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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_2021/8호_소속, 나를 바꾸고 내가 바꾸는 공간

8호_소속된 집단이 피보호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인지 / 망

by 밍기적_ 2021. 9. 3.

소속된 집단이 피보호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인지

 

에디터 / 망

 

 조직이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요소들이 모여 체계 있는 집단을 이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는 조직이 될 수 있다. 교육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학습자와 교육자가 모여 정해진 질서 내에서 행위를 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속하게 되는 조직인 바로 이 학교이다. 그렇다면 학교 이전에 우리가 경험하는 조직은 없을까? 유치원? 보육원? 혹은.. 가정?

 가정이 조직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으로 넘어간다. 조직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집합한 집단인데, 가정은 우연으로 모인 집단이 아닌가. 부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물론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자녀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어, 태어나자마자 경험하게 되는 집단으로는 최초이나 조직의 의미라고 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하지만 핵심은 어쨌거나 가정도 집단이긴 한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나자마자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소속이 생긴다. 내가 최초로 겪는 가정은 내가 의도적으로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그 가정에 형성되어 있는 규율이 있어서 나는 그 규칙을 따라야만 한다. 규칙의 밀도와 범위는 가정마다 다르다. 가정마다 가정 내의 규칙이 다른 이유는, 서로 다른 개별들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단은 개별의 영향을 받으면서 동시에 집단은 개별자들에게 영향을 준다.

 일단 첫째로, 독립적인 가정을 형성하기 위한 제1조건은 두 사람의 만남이다. 그렇지만 각각의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가정이라는 집단에 속해있던 개별자들이기 때문에, 각자 준수해야 하는 규칙이 다르다. 가정의 대부분의 규율이 동거 규칙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하면 이는 단지 부부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룸메이트 사이에서도 충돌과 갈등이 될 수 있다. 자는 시간, 빨래 돌리는 시간, 요리할 때 물건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머리를 아침에 감는지 저녁에 감는지, 몇 시까지 전화 용건을 끝내야 하는지, 기상 시간의 차이 등등. 규율의 충돌을 통해 조정 과정을 거치고, 새로운 가정만의 새로운 규칙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 새로 형성된 규칙은, 둘 사이의 자녀가 최초로 준수해야 하는 규칙이 된다.

 가정의 형태에 대해서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것으로 가정의 형태가 끝나는 경우도 무시할 수 없다. 이는 두 사람만의 생활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나, 이 지면에서는 자녀가 가족 구성원이 되는 가정까지 나아가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린 누구나 다 누군가의 피보호자였기 때문이다. 피보호자로서,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우리가 태어나 최초로 겪는 조직 혹은 집단은 가정이고, 우리는 그 가정에서 기존이 이미 형성된 규율에 따라 살아간다. 보호자가 양육에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동 습관도 달라진다. 그 예로 필자는, 지금도 연예인을 잘 모른다. 예능 프로도 잘 모르고, 애초에 TV를 보는 습관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어릴 적부터 집에 TV는 올림픽 및 월드컵 시청용 장식이었고, 책을 읽거나 부모님의 손을 잡고 동네 도서관에 들려 바닥에 주저 앉아 책을 읽은 기억이 더 월등하다. 커서는 학업에 대한 관리마저 철저했다. 또래들이 스마트폰을 쓸 때 스마트폰을 아예 사주지도 않으셨고, 하루에 인터넷 사용은 주말에 한 시간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도대체 어떻게 살았나 궁금할 정도인데 그 시절의 대부분의 기억이 학교 도서관에서 진을 치고 살았던 것이라 아마 독서하는 재미로 학창시절 시간을 보냈다는 건 분명하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에 따라 지금까지도 독서에 더 흥미를 보이면 좋겠지만, 성인이 되며 드디어(!) 스마트폰 사용 허가를 받으면서부터 책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다르게 생각하면, 만일 그 때 나의 양육 보호자로서의 부모가, 함께 주말마다 도서관을 데리고 가고, 부모조차도 TV를 멀리하고, 인터넷 사용을 관리하지 않았더라면 당시 내가 이루었던 학업적 성취는 없었을 거라는 가정도 인정해야 한다.

 이처럼, 학생들이 학교에 오기 전부터 이미 속해 있던 가정이라는 것은, 아이들의 사고와 생활 습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가정에서 보호자로부터 배운 언어 습관을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에게도 그대로 사용했다가, 맥락을 몰라 친구들을 상처 입히는 경우도 있다. 쿨한 가정에서 자라 서로 디스전을 펼치면서도 쿨하게 인정하거나 쿨하게 사과하고 넘어가는 가정의 아이는 학교에서도 쿨한 디스전을 펼쳤다가 상대적으로 마음이 여린 아이들이 상처를 받기도 한다. “저는 그게 상처가 되는 말인줄 몰랐어요.” 아이들은 이 말이 변명이 아니다. 정말로 그런 줄 알았던 것이다.

