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색색책책
에디터 / 망
우리는 어디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것에 흥미를 느끼고, 한 번쯤의 경험을 해보고, 정착하고, 뿌리 내리고, 일상화 하는 것일까?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입구는 여러 군데에 포진해 있을 것이다. SNS에서 보여지는 남들의 취미 생활이 나의 흥미가 되기도 하고, (나 같은 경우에는 한강 웨이크 보드가 그러했다. 대학교 후배가 여름만 되면 도전하는 한강 웨이크 보드의 기록이, 처음에는 넘어지기만 하다가 그 다음 해에 바투 서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매력을 느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남이 같이 하자고 제안하는 게 흥미가 되기도 하고, (연극 관람과 야구 응원 취미에 대해서는, 이런 의미에서 밍기적의 또 다른 편집장 두 분께 감사드린다.) 어렸을 때부터 관심 있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들이 성인이 되어 누리는 자유와 여가 시간에 날 채워줄 새로운 취미가 되기도 할 것이다.
오늘 지면에서 다루고자 하는 취미는 세 번째 입구로 들어서 2년 동안 잘 자리 잡은 형태의 것이다.
바로, 독서.
취미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그렇다고 책 한 권 안 읽고 사는 사람이 있냐고 물으면 그건 또 그것대로 누군가에겐 흥미 요소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그러나 적어도 밍기적 구독자들의 90%는 독서가 취미거나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을 뿐 독서에 흥미가 있는 자들이라고 믿는다. 이 활자 중독자들.- 어쨌든 의무 교육 기간 동안 독서기록장이라는 간악하고 사특한, 그리고 생활기록부에 기재할 거라는 협박성 아래에서 억지로 독서하던 세월을 생각하면 취미라기엔 역시, ...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마저도 독서하는 것을 좋아했던 아이들, 그래서 자진해서 도서부원이 되거나 독서 동아리에 가입하던 아이들, 혹여 그때는 관심 없다가도 성인이 되고 나서 인스턴트 같은 짧은 영상 컨텐츠들에 뇌를 절이다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교양을 쌓아볼까 하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무쪼록 간에 다시 교보문고의 향수 냄새를 맡으러 또는 겸사 겸사 광장의 볕을 쬐러 광화문에라도 걸음 한다. 취미 간에 위계를 두는 것은 좋아하지도 않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책 한 권 이고 졌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뿌듯한 허영심도 한 몫한다. 허영심이라 단순히 뭉게버리기엔 명품 든다고 된장이라 폄하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바보같은 발언이긴 하지만. 자격지심에서 비롯되는 표현이건데 독서가 거창한 취미는 아니라는 뜻이다.
성인이 된 이후 다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나의 세계의 지면을 넓혀야 한다는 즐거운 압박감에 시달려 왔지만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가장 컸음과 동시에 사실이었다.
나로 하여금 독서를 하도록 강제한 건 다름 아닌 직장 동료였다. SF 장르의 작품들을 매달 한 권씩 읽고 토론을 하는 모임을 만들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시간 없다는 핑계로 책을 가까이 하고 싶으면서도 멀리 하던 나에겐 반가운 소식이었으나 어쨌든 그 없다는 시간 쪼개서 책을 읽어야 하는 것도 어지간한 부담이었다. 다행인 건, 그래도 모임의 일원들은 전부 기존에 알고 있던 직장 동료들이라는 점이었고,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더더욱 모임 날짜에 맞추어 독서하는 것에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거창한 서론이야 두 번째 핑계요, 결론만 말하자면 우습게도 이제는 모임이 없어도 매주 꾸준히 한 권 이상 SF 소설을 읽는 훌륭한 활자 중독자로 거듭나 버리고 말았다. 취미로서 뿌리 내린 지점이 SF 장르라는 점도 메타적으로 바라보니 퍽 흥미로운데, 하필 SF라서 내가 빠져버렸다는 사실이다. 한국 SF 저서들에 대해 다루는 기회는 다음으로 미룰 수 있으되 오늘은 내가 성인이 된 이후 좀처럼 남긴 적 없던 독서기록에 대해 다루어 볼까 한다.
실은 독서 모임을 갖기 전, 졸업 선배로부터 책 한 권을 추천받아 그에게서 빌려 읽었다.
