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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_2023/19호_자유 주제

19호_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 / 망

by 밍기적_ 2023. 12. 28.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

에디터 망

 밍기적 역대 최초로 진행하는 자유 주제의 그 첫 번째 시도가 찾아왔다. 정기적으로 회의를 거쳐 매달 글감 삼을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추어 글을 써왔던 우리 에디터들에게는 자유 주제라는 추상적인 표지판에 지도 잃은 여행객처럼 방황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불현 듯, 매번 주제를 정해올 때의 1원칙을 떠올려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밍기적의 출발점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모든 것들이 밍기적 매 월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어떨 때는 그것이 커피이기도 하고, SNS이기도 하고, 재회이기도 하고, 시험이기도 한 것처럼..

 그럼 나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본다. 지금 나를 나로서 있게 한 것은, 나를 이 길 위에까지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멀리 있지 않았으나 그에 가까이 가도록 만든 것은 의외로 최근의 사건 덕이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일주일 전 동창회에 갈 일이 있었다. 자랑할 바인지는 모르겠으나 자부심을 가지기엔 딱 좋은 것이, 동문이라 할 수 있는 학교는 그 역사와 전통이 제법 길어서 동창회에는 70대부터 20대까지 중간 중간에 듬성듬성 빈 나잇대를 제외하고는 꽤 다양한 연령대가 모일 수 있었다. 화제는 어쩌다보니 요즘 젊은 사람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보지 않는 세태에 대한 젊은이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마이크 돌리기로 시작되었고 얄궂게도 첫 ‘젊은이’는 유부 선배님이 되셨다.

 동의 구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 전부 지면으로 옮길 순 없으나 필요한 말만 건져내자면 ‘유부임에도 자식을 보지 않기로 한 이유는 요즘이 살기 좋다고만 말할 순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었으며 그에 대해 어르신들은 아리송해 했다. 낳아 놓으면 경제적으로 부족하든 아니든 열심히만, 건강하게만 키우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소위 ‘젊은이’들이라 칭해진 동문들은 까마득한 선배 동문들에게 개근 거지와 같은 말이 있다며, 그만큼 현재의 세상은 너무나도 이웃과 비교하기 쉬운 시대가 되었으며 아이의 친구가 누리는 만큼 내 아이에게도 응당한 권리를 주지 않을 수가 없으니, 우리 어른들의 입장이야, 경제적으로 넉넉하기만 하다면 초등학생인 아이에게도 월 용돈 10만원씩 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내 아이 곪으며 옆집 아이 부러워하는 꼴 피눈물 흘리지 않고 볼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아이와의 삶을 포기하겠다는 의견인 셈인데.

 그렇다면 의문. 과연 아이들이 어른에게 바라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 아들은 다정한 보호자를 원할까 형편이 넉넉한 보호자를 원할까? 보통 이런 밸런스 게임의 경우 후자를 비판하고 정서적 유대감을 강조하기 위해 ‘경제적 형편이 넉넉한 보호자가 되기 위해선 일을 많이 해야 하고 그러니 아이와 놀아줄 시간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들 하지만, 정말로 부유한 이들을 보면 ‘맞벌이 부부’의 등장과 함께 사라진 줄 알았던 ‘전업 주부와 외벌이의 조화’로도 충분하 가계 소득 유지가 가능한 가정도 보인다. 즉, 정말 형편이 넉넉다 못해 충분한 이들은 경제적 풍요와 정서적 유대감의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아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만나는 보호자가 비단 가정 내 보호자만은 아니다. 동네 이웃 주민들, 이모, 삼촌, 그리고 학교 선생님까지. 나는 돌고 돌아서야 나의 근본 질문에 도착했다.

 지금 나를 나로서 있게 한 것은, 나를 이 길 위에까지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던가. 교사로서 자아 80퍼센트를 소진하고 있는 현재의 나에게 청소년 학생들만큼 삶의 동기로서 결정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존재가 없다.

 

최근 에디터 망이 고백하건데, 올해 새로운 취미가 독서라 하였다.

 책을 읽다 보면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한 청소년 작품에까지 손을 뻗게 된다. 어른이 쓴 청소년 시각에서의 책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는 차치하고 나는 일단 청소년 문학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감정으로서 유치하다는 생각을 많이 떠올린다. 청소년이 즐겨 읽을 만한 책은 어른 입장에서 유치하다는 감정의 발화야말로 더욱이 기만적이겠으나 지금은 좀 솔직해질 수밖에.

