충돌 속에 있었다. 

매일 매일 부모님 다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마루 바닥에서 조용히 걷는 법을 배웠고, 싸운 후 주변을 정리하면서 예민한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법을 터득했다. 늘 그들의 분노 섞인 욕설에 있는 내용을 잊고자 노력하였다. 부부는 서로 피가 섞이지 않았기에 서로 간의 차이점을 상대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그들의 자식은 그들이 욕하는 모든 내용의 대상이 된다. 나는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스스로 더러운 핏줄의 자식이라 여겼고, 이 핏줄을 이겨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었다. 

이러한 충돌 속에서 나는 계속 이사를 다녔고, 혼자였던 시간이 많았다. 그 기간 동안 빠르게 누군가와 친해지는 재능이 생겼고, 사교성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친구에게 너무 집착하는 버릇이 생겼고,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으면 그 친구로부터 도망치는 습관이 생겼다. 처음에는 내게 다가오는 그들이 무서웠다. 다가오는 친구들 중에는 단순히 친해지고 싶어서 다가오는 친구들이 아닌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우리 부모님의 직업은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초등학교 반을 배정받을 때 부모 직업란에 교수라고 적었고, 중학교 학부모 회의에 엄마가 참석했을 때 엄마는 본인을 교수라고 소개하였다.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께서 내 문제풀이를 보고 칭찬할 때 부모 직업을 물었고, 이에 난 교수라고 답했다.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저런 행동들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남의 가정에 대해 필요 이상의 관심을 보이는 것과, 아무렇지도 않게 본인 잣대로 개개인을 평가하는 것에서 많이 놀랐다. 

대학생이 된 이후로 친해진 고등학교 후배를 간만에 만났다. 이야기를 하다가 집안 이야기가 나왔는데,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에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 진로 캠프에서 선배와의 만남이 끝나고 애들끼리 이야기를 했는데, 언니 이야기가 나와서 저도 들어봤어요. 언니 생기부에 대해서 엄청 칭찬하다가, 이게 언니네 부모님이 모두 관련 전공 교수라서 그렇게 많이 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 하더라구요. 이것 말고도 다른 선배들 부모님 이야기들도 엄청 하던데 그걸 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 

본인 과제를 부모가 해주었다는 말을 들으면 똑같이 기분 나쁠 거면서, 그렇게 뒤에서 나를 깎아내리고 싶었을까? 교수 집안은 대학생이 되어서 도움이 될 진 몰라도, 고등학생 때는 생각보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학에 대해서 아는 게 있을까, 봉사활동에 대해서 아는 게 있을까. 평생 본인 관심 주제 하나만 파온 사람들이라 전공 내에서도 세부 항목밖에 모르는데. 참 억울했다. 남의 ‘좋은’ 집안에 대해 이야기 하며 본인 집안을 깎아 먹는 행동을 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동시에 한심하기도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에는 이러한 관심이 좋았던 것 같다. 다른 아주머니가 당신의 자녀를 나와 친하게 지내게 하려고 집에 초대도 하고, 친절히 대해주시는데, 솔직히 어렸을 때의 나는 정말 좋았다. 하지만 어느순간 그들의 행동 뒤에 보이는 것과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기대하는 ‘좋은 집안의 나’는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조금 덜 천박하게 말하고, 조금 더 아는 체를 하는 나는 있어도, 좋은 집안의 안정되고 잘 자란 나는 없었다.  하지만 정말 완벽한 스케치를 선보이는 부모 앞에서 나는 이를 주변에 말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께서 그렇게 기를 쓰고 지키려는 “가정의 이미지”를 자식이 망가뜨리기에는 당시에 나는 너무 어렸고 항상 기분이 안좋았던,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을 더이상 실망시키기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기간 동안은 거짓말을 많이 했었다. 차라리 큰 거짓말이었으면 티라도 났을텐데, 나는 정말 사소한 거짓말을 하였다. 오늘 바지를 입었다면, 치마를 입었다고 주변에 말했고, 오늘 간식으로 사탕을 먹었다면, 초콜렛을 먹었다고 말했다. 부모님은 이런 나를 걱정하고 잘못된 길로 갈까봐 고민했겠지만, 당시의 나는 단순했다. 가정의 이미지든 뭐든, 어떠한 굴레에도 씌워지지 않고 나 자체로만 보여지고 싶었다. 이러한 나의 소망은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유지되었고, 대학생이 된 후로는 나는 자의적으로 몇 년간 부모님과 연락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좋은 집안을 원하는 사람들과 부모님의 기대에 나는 부응할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이 보는 나의 ‘집안’, 우리 가족이 지니고 있는 ‘가족에 대한 이상’, 내가 보는 ‘우리 가족의 현실’. 이 세 요소들간의 괴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보통 다른 집안들도 이럴까? 라는 생각을 늘 마음 속에 품고 살았다. 하지만 어떠한 집안과 상관없이, 내가 이로 인해 고통받고 불편한 상태라면 분명히 문제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인지 부조화를 없애기 나는 그들이 생각을 고치고 잘못을 인정하기 전까지 가족들과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처음에는 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반복된 무응답에 그들도 많이 내려놓은 것 같다. 그렇게 한 지 벌써 6년이나 지났으니, 꽤나 성공적인 결말일지도 모른다. 가족들 간의 갈등으로 더이상 아프지 않고, 심리적인 문제도 상담을 통해 정말 많이 안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부모는 각자만의 좋은 가정을 꿈꾸고 있고, 이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나’를 회복중이고, 이제는 그들의 강요에서 벗어나고 있다. 