해당 작품, <1차원의 되고 싶어(박상영)>을 읽은 후 8개월만의 단권짜리 장편을 읽었다. 그동안엔 단편만을 읽었다. 그 이유는 출퇴근 시간에 짧고 굵게 집중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단편만 읽다보니 그 감칠맛이 아쉬워 사놓고 한참을 미뤄둔 <지구 끝의 온실(김초엽)>을 꺼내들었다. 분명 출근 시간대에 다 읽지 못하겠지만, 그래서 잠깐 끊기는 기분이 아쉽겠지만, 그러므로 혹여 간만에 다시 펼쳐들었을 때 이전 내용을 까먹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제는 장편을 다시 시도해 볼 때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1차원이 되고 싶어>는 주말 하루를 바쳐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숨에 읽을 수 있었기에 시도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왜 하필 김초엽 작가의 책이었는지부터 시작한다면, 그의 작품이 성인이 된 후 첫 SF 소설이었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청소년기에는 많은 작품을 읽었다. 국어 문학을 공부하다보니 국어 선생님이 추천해주시는 근현대사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읽는 자체의 기쁨은 좋아했다. 성인이 되었을 땐 추리 소설 위주로 읽었다. 영화에 있어서도 복선이 탄탄한 반전물을 주로 시청하던 시기였다.
취직을 했다. 인생에 분기점이 찾아왔단 뜻이다. 직장 동료들이 독후감상모임을 만들자고 했다. 제안한 동료가 SF 소설을 무척 좋아했다. 첫 모임 독서로 김초엽의 단편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들고 왔다. 기억에 희미한 중학생 때의 독서를 포함한다면 간만에, 혹은 처음인 SF 소설 독서는 성공적이었다. 단편선 속 모든 작품들이 취향은 아니었지만 단권의 제목을 차지한 해당 단편이 제일 취향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직장에서 제공하는 복지 비용으로 미친 듯이 책을 사 모았다. 김초엽의 장편은 어떤 느낌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사두었던 책을 비로소 읽었다.
단편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이야기에 정이 들 때 즈음 끝나버려 아쉽게 한다면,
장편은 우리로 하여금 너무나도 그들의 이야기에 깊게 파고 들었을 때에 끝나버려 애달프게 한다.
언젠가 <궤도 끝에서(전삼혜)>를 읽고 이런 감상을 남긴 적 있다. ‘SF작가들한테 자꾸 사랑 이야기 쓰는 거 금지시켜야 한다’고 말이다. 이 말 그대로 <지구 끝의 온실>에게도 외치고 싶다. 책을 읽고 운 것은 <토요일(박애진)>이 처음이었는데 (그러니까 성인이 된 이후 한정이다) <지구 끝의 온실>을 읽으면서도 울어버렸다.
사실은, 끝맛이 좋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현실에 항상 충실하여 살아가고 있지만 작품 속 인물들도 고스란히 겪는 것처럼 세계에 배반당하기 일수라서 삶이란 늘 피곤하고 날 힘들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를 그렇게 만드는 것들에 안타까와 가련함을 갖고 다시 세계를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지축을 바꾸어 보러 내일 또 일어나긴 한다. 그러니 가상 세계에서만큼은, 퇴근 후 휴식을 취할 때 만큼은 재미난 이야기들을 읽고 싶다. 취향을 꼽으라면 <사랑의 질량 병기(대혐수)>, <메타몽(강명균)> 같은 이야기들. 뒤집어져라 날 웃게 만들거나 따듯한 가정식같은 느낌들.
그러나 동시에 나의 변하지 않는 부동의 1위 최애작을 생각하면 그건 <노인과 바다>라서, 어쩌면 그래서 나도 <지구 끝의 온실>을 좋아할 수밖에 되지 않았나 싶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의 표현이 돈이라면 창작과 독서의 세계에서 사랑의 표현이란 손수 타이핑하여 감상문을 남기는 행위일 것이다.
내가 전문적인 분석가는 아니니 작품 외적인 것을 해체할 순 없지만 간단히 첨언만이라도 하자면 3부작의 구성이 좋았다. 1부, 2부, 3부로 구분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의 끊어짐 또한 좋았고. 12일 출퇴근길에만 읽었던 독서가 13일에는 퇴근하고도 집에 앉아 끝까지 이야기를 따라가게 만들었다. 3부로 들어와서는, 결국 2부의 인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인터스텔라>를 개봉 년도 극장에서 직접 보았을 때 친언니가 한 말이 아직도 오래도록 기억난다. “결국 사랑이 이겼다”고. 어떤 행성을 탐사할지 고민하던 등장인물들 중 브랜드(앤 해서웨이 분)는 자신의 연인이 향했던 행성을 탐사하길 바랐다. 주인공 쿠퍼(매튜 매커너히 분)는 이성적으로 우선순위를 결정하길 바랐기에 브랜드의 의사 결정이 지나치게 감정적임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스포지만) 결국 인류가 살 수 있었던 행성은 브랜드가 선택한 행성이었다. 사랑이라는 신경물질을 따른 선택이 곧 인류를 구원하는 방식이었다니. <인터스텔라>를 설명하는 언니의 방식이 몹시 마음에 들었던 덕분이고, 그 문장이 결국 삶을 설명한다고 생각했다.
