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분노같은 큰 감정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믿었다.
내가 19살, 20살이었던 2016년과 17년도에는 촛불이 정권을 바꿨다. 사람들의 행렬 속에 나 역시 촛불을 들고 서 있었다. 그건 내가 목격한 역사 중 가장 큰 역사였다. 세상은 이런 식으로 바뀌는 거구나, 그때의 나는 그렇게 믿었다. 촛불로 세상이 변할 줄 알았고, 세상은 늘 그런 식으로, 분노의 물결이 한순간에 도시를 집어 삼키듯 그렇게 변하는 줄 알았다. 당시 언론정보학과를 진학하고 싶었던 그리고 진학하고야 말았던 나는, 내가 언론인이 되어 그 물결의 한 흐름을 만들게 될거라 믿었다. 그렇게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하고 말거라고.
그로부터 7년의 시간이 지났고, 그 사이 물론 많은 것들이 변했다. 개중엔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 변화도 분명 있겠지만, 어떤 것들은 갈수록 안좋아지기만 하는 것 같다. 온라인에는 냉소가 유행하고, 세상에 대한 분노가 폭력이 되어 길거리에 흩뿌려진다. 어떤 갑을관계는 자본의 고리를 타고 자꾸 더 어린 나이로 내려가고, 비슷한 가해와 비슷한 죽음의 반복 앞에 나는 더 무기력해진다. 내 눈에 그런 소식만 보이는 걸까, 아니면 실제로 세상이 점점 더 혹독해 지는 걸까.
어느 순간부턴 뉴스를 보지 않게 됐다. 피곤한 헤드라인 앞에서 나는 곧장 눈을 돌려버린다. 분노는 지나치게 생산적인 감정이라 나를 지치게 만든다. 나는 분노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격리시킨다. 그렇게 알아야 할 것들마저도 회피하고 있는 요즘, 분노가 사라진 빈 자리에 담담함의 탈을 쓴 무심함이 자리를 잡는다.
그러다 한 연극을 보게됐다.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한 <이런 밤, 들 가운데서>.
참사를 지나는 마음과 동시대 공연예술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되었다는 이 연극은 지금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해 찾아낸 나름대로의 대답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답이 퍽 마음에 들었다.
좌석은 원형 무대를 둘러싸고 동그랗게 배치되어있다. 무대 중앙은 오름처럼 조금 쏟아있고, 배우들은 한 명씩 그 언덕위로 올라가 자신을 소개하고는 다시 내려와 관객석 사이에 마련된 자신의 의자에 앉는다. 언덕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모여앉은 배우와 관객은 서로 눈을 맞출 수도 있고, 마주한 두 눈을 어색하게 피할 수도 있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관객의 흥미로워하는 혹은 지루해하는 눈빛이 그대로 보인다.
연극은 느슨하게 연결된 여러개의 이야기들이 병렬되며 이어진다. 흔히 연극에서 기대되는 기승전결, 클라이막스와 갈등의 해소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들다. 종을 초월한 우정으로 서울동물원의 자랑이 된 앵무새 ‘사랑’이와 뻐꾸기 ‘자유’가 동물원 우리를 탈출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조금 더 지나 들리는 뉴스에서는 기대 수명이 짧아 먼저 죽은 뻐꾸기 ‘자유’의 사체 옆에 총에 맞은 듯해 보이는 앵무새 ‘사랑’이의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시인의 친구 소란은 계간지 [자유와 사랑]의 자유기고 코너 ‘21세기의 시’에서 오자를 발견해 출판사에 메일을 보낸다. ‘나에게 랑사이 그랬고 너에게 애정이 그랬다’라는 문장에서 ‘랑사’가 ‘사랑’의 오자가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하루에 한 번, 밖으로 나와 우편함을 확인하던 할머니가 어느날 내려오지 않는 걸 발견한 이웃주민의 이야기가 들린다. ‘앞집 살아요. 수박 드세요.’ 퀴퀴하고 역겨운 냄새가 나는 할머니의 집에 그는 이제 가끔 들러 깨끗한 마스크와 과일을 건네드리고 나온다. 심야라디오에서는 2014년 4월 16일과 2022년 10월 29일 자정을 알리는 알림음이 들린다. 지하철에서 울고있는 여자를 보고 있는 어머니의 말이 들린다. ‘무슨 일로 저렇게 서럽게 울고 있을까’, 낯선 사람을 걱정하는 말이 미쳐 우는 여인을 토닥여주지는 못한 채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비오는 날 술을 마시며 길거리를 달리는 다섯 친구들의 대화가 들린다. ‘나는 걔를 생각하면 아까워 죽겠어’ 한 친구가 반복해서 말한다. 승자와 소란의 헤어짐이 보인다. 너 트럼펫 연주자에게 반했잖아, 승자가 말한다. 승자가 시를 쓴다. ‘나에게 랑사이 그랬고 너에게 애정이 그랬다,’라고 쓴다. 다섯 친구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앵무새 ‘사랑’이를 구한다. 다시 뉴스가 들린다. 앵무새 사랑이를 죽이려고 했던 한 시민이 스스로 경찰서에 찾아가 자수한 후, 개조한 총을 반납했다는 뉴스다. 모두, 뻐꾸기를 본다. 모두, 개똥지빡이를 본다.모두, 사랑을 본다.
그 순간 객석 조명이 켜진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관객과 눈이 마주친다. 나는 그 관객와 눈을 맞출 수도 있고, 마주한 두 눈을 어색하게 피할 수도 있다. ‘모두, 사랑을 본다’라는 대사와 함께, 관객은 동그랗게 둘러앉은 서로를 보게된다. 이 연극은 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의 눈맞춤으로 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에피소드들의 많은 것들이 설명됐다.
늘 집을 나오던 시간에 나오지 않는 할머니를 신경쓸 수 있는 마음, 지하철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시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 누군가를, 어느 순간을 기억하는 마음. 동물원에서 탈출한 뻐꾸기 ‘자유’와 앵무새 ‘사랑’이의 우정과 삶을 응원해줄 수 있는 마음. 그런 작고 소박하고 다정한 마음들. 이 연극은 그런 것들이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크고 대단하고 희생적인 무엇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그냥 작은 관심으로서의 사랑. 건너편에서 연극을 보고 있는 저 사람처럼, 낯설지만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자그마한 관심과 다정함. 그게 이 연극이 찾은 답 같았다. 반복되는 참사와, 소리쳐도 변하지는 않는 현실 속에서도, 그래도 우리 서로를 사랑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자유’와 ‘사랑’이 탈출해버린, 죽어버린, 죽임당해버린 세상에서 사랑을 구해야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여전히 ‘사랑’이라는 단어는 내겐 너무 큰 감정 같다. 그래서 나는 내 멋대로 그 단어를 다정함으로, 혹은 동정심으로 표현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요즘은,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힘은 동정심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에 시비조로 반응하는 사람에게. 그래, 당신의 인생도 참 힘들겠죠. 그래, 당신도 당신의 삶을 살아가느라 지쳤을 뿐이겠죠. 당신도 살아남기 위해 그러는 거겠죠. 라고 말할 수 있는 힘. 분노를 안타까움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 한 사람의 분노 뒤에서 그 사람의 삶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이 세상을 더 좋을 곳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사람들 어떤 일들은 도무지 사랑할 수 없더라도, 그래도 여전히.
모두, 사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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