 

Ch2. 성인 이후로의 삶

‘어머 선생님 축하드려요, 민지야 너도 열심히 성공하면 서울대 가는 거야’

내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합격했다는 것을 알려드리자 과외생 어머니께서 학생에게 하신 말이다.  나는 학생부 종합 전형으로 경희대학교를 갔고, 지금은 서울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조금 더 쉽게 내신을 따려고 당시 내가 살던 집에서 조금 멀리 있는 고등학교를 갔지만, 첫 학기 첫 시험에서 보기 좋게 망해서 내신 보다는 학교 활동에 집중을 하였다. 

재능 있는 줄 알았던 좋은 집안의 학생이 시험을 망쳤다는 것은 생각보다 임팩트가 크다. 이는 아마도 내가 살던 곳의 지역적인 특징도 있던 것 같다. 서울 대구를 번갈아 살면서 느낀 점은, 대구는 참 폐쇄적인 곳이라는 것이다. 사람들도 좋고, 시설도 편리하지만, 어느 정도로 재능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하면 그냥 그 지역에서 평생을 사는 것 같다. 나의 말아먹은 생기부를 보면서 서울로 지원하라고 말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안전하게 대구 쪽의 대학교, 혹은 타 지역의 대학교를 추천하셨다. 공부를 잘한 편도 아니고, 영어를 제외하고는 자신감도 없었기에, 만약 내가 수동적인 편이었다면 적당히 안정권의 대학을 지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탈출이 절실했다. 이혼을 해서 아직 아빠가 너무 미운 엄마의 집도, 엄마한테 넌덜머리가 난 아빠의 집도, 내게는 안식처가 아니었다. 가족이 아닌 장소에서 쉬고 싶었다. 그랬기에  거리상으로는 상대적으로 가까운데도 기숙사를 택했다. 학기 내내 스트레스로 과민성 복통이 왔고, 시험 때 공황장애가 온 적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내게 돌아갈 기숙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엄마는 서울권이 아니면 학비를 지원해주지 않겠다고 했기에, 나는 무조건 서울권으로 대학을 가야만 했다. 고등학교 3학년 첫 상담은 본인의 성적에 맞춰서 어디 대학을 갈 수 있는지 선생님과 상담하는 시간이다. 나는 그 때 담임 선생님께 ‘무조건 서울권의 대학으로 가야해요, 저는 진짜 가야해요. 성적 낮은 거 아는데, 정말 갈 거에요.’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당시 무섭기로 소문난 담임선생님이라서 정말 떨렸지만, 그냥 외쳤던 것 같다. 결국 그 담임선생님께서 마지막에 경희대를 추천해주셔서 지원을 했고, 입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여기까지만 적으면 해피엔딩일 텐데. 상경한 내 눈 앞에 닥친 현실들은 대구에서의 삶과 또 달랐다. 대구에서는 서울권에만 가자는 생각만이 절실했는데, 서울에서는 서울권의 대학끼리 비교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문제 차이로 대학 등급이 달라지고, 벌 수 있는 돈이 달라진다는 것은 갓 서울로 온 내게 꽤나 무거운 현실이었다. 대학교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대학생이 된 이후로는 집안에 대한 이야기를 안듣게 되어 참 좋았는데, 이제는 대학교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4학년 때부터는 어떤 일을 할지에 대해 고민하였다. 선배들로부터 들은 말은 ‘이미 각 기업 별로 갈 수 있는 대학군들이 정해져 있다’였다. 물론 그 바늘구멍을 뚫은 인재들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난 내가 그 인재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공부가 하고 싶었다. 내가 전공한 경영학은 참 얕고 방대하였기 때문이다. 공모전으로 애매하게 한 것이 경영의 일부라면, 연구자가 되는 것과 상관없이 제대로 공부해서 경영에 대해 알아나가고 싶었다. 

