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에디터 온기
소속감이 뭐길래
최근에 <벌거벗은 세계사>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그 중 1차 세계 대전을 다룬 에피소드를 굉장히 몰입해서 봤는데, 전쟁의 참상이 너무나도 잔혹해서 차라리 허구로 과장되었다고 믿고 싶을 정도였다. 이후 관련된 책 그리고 1,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여러 전쟁 영화 (특히 사실을 잘 고증했다고 평가받는 작품들)을 더러 접했다. 1917, 핵소고지, 미드웨이 등 밀리터리 영화를 태어나 처음으로 그렇게 직접 찾아서 보았다. 전쟁 당시 그들은 어째서 그렇게 용맹하게 나아가는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물러서지 않는지 의구심이 들었고, 그 해답은 ‘소속감'이라는 감정이자 욕구에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놈의 소속감이 뭐길래?
이 무섭도록 강력한 소속감 그리고 그 소속감의 집약체로 느껴지는 군대, 전쟁의 처음은 언제였을까? 또한 소속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하게 된 건 인간의 본능이었을까 주어진 환경 때문이었을까?
소속을 가지는 것. 그것은 생존을 위한 끌어안기.
<휴먼카인드>에서는 인간의 유전자가 친절한 특성을 가지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간 것이 생존을 위해서라고 한다. 예로부터 아무도 자의식이 과잉된 사람과 음식을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고, 자랑하는 사람이 잡아 온 고기는 반기지 않았다. 그의 자존심이 집단 내 모두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함께 의식주를 나누는 사람들을 살갑게 대하고 잘난 척을 하지 않는 것은 소속집단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류의 임기응변으로 볼 수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게 해를 끼치기 전에는) 되도록 호의적인 것을 꼭 생존을 위한 선택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개인이 집단 속에서 잘 동화되려 노력하는 것이, 집단 내에서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타고난 인간 본성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역사학자 새뮤얼 마셜은 자신의 대표 저서 <사격을 거부하는 남자들>에서 (물론 연구 결과에 대한 조작의 논란이 많은 책이지만) “평범하고 건강한 사람은 동료 남성을 죽이는 것에 대해 무의식적인 내면의 저항감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의 의지로는 생명을 빼앗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상적인 “정서 구조”상 우리는 모두 공격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방증으로 인류는 여러 번의 크고 작은 세계 대전 속에서 우리는 직접 총,칼을 들고 적과 대면하는 방식을 피해왔다. 그렇게 직접 공격하는 형태에서 점점 원격으로 적을 섬멸하는 방식을 찾아왔다. 이 변화가 단순히 과학 기술의 발전, 또 더 많은 적을 효율적으로 사살하기 위함만은 아닐 것이다.
인류는 왜 무리를 이루고 서로 대립하는가?
전쟁의 역사에 대해서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수렵과 채집의 역사에서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기 시작한 시점의 인류 역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인류 역사의 95%가 넘는 기간 동안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면서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았다. 불확실한 수확량에 맹수로부터의 위험도 도사리는 길고 긴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전혀 교류하지 않는 삶을 산 것은 아니다. 수렵 - 채집인들은 언제나 낯선 사람과 함께 고개를 넘을 때 언제라도 멈춰 서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며, 그 사람은 더이상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는 특정 시점에 전쟁이 처음 발생했다. 이제 삶의 터전에 젖과 꿀이 흐를 즈음, 그러니까 ‘이제 좀 살만하겠다!’ 싶은 시점에 인류는 서로 대립했다. 인류는 왜 무리를 이루어 서로 대립했을까? 서적 <휴먼카인드>에서는 대립의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본다. 첫 번째는 지켜야 할 사유재산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수렵-채집인들은 거의 모든 것을 공유했다. 수렵-채집인들에게 형성되는 집단 그리고 집단을 유지하는 질서나 리더십은 일시적이며 오히려 더 합리적이었다. 목적 지향적이고 단기적이지만 당위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정착민의 삶은 함께 터전을 나눈 사람들과의 신뢰와 함께 낯선 사람에 대한 불신을 낳았기 때문이다. 정착민들끼리는 관대해지는 반면 우리 공동체 이외의 인물들에게는 엄격해지는 것이다. 한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는 삶 이전에 수렵-채집인들의 삶의 양상은 매우 달랐다. 수렵과 채집하는 유목민들은 상당히 여유로운 가입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항상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고개를 넘어 다른 집단에 쉽게 합류할 수 있었다. 반면에 마을 사람들은 딱 ‘자신의’ 공동체와 ‘개인의' 소유물에 점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집중은 집착이 되고, 서로 집착을 하게 되자 의심하고 잦은 마찰이 빚어진 것이다.