 동시에 슬프기도 했다. 내가 이제는 청소년의 시각에서 작품을 바라보지 못하는 나이가 되었나? 청소년인 요즘 우리 아이들, 학생들은 이런 책을 읽고 재밌어 하는 걸까? 나도 학생 땐 로알드 달 책을 읽으며 즐거워 하긴 했지만 요즘 청소년 문학은 왜 이리 쉽게 갈등이 해소되는 것 같지? 개인적 편차가 있다면 디즈니보단 픽사 애니메이션 계열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완벽하지만은 해피엔딩에서 더 현실감을 느끼고 공감하던 나라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늘 아래 같은 립스틱 색깔은 없듯 그 많은 청소년 문학 중 내 취향에 쏙 들어맞는 것도 없을 리가 없다. 구병모의 「피그말리온 아이들」은 어른이 주인공인 청소년 문학이다. 대중들에게 더 가닿을 비유로는 2011년 영화로 개봉한 <도가니> 같은 느낌이라고 해두겠다.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견고하고 비합리적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학교와 그곳을 파헤치려고 하는 어른의 이야기다.

 「피그말리온 아이들」 속 학생들에겐 독특한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범죄자인 부모를 둔 아이들을 한 데 모아놓은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이다. 학교의 교장은 아이들에게 급식과 기숙 시설의 대가로 노동을 시키며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너희의 부모와 다르다. 너희는 응당 그들의 저주와도 같은 혈연지간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립하는 건전한 성인이 될 수 있다. 학교는 너희에게 그러한 교육을 시켜주고 노동의 가치를 알려주는 곳이다, ... 취지는 좋다 할 수 있으나 아이들의 통제하는 방식에 과한 억압이 가해진다. 시청 가능한 콘텐츠도 제한적이고 감정 표현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범죄자인 부모와 아이들 간 연쇄성을 끊기 위해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폭력성을 보이면 감금을 통해 분리 지도에 들어간다. 다큐멘터리 촬영 작가인 주인공은 학교의 폐쇄성에 대해 깜짝 놀라긴 한다. 여느 어른들이 그렇듯 청소년 시기로부터 허물을 벗는 순간 관성적인 귀찮음에 시달리지만 여느 문학 작품 속 주인공이 그렇듯 어느 순간 정의감에 불탄다. 그래서 주인공인 어른이 학교를 변화시키긴 하느냐고? ... 그건 작품을 직접 읽음으로써 대면할 문제다.

 구병모는 작가의 말을 통해 좀 더 노골적으로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바를 명시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고대의 맞춤 로봇 탄생기다.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요소를 타인에게 갖다 붙이는 행위에 성공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타인이 아니게 되고 나를 투사한, 내 뜻을 반영한 내 소유의 로봇이 된다. 그러나 보통은 그 일이 실패하기 때문에 그는 어디까지나 타인이고......무엇보다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수많은 갈라테이아들은 오늘도 부모 또는 교사 또는 이 세상 모두일지 모르는 자기들의 피그말리온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당신 소유가 아니고 당신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어디까지나, 말하고 싶다. 모두가 실제로 그리 말하지는 않는다, 못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우리 어른에게 정말로, 어디까지 말하고 싶어할까? 학생이 나, 교사에게 바라는 모습은 무엇인가? 정답을 말해줄 이들이 아주 가까이 있음에도 나는 「피그말리온 아이들」의 주인공처럼 두려움 탓에 스스로를 무한의 성찰의 방에 가두어 버린다.

 

정답을 찾아 헤매는 동안에도, 걸어온 모든 길이 나를 만들어준다면 우리는 그 길 위에서 배움을 얻는다.