<지구 끝의 온실>도 마찬가지였다.
SF 소설은 어쨌거나 소설이다. 인문학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어야 할까. 내 지론은 결국 ‘선함’이다. 나는 인간의 선함을 이야기하는 소설들에 끌린다. 선함의 기준을 넓게 본다면 <저주 토끼(정보라)>류의 소설도 포함이다.(불량식품 취급하긴 한다. 주식으로 먹을 순 없다는 뜻.) <지구 끝의 온실>은 우리도 겪을지도 모르는 기후 위기(혹은 그 다른..)로 인한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우리가 ‘선함’으로 인해 살아남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사랑도.
아! 이미 언급한 이야기를 다시 끌어 올리건데 정말이지 ‘SF작가들한테 자꾸 사랑 이야기 쓰는 거 금지시켜야 한다’ 그때 이 감상을 왜 남겼냐면, 너무나도 슬픈 나머지 나에게 슬픈 감정을 느끼게 했다는 것 자체가 짜증났기 때문이다. 오타쿠한테 짜증난다는 건 너무 좋아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와 같은 의미이므로 나는 이미 이 작품 속 인물들에게 져버린 셈이다.
지수와 OOO의 고민들에 나는 너무나도 슬펐다. 단연코 그 연쇄의 시작을 명확하게 짚어낼 수 없다는 사실의 자명함을, 그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알았기 때문이다.
국어 문제를 풀며 답이 없다며 화를 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건 곧 우리의 꼬이고 꼬인 인간관계와, 삶과도 닮아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조차 어려운 것을. 그러나 그 고민들이 우리를 강인하게 만들고 성장하게 한다. 지수와 OOO처럼.
1부와 2부의 화자가 작품 속에서 가장 감정적이었던 (<-내 기준) 인물들과 다소 거리를 두고 있어 보다 편하게 읽지 않았나 싶다. 그들의 거리감 있는 시선 덕분에 나는 딱 이만큼의 감정 몰입을 할 수 있었다. (딱 이만큼의 감정 몰입의 결과 = 울었다)
나를 울게 한 건 지수와 OOO의 고민 때문만은 아니다. 랑가노의 마녀들,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OOO를 떠난 이들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 행위들. 그 행위가 낳은 결과들. 그리고 잊혀졌던 진실들. 그것이 모두 나를 아프게 한다. 그들은 위대한 것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과거를 지키고 싶었다. 약속을 지키고 싶었고, 그렇게 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처럼...
나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한평생 제대로 된 후회조차 해본 적이 없다. 돌이킬 수 없는 문제에 매달려 있는 건 현재를 살아가는 나를 너무나도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의 내 모든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확신하거나 혹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러니 나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의 생존 방식에 무너졌다.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많은 감상을 남길 수가 없다. 이 감상문을 읽고 흥미가 생겨 <지구 끝의 온실>을 집어들 다른 이들의 최초의 감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제발 스포 없이 봐주길. 이 감상에서도 스포가 될 만한 건 빵꾸를 뚫었다만 그자체만으로도 이미 스포라고 생각하니..) 다만 이 작품을 <노인과 바다>와 마찬가지의 결로 사랑한다는 말을 다시 한 번 남긴다. 그 긴 시간동안 고군분투해 결국 남은 거라곤 뼈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와 사자의 꿈을 꾼 노인과 마찬가지로.
감상 포인트를 남길 수 있다면 마지막으로 남기겠다. 제목에도 있고, 읽다보면 금방 주요 소재를 파악하겠지만 ‘식물’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만.) 우리를 구하는 것은 우리가 소홀히 한 것들일지도 모른다. 혹은 정말로 그럴지도. 소설 및 인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선함’이어야 한다면 SF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추상적인 감상을 남긴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감상도 궁금하다. 작품 속 OOO가 OOO에서 시작하여 전세계에 퍼졌듯이 하나의 작품에서 시작된 서로 각기 다른 사람들의 공통된 감상을 듣고 싶다. 허나 그 전에 먼저 내가 <지구 끝의 온실>이라는 식물에 열린 나만의 열매에서 추출한 씨앗을 심지 않는 이상 다른 이가 일군 온실을 보고 싶진 않았다. 이제 나만의 온실을 개방하였으니 다른 사람의 온실을 방문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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