이번 주제에 특히 군대나 전쟁에 대한 예시를 많이 들게 되는 데, 군대와 전쟁이야말로 소속감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는 집단과 상황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우리가 외부인들과 무리를 이루는 가장 큰 이유가 역설적이지만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였고, 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한 집단은 다른 집단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동맹을 맺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속감, 그것은 얼마나 달콤하고 위험한 감정인지
자신의 소속과 함께 소속된 동료를 아끼는 마음에 벌어진 가장 참혹한 결과물이 여기에 있다. 나치 독일군은 군사적인 역량으로만 평가했을 때, 역사상 가장 뛰어나고 용맹한 군대로 평가받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독일군을 와해하기 위해 나치 독일의 선전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말이 안되는 것인지를 알리기 위해 독일군 초소에 실상을 알리는 전단지를 살포했다. 전단지의 효과는 어땠을까? 제 눈을 가리고 있던 잘못된 이념에서 벗어나 현실을 깨달은 병사들이 와해하였을까? 전혀 아니었다. 이후에 전투에서 생포한 독일군 포로들을 붙잡아 심문한 결과 전단지 살포가 전혀 효과가 없었던 이유가 밝혀졌다.
놀랍게도 애초에 나치 독일의 이념이나 지도자의 위대함을 믿어 의심치 않아 전투에 목숨을 건 병사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에게 그깟 정치 이념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다른 국가나 부대의 군사들과 똑같이 그저 옆의 동료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소속집단에 크게 소속감을 느끼고 그것을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상위에 놓았다. (비슷한 예시로, 911 쌍둥이 빌딩 테러를 일으킨 테러리스트들도 같은 형제였다.) 그렇게 소속된 집단 내의 여러 사람의 의견에 휩쓸려 구성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선한 의지라도 잘못된 방향으로 발휘된다면 결과물이 이처럼 두려울 수도 있다.
“내 적의 적은, 내 적의 적일 뿐이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다.”
로버스 동굴 공원 실험은, 미국의 심리학자 무자퍼 셰리프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집단 내에서 이루어지는 단계적인 관계 형성과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배척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어린 소년들을 대상으로 (실험 대상은 11~12세로 모두 백인 중산층의 청교도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소년들) 다소 수위 높은 단계의 실험이 행해져 윤리적인 비판을 피할 수 없었지만, 이 실험에서 유의미한 결과물을 발견할 수 있다.
소년들은 무작위로 그룹에 배정되더라도 일단 한 그룹에 속하게 되면, 그룹 전체의 문화와 가치관에 동조되어갔다. 소년들은 각각 자신이 속한 그룹의 성격과 가치가 특별하다고 믿으며, 그 그룹에 소속되었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소년들에게는 ‘내 친구의 적은 나의 적’ 원칙이 적용되었다. 그래서 생활하는 도중, 같은 소속의 한 사람이라도 다른 그룹 구성원과 조그마한 마찰이라도 생기면 그룹 전원의 다툼으로 번지는 일이 허다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소년들은 자꾸 비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궂은일을 시키는 캠프 관리인(실상은 연구진)이라는 공동의 적을 만나게 되고, 그룹들은 힘을 합쳐 대항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공동의 목표 (공동의 적) 아래에 공감대와 유대감을 형성할 집단이 생긴 것이다. 그 공동의 목표가 자극적인 것, 직접적인 해를 가할 수도 있을 정도로 미운 적일 경우 집단은 더 공고히 유대한다는 것도 함께 알 수 있었다.