 위와 같은 언어 습관 뿐만 아니라, 거시적으로는 가정의 문화 자본 및 경제 자본이 학업 격차를 야기하기도 한다. 앞서 필자의 예시에서도 언급한 ‘학업적 성취’ 또한, 필자는 성인이 되어 되돌아보건데 그건 가정에서의 문화 자본 때문이었음을 자각한다. 스마트폰의 유혹에 지지않고 책상에 오래 버틸 수 있었던 ‘노력’조차도 이제는 가정 환경, 혹은 가정의 자본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노력이 정말로 개인이 할 수 있는 무언가였다면, 지금은 이 노력조차도 재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타고난 재능이라서 어떠한 유혹이 있더라도 이겨낼 수 있거나, 혹은 실패를 겪어도 이를 지나치게 당사자 탓으로 돌리지 않고 응원해주는 가정 혹은 학교 환경에서 자랄 경우,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고 그것을 우리는 노력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어떤 가정에, 어떤 학교에, 어떤 친구 무리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조금만 성취를 이루어도 만족하는 집단에서는 그 정도에 안주할 수도 있다. 반면에 더 큰 성취를 바라는 집단이라면, 기대치에 맞추기 위해 한 번 더 시도를 할 수도 있고 혹은 그 기대치가 지나친 압박으로 다가올 경우 아예 모든 걸 포기해버릴 수도 있다.

 문화실조론에서는 앞선 이야기들과 같이, 가정의 문화 자본이 아이들의 학업 성취에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는 관점을 이론화한다. 노력 부족은 개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틀을 개혁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몇 가지 제도는 마련이 되어 있다. 문화자본의 개념을 지역 개념으로 연장하여 생각하였을 경우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축약하기 위한 대학의 지역균등선발제 혹은 경제적 배경이 학생의 학업 성취에 미치는 영향력을 인정하는 기회균등선발제 등이 있다. 하지만 제도적으로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결국 문제가 발생하고 난 다음에 해결하는 것에 불과해,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근래에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으며 동시에 문화 자본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있는 추세의 대표적인 예시로는 오은영 박사의 TV 프로그램 출현이 있다. 오은영 박사는 아동 심리학의 깊은 연구를 통해 아동들과 그 아동들을 돌보는 보호자들을 위주로 한 심리 상담을 진행하는 상담 박사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TV에 출현하여 아동 심리의 중요성을 대중들에게 알리고자 노력하였으며 현재는 TV 프로그램 ‘금쪽같은 내새끼’의 고정 출현자로서 개별 아동들의 문제점을 짚어주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논하던 것과는 다른 목적성을 띈 프로그램이긴 하다. 하지만 이러한 아동 심리 프로그램이 방송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대중들이 프로그램 존속을 위한 시청률을 유지해줄 만큼 관심이 있다는 것은, 아동의 성장 환경에 대해 누구나 다 관심을 갖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소속된 사회 환경이 아동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혹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에 저만 속해 있다고 생각하여 제가 속한 집단만을 위한 집단 이기주의로 나아가는 움직임도 있다. 노키즈존과 아이들의 미성숙한 교통질서 태도에 대해 민식이법으로 부르는 태도가 그러하다. 혹은, 유튜브에서 무분별한 성인 광고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동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적 소수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들으려는 노력보다는 제 편의를 위해서 휴게 공간에서 몰아내는 문화, 아동 및 청소년이 접할 수 있는 문화 매체에, 법적으로 부적절한 컨텐츠를 내거는 미디어 매체, 아동들의 미성숙한 태도에 대해 성숙해질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미성숙함을, 단지 아동이라는  그 자체의 특성을 비난하는 시각들. 이러한 문화 자본이 형성되어 있는 사회에서, 그 사회에 필수불가결로 소속할 수밖에 없는 피보호자들은 갈 곳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양면의 동전이다. 어딘가에서는 오은영 박사처럼, 아동들의 심리를 이해하고 그들이 속한 사회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아동 및 청소년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미성숙한 자들이 본인이 속한 구역에는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집단이 있다. 이들은 모두 같은 사회에서 공존하여 살아가며, 아이들은 자신이 소속된 사회에서 만나는 어른이 양면의 동전 중 제 편인지 아닌지,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 되어, 좋은 어른들과 만날수록 아동들은 바르게 자라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논하였던, 간략하게는 문화실조론으로 축약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BONUS TRACK

 물론, 문화실조론이 가진 단점도 있다. 인간 개인의 노력에 대해, 지나치게 우연에 기대기 때문이다. 좋은 가정,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영 노력을 하지 못하는가? 하지만 이 비난에 대해 문화실조론 옹호론자로서 반박해보자면, 이 또한 인간의 입체성을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태어날 때부터 속해 있던 조직과 문화가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 본능적인 공포와 두려움 등을 우리 모두는 갖고 있어, 다른 사회 소속 집단에서 재사회화를 통해 가정에서 겪었던 불리한 경험들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다시 성장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동을 위한 가정에서 자랐더라면 이 기회비용을 굳이 들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사회는 모든 아동들이 다 최소한의 수준 이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아동을 위한 사회는 반대로 어른들이 살아가기 힘든 사회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어른이 살기 좋고 아동이 살기 좋은 사회는 양립 가능한 개념이다.

 우리는 소속된 자로서 내가 소속되어 있는 집단 문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음과 동시에, 우리가 형성한 문화가 앞으로 이 집단에 소속될 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 또한 충분히 인지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책임이란 부담으로 다가오는 표현이지만, 우리는 반드시 어린 시절을 거쳤기에 지금의 내가 되어있고 그 과정에서 어른의 배려가 없었던 순간이 한 번도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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