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 나를 바꾸고, 내가 바꾸는 공간.
에디터 / 연푸른
안산 선수와 김제덕 선수가 도쿄 올림픽 양궁 혼성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것이 7월 24일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이 8월 27일이니, 그게 벌써 한 달이 넘었다는 뜻이다. 올림픽은 이미 한참 전에 끝나고 그 자리를 패럴림픽이 잇고 있는 와중에, 도대체가 이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나만 아직도 거기에 멈춰있다. 나는 아직 여자 배구 한일전의 시간을 살고 있는데, 벌써 그게 한 달 전이고 다음 주면 또 개강을 한다니. 말도 안된다. 당장 내 올림픽 돌려 내...
라고 말은 했지만, 나는 사실 스포츠 경기를 즐기는 편은 아니다. 게다가 코로나가 창궐하는 이 시국에 올림픽을 한다고? 처음에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분명 온라인에서의 반응도 대략 비슷했던 것 같은데, 분명 그랬는데……. 정신을 차리니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스포츠 경기만 보고 있었다. 안산 선수가 세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 아마 많은 사람들의 심장 속에 하나의 문장이 펄쩍 튀어나와 몸을 한 바퀴 돌고 사라졌을 것이다. 바로, “She is Korean.”
좋게 말하면 애국심, 우스개로 말하면 국뽕. 부정적으로 나아가면 국수주의가 되는 이 감정은 참 신기하다. 평소에는 지옥을 부르짖으며 가차없이 내 나라를 까내리지만, 다른 나라 사람이 한국 욕 하는 건 절대 못 들어준다. ‘이 나라는 선진국 되긴 멀었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같은 문구를 보면 마음 한 켠에 울림이 생긴다. 그 문구가 한강 인근에 고층 건물이 올라가는 영상과 함께 나오면 이제는 코 끝까지도 찡해진다. BTS의 빌보드 차트 진입을 축하하고, 두유노기생충을 물으며, 우리는 ‘내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표현한다.
국가라는 제도, 그 제도 속에서 탄생한 정책은 때로 폭력과 희생자를 만들기도 한다. 하나의 국가가 되기 위해 배제되는 사람과 역사가 있음을 배우고 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그 배제되는 대상이 아닌가 의심이 들 때마다, 우리는 국가란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개념인지를 고민한다. 하지만 외국에서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릴 때, 결국 내가 기대게 되는 곳은 그 곳에 있는 우리나라 대사관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나 불편한 상황을 마주할 때도 ‘여기가 우리 나라라면…’하는 가정을 먼저 하게 된다. 소속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집단이 국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법적으로 소속을 인정받아 한 가정이나 학교, 회사 등의 조직의 소속되기도 하고, 공식적인 절차 없이 또래 집단이나 취미 소모임, 프로젝트 그룹에 들어가기도 한다. 혹은 소속 절차가 따로 존재하지 않아 소속됨과 그렇지 않음의 경계가 모호한 집단도 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의 모임, 민초단, 페미니스트처럼 취향과 생각이 반영된 집단이 그러하다. 이 경우 소속을 위한 명시적 조건이나 절차가 있는 것은 아니라 내가 특정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고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개개인은 분명 자신이 그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소속감을 느끼고, 여기서 위안이나 용기, 혹은 편안함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소속감이 늘 위안이나 용기, 혹은 편안함만 주는 것은 아니다. 소속감은 때로 내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차별적 시선와 배제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 국가에서 시민권을 얻지 못한 사람은 난민이 되어 세계 이곳저곳을 갈 곳 없이 헤맨다. 당연히 국가가 제공하는 안정성과 혜택도 즐기지 못한다. 내 집단에 속하지 못한 사람은 타자가 되고, 경쟁자가 되고, 나아가 배제해 없애고 싸워 이겨야할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내 집단에 대한 사랑과 소속감이 타자에 대한 혐오로 발현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살면서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수많은 집단에 소속된다. 물론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 때도 있고, 심지어는 내 소속을 싫어하고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내 소속 집단이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나의 소속 집단은 탈피하기 어려운 나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만들어주고, 그 정체성과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는 타자도 만들어준다. 누군가는 나를 통해 ‘나’라는 사람보다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을 먼저 보며, 때로는 나 역시 타자에게서 그의 집단을 먼저 본다.이렇게 소속은 내가 기대고 안락함을 느낄 공간이면서 동시에 족쇄다. 마음을 울컥하게 만드는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또 어느 순간엔 지긋지긋하고 부담스럽다. 우린 어딘가에 소속되기 위해, 혹은 소속되지 않기 위해, 또는 소속되었기 때문에 변하거나 정체된다. 다시 말하지만, 소속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밍기적의 8호 <소속>은 나와 내가 소속된 집단 사이의 연결을 다룬다.
온기의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는 소속감이 처음 생겨나, 타인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살펴본다. 그는 이러한 배척이 전쟁과 같은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적당한 소속감과 거리감을 구성해야함을 이야기한다.
바투의 <소속, 숙명에서 갈망으로>역시 우리 안에 내제되어 있는 소속감에 대한 갈망을 다루고 있다. 인간은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하고, 이를 넘어 내가 소속될 집단을 직접 선택하고 싶어한다. 바투의 글은 이런 본능을 보다 건강하게 추구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망의 <소속된 집단이 피보호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인지>는 한 가정에서 나고, 한 사회에서 자라는 아동이 그들이 소속된 가정과 사회에서 어떤 것들을 학습하게 되는지를 이야기한다. 망의 글은 마찬가지로 한 가정에서 나고 한 사회에서 자라는 우리는 과연 아동을 위해 어떤 공간을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한다.
연푸른의 <교차점에 서서>는 동남아시아의 사례를 통해 하나의 소속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갈등이 사실은 여러 소속의 교차점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그의 글은 하나의 소속으로 개인을 판단해 단정하는 것이 얼마나 무용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올림픽 시즌동안 우리나라 국민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의 땀과 눈물, 성취를 보며 함께 울고 웃었다.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메달과 승리에 연연하는 모습도, 경쟁자인 나라를 까내리는 모습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동시에 과거의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상대팀에 대해 ‘실수를 했으며 좋겠다’는 식의 중계 역시 들을 수 있었던 말 많고 일 많은 올림픽이었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는 탈레반을 피해 한국에 온 아프가니스탄의 난민을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이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우리’ 나라 국민의 안전을 위해 ‘남의’ 나라 국민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나라’ 국민 역시 난민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 전쟁 당시, 수많은 한국 난민이 일본과 미국 등으로 피난을 갔고,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현재 한국의 난민인정률은 G20국가 중 18위이다. 우리 나라가 어디까지를 ‘우리’로 보고 있는지, 누구에게만 우리나라에 대한 ‘소속’을 인정하고 있는지, 이제는 생각해봐야할 때다.
곧 새학기가 시작된다. 나는 여전히 대학교에 소속되어 이 곳에서 수업을 듣지만 나의 수많은 친구들은 대학의 소속권을 벗어나 사회로 나갔다. 원래의 공간에 남은 이들에게도, 다른 곳에서 새로운 둥지를 틀 이들에게도, 돌아올 9월이 평온하고 즐거운 달이길 바란다. 밍기적에 소속된 네 명의 에디터 역시 안녕한 9월을 맞이하길 바라며, 편집장 인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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