오직 공동의 적에 의해 이룬 집단 내부의 화합은 공동의 적이 사라지면 다시 대립할 확률이 높다는 한계가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은 소련과 힘을 합쳐 공동의 적, 히틀러를 막아냈지만 세계 대전이 끝나자마자 동맹은 금세 금이 갔다. 그렇게 공고할 것 같던 두 진영은 수십 년 이상을 원수로 지냈다. 같은 곳을 바라보게 한 공동의 적이 없어지자 마자 총성없는 또 다른 전쟁, 냉전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이미 냉전을 통해 공동의 적 하나로 이어진 연대가 얼마나 빠르게 분열하는지를 목격했다.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출발한 TF팀도 당면한 과제에 집중하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할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경우,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충분한 소통을 하여 집단을 형성하고, 다양한 성격과 이유를 가지고도 집단은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소속감은 배척감을 함께 낳는다.
소속감은 다른 집단과 내집단의 차이, 다른 집단과 달리 우리 집단 사람들끼리 공감하는 공통점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의 소속 집단에 심취해있는 태도는 몹시 위험하다. 세계를 실제로 생긴 모양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하여 바라보게 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잘못된 사실을 팩트로 받아들이고, 편협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타인과 타 집단에 대한 혐오가 생겨난다. 그렇게 소속감은 배척감을 함께 낳는다.
밀레니얼에 대한 세간의 과장된 관심으로, 그들이 그렇게까지 주목할만한 소비집단이 아님에도, 밀레니얼들을 공략하기 위한 여러 판매 전략들을 세우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전 세계 자산의 최소한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60대 이상의 노년층을 등한시한다. MZ 세대는 점차 구매력이 높은 세대로 성장하겠지만, 동시에 인간의 기대 수명 또한 크게 성장한다는 사실은 간과한 모양이다. 전문가들은 2030년이 되면 실버세대의 구매력이 무려 200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지만 여전히 시장에서는 실버세대를 배척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을 공략할 어떠한 세밀한 전략도 가지고 있지 않다.
“조국을 빼앗기고 있다”는 선동적인 표현까지 하며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 시민권자들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대적으로 반대했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소의 모니크 모리시 연구원은 이민자들이 상대적으로 젊고, 궂은일을 맡아 하며, 사회보장보험에 막대한 돈을 세금으로 납부하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은퇴를 기다리고 있는 시민권자들은 이민자들이 미래의 은퇴자들이 받을 연금을 충당할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보지 못한다.
더 나은 세상은 더 많은 공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예일대학교 심리학 교수, 폴 블룸은 “공감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사람들은 미소를 짓지요.” “나는 그것에 반대합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제껏 인류가 다른 생물 개체들과는 달리 이토록 진화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만이 가진 “공감"의 힘이라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그 사상을 맹신했던 내게 그의 발언은 다소 충격적으로 들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공감은 세상을 비추는 선한 태양이 아니라 스포트라이트 (본문에서는 집중 조명이라는 단어로 해석) 라는 것이다. 블룸 교수가 든 한 예시에 따르면, 한 언론사가 한 사안의 특정 항목(viewpoint)을 확대해 우리를 오도할 수 있다. 그렇게 정치색을 강하게 띠는 언론사가 만든 뉴스는 특정 항목을 확대해 우리를 속인다. 네덜란드 출신 저널리스트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소수에게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적의 관점은 보지 못하게 된다고 덧붙인다. 공감이 스포트라이트로 역할 한다면 정말 나와 내 소속집단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공감을 경계해야 한다는 그들의 말에 나는 설득되었다. 공감은 소속된 집단을 공고히 할 뿐. 더 나은 세상은 공감에서 시작되지는 않는다.
공감은 절대적인 해법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서로에 대한 더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
나는 세계시민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꽤 오래전부터 우리는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세와 접근법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숙고의 과정도 없이 소속을 가지고, 오직 자신의 소속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보통의 삶을 경계했다. 서로에 대한, 그리고 다양한 시선에 대한 이해와 학습의 과정 없이 소속을 먼저 가지는 것은 사회를 병들게 한다. 그럼에도, 이분법적인 사고로 세상을 오직 두 집단으로 나누는 사례와 그런 사람들은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좌파와 우파, 남성과 여성, 자국민과 이민자.. 우리는 이념으로, 타고난 생물학적 성으로, 출신지로, 나이 (세대)로 나누어 각자의 소속집단에서 동질감을 느끼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한 쪽을 혐오한다. 반대편이라 하여도 그들이 하는 모든 사상을 반대할 리는 만무한데, 소속 집단을 지키기 위해 상대편 논리의 모든 부분을 부정하고 파괴한다. 그것이 가장 쉽게 자신의 집단에 힘을 실어줄 방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대가 누구인지, 상황이 어떠냐에 따라 악인도 선인도 될 수 있다는 스텔라 장의 뼈 때리는 메시지를 담은 <빌런>이 떠올랐다.