이렇게 생긴 공부에 대한 관심은 절대 부모님에게 알릴 수 없었다. 대학원 이상부터는 정말 부모님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님 몰래 석사과정에 지원했다. 남들 입에서 ‘부모가 교수니까 자식이 쉽게 붙었다’라는 소리는 더이상 듣기 싫어서 몰래, 부모님과 다른 전공으로 지원하였다.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에 지원해서 모두 붙었고, 나는 당연히 서울대학교에 갔다.  처음에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괜히 서울대학교 학생이 된 것 같기도 하고. 공부를 잘해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서울대 취급을 받는 것이 머쓱하기도, 자랑스럽기도 하였다. 

하지만 점차 이 또한 부담으로 느껴졌다. ‘지금 거리에서 토하는 저 친구도 전교 1등 밥먹듯이 해서 서울대학교 온 사람이겠지’, ‘내가 서울대학교 학생이라고 할 자격이 될까?’ 등의 생각들이 나를 좀먹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타대생에 대한 인식과 상관없이 나 자체가 학벌에 대해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희대학교가 안좋은 대학은 아니지만, 집안에서는 순위가 낮은 대학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서부터 서울대셨는데,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항상 부모님의 친구분들도 ‘서연고’ 중 하나셔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대학이 쉽게 갈 수 있는 곳인 줄 알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국내에서 대학에 따라 달라지는 대접들을 보며 이런 열등감이 싹트고 자랐던 것 같다. 당장 과외비만 해도, 서울대 대학원에 합격했다고 했을 때, 이미 높은 과외비를 훨씬 더 높게 측정해서 주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런 부담들은 내 건강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고, 나는 첫 학기에 코로나, 인후염, 감기몸살, 축농증, 부비동염을 동시에 앓은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서울대 학생이면서 서울대를 무서워하고, 서울대 사람들에게 자격지심을 느끼는. 그런 웃긴 내가 2023년도에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이런 나의 부정적 성향은 아픈 생활이 끝나면서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랩실사람들이 무섭고, 여전히 학교에 다닐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답은 스스로 듣지 못했다. 


Ch3. 마무리. 나의 가려움은 언제 끝나는가?

과거와 비교하면 나는 많이 회복되었다. 가족들의 환상을 박살내는 데에는 도가 텄고,  서울대에 소속되어 더 열심히 연구하려고도 한다. 또한 누가 내 집안에 대해 함부로 말하면 상대 집안 족보부터 내놓으라고 말할 정도의 강단도 생겼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가끔씩 공허하고, 밤마다 팔목이 아주 간지럽다. 아마 완전한 회복이 아니기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은 나를 위해서 나는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고, 내 주변 관계를 관리한다. 평범하게 자라오고, 트라우마가 없는 척 하며 평범한 삶을 꿈꾸지만, 동시에 이 삶이 지겹기도 하다. 팔이 가려운 현상도 사실 조금 의외스럽긴 하다. 이전에는 가슴이 뜨거운 현상이 있었고, 그 전에는 손발이 저려서 잠을 못자던 현상이 있었다. 몸이 회복은 되지만 다른 부위로 이전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나의 이러한 공허함은 과연 해결될 수 있을까?

이 주제에 대해서 나는 성인이 된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생각해보았다. 공허함은 표준국어사전의 뜻으로 ‘아무것도 없이 텅 빔’을 의미한다. 나에게 있어 공허함은 내가 만들고 싶었던 나만의 삶의 공간 속에서 없는 것들로부터 나오는 감정으로 보인다.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했기에 행복했던 가정이 없었고, 사랑보다는 어른으로서 책임져야하는 책임감을 먼저 배웠다. 어렸던 내가 만약, 그들로부터 사랑을 조금 더 배웠다면, 지금처럼 공허했을까? 아마 아닐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구제불능이고 사랑 못받고 자란 사람인 것 같아서 매우 무기력했다. 하지만 점차, 상담도 받고, 공부도 하면서 회복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26살, 만으로는 24살의 나는 분명히 회복 중이다. 하지만 스스로 회복을 한다는 것은 ‘분명한 문제 인식 및 정의가 되었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이러한 인식 및 정의는 매우 어려운 것 같다. 내가 나의 문제를 조금 더 깨닫고, 배우고, 이러한 나의 문제를 사랑으로 볼 수 있다면, 언젠가 미래의 나는 완전한 회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가족에게서 받았던 불완전한 회복은 내 선에서 끝내고, 내 자식에게는 완전한 회복이 담긴 사랑만을 전달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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