어떤 것은 검은색 어떤 것은 하얀색/ 색 안경을 끼고 보면 어떡해. 재미 없는 너의 세상은 흑백/ So many shades of grey 라는 가사가 생각이 나는 순간이다. 잊지 말자. 세상은 흑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너무도 많은 색채와 빛을 내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결국 인간은 온전히 자기 자신일 때 행복하다.
스토아학파의 대표적 인물 에픽테토스가 내세운 에픽테토스 철학은 나에게 속한 것(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나에게 속하지 않는 것(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나누는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에픽테토스에 의하면 인간이 겪는 수많은 혼란과 어려움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영역까지 마음대로 통제하려고 하면서부터 초래된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통제 불가능한 것은 무시해야 하는데, 그 둘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자 지혜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건강한 인간은 스스로 이러한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설명한다.
스토아학파에서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하고 그 밖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조언을 건넨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 누군가와 연결돼있고자 하는 욕구는 생리적 욕구 그리고 안전의 욕구와 함께 너무도 당연한 인간의 기본 욕구이니 말이다. (하단의 Maslow의 욕구 단계 참조) 나 또한 언젠가 소속감의 달콤함을 맛보았다. 이제 겨우 소속되었다는 안정감을 주던 집단으로부터 원하지 않던 순간에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의 고통은 여전히 잊을 수 없다. 그 여파는 어찌나 큰지 나는 마치 처음 분리 불안을 겪는 아이처럼 정서적으로 몹시 불안해하며 한동안 새로운 집단에 아예 적응하지 못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소속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Maslow의 욕구 단계 피라미드>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가 충족되었다면 사람들은 소속 집단을 통해 안정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소속감은 사람들을 나약하게 만드는 경향도 있다. 먼저, 소속감이 주는 일종의 안정은 너무나 달콤해서 소속된 사람들을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취약한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마치 당장 생존을 앞두고도 이전의 소속 집단에 압도되어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소속 집단 내의 내부 회의나 그 집단의 리더가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한 개인의 문제 해결 능력이나 위험 관리 능력은 떨어진다. 그들은 집단에 소속되었다는 안도와 함께 그 자리에 안주해버리기도 한다. 둘째, 소속감이 달콤한 만큼 소속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씁쓸한 소외감이 남는다. 우리 사회가 일명 적령기(?)에 일정 집단에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제고해본다면, 우린 어떻게든 (특히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집단에) 집단에 소속되고자 발버둥 치는 사람들을 결코 비난하지 못한다. 다만 집단의 의사 결정에만 기대지 않고, 소속 집단의 정체성을 함께 형성해나가는 구성원이라는 사명으로 부단히 노력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끊임없이 타인과 항상 연결되어 있고자 하는 사람들도 타인과의 연결을 끊고 홀로 서고자 하는 사람도 언제인가 외로움을 느끼고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바라게 될 지는 모를 일이다. 어쨋거나, 혼자이든 함께이든 결국 인간은 온전히 자기 자신일 때 행복하다.
온전히 자기 자신인 상태의 인간이 혼자서만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혼자일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와 늘 함께한다고 해서, 행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 그래서 결심했다. 만화 속 스너프킨처럼 살겠다고. 스너프킨처럼 혼자서도 충만한 사람. 그러다 소중한 내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가장 먼저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Magazine_2021 > 8호_소속, 나를 바꾸고 내가 바꾸는 공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8호_소속, 나를 바꾸고 내가 바꾸는 공간_웹진 ver. (0) | 2021.09.05 |
---|---|
8호_교차점에 서서 / 연푸른 (1) | 2021.09.04 |
8호_소속된 집단이 피보호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인지 / 망 (0) | 2021.09.03 |
8호_숙명에서 갈망으로 / 바투 (0) | 2021.09.02 |
8호_소속, 나를 바꾸고 내가 바꾸는 공간 / 편집장의 인사 (0) | 2021.08.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