 언어화 되지 못한 물음은 내 눈동자에 담기고 텔레파시가 통하길 바라기라도 하듯 아이들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곧 관찰이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인지라 심연을 들여다 본 니체처럼 나 또한 아이들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또 책을 통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정교하게 교정 받는다. 심너울의 「컴퓨터공학과 교육학의 통섭에 대하여」에서는 학생 한 명만 재학 중인 시골 학교에 들어온 AI기기와 기싸움을 벌이는 어른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보시다시피 나는 청소년 문학이래도 이제는 청소년의 시각과 혼연일체가 될 수 없는 꼰대가 되어버린지라 어른의 입장에서 청소년의 세상을 바라보는 작품에만 공감하도록 설계 되어 버렸다.) 나라에서는 혼자 학교를 다니는 초등학생 아이를 위해 AI 친구를 보내주지만 그 AI도 학생과 마찬가지로 수업을 같이 듣게 하였더니 수학 시간에 AI가 먼저 정답을 쏙쏙 말해버린다. 주인공인 교사는 AI 때문에 학생이 수업을 못 듣게 생겼다고 발을 동동 굴리다 못 해 속상해서 교실에서 울음을 터뜨려버린다. 아이는 당황하여 교사에게 괜찮냐고 묻다가도, 교사가 무엇 때문에 속상해 하는지 알자 천연덕스레 자신이 AI 친구에게 그다지 과몰입하는 건 아니라고 응수해준다.

 “그때 승현(주인공)은 뭔가 알 것도 같았다. 아이도 이것이 대충 맞장구만 쳐주는, 스스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없는 인형 이상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림은 튜비 위에 상상의 조형을 덧씌웠다. 대답만이라도 할 줄 아는 뼈대가 있으니 아이의 상상력은 더 넓은 날개를 펼칠 수 있었다. 어느 때에 튜비는 무슨 문제도 풀 수 있는 척척박사 친구였고, 어떤 때에는 언제나 교실에서 자신을 기다려주는 요정 친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 인식을 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심너울, 「컴퓨터공학과 교육학의 통섭에 대하여」 중.

 AI 친구가 생겨 어른을 걱정시킨 아이는 2023년 개봉 영화 <메간>에도 등장한다. 아이는 AI 친구 메간과 떨어졌을 때 극심한 분리불안 증세를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 소중한 친구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내린다.

 우리 학교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서울시에는 교육청의 교육 복지 일환으로 전교생 모두가 전자 기기를 부여 받고 수업 도구로 활용한다. 교육청에선 이를 두고 디지털 벗이라는 의미에서 디벗 사업이라 칭하고 있다. 튜비와 메간의 현실 버전인 셈이다. 어른들이 청소년에게 우려하는 건 쉬는 시간에 디벗으로 유튜브를 시청하고 인스타에 접속하고 틱톡을 업로드하는 통제 불가한, 중독에 가까운 반복적이고 생산성 없이 무의만 행동의 반복이다. 이 글 꼭지의 첫문단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다시 말하자면, 니체가 심연을 들여다보니 심연도 니체에게 깨달음을 주었든 내가 아이들을 관찰하니 아이들은 재차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교실 속 아이들이 스스로 서로의 디벗 사용을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쉬는 시간에 유튜브를 보다가 적발된 학생은 관리 담당 학생의 권한에 의해 스크린 타임 제재에 걸린다. 10분만 디벗을 사용할 수 있고, 수업 시간에는 관리 담당 학생이 비밀번호를 풀어주어야만 수업 도구로 쓸 수 있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자제력이 약하단 것이 통계학적으로, 아동심리학적으로 맞는 말이겠으나 현실은 이따금 이론을 뛰어넘어 실존한다. 내가 관찰한 아이들 일부는 통제력이 부족하기에 지극히 현실적이었고, 또 다른 아이들 일부는 서로의 인내심을 도와준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현실이었다.

 

 ***

 

 언젠가는 직접 학생들에게 나는 올곧은 어른이었냐고, 너희가 바라는 보호자로서의 모습이었냐고 물을 용기가 생기면 좋겠다. 용기를 막는 나의 두려움은 아이들이 마냥 선생님은 다 좋아요 하고 나를 추양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추측에서 기인하고 아이들이 나의 진지한 질문을 우습게 여기고 무시해버릴까 하는 추상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아이들이 나를 건전한 어른으로 성장시키는, 현재의 내가 되게끔 변화하는 존재였다면 그들은 또 다시 미래의 나의 위치가 달라지게끔 변화시킬 존재들이다. 관찰이 겹겹이 쌓일수록 아이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는 확신이 덧대어 풀칠될 것이고 그 위에 나는 당당한 질문지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는 날이 온다면 교실에서 얻은 해답을 들고서 나는 다시 동창회 동문 선배님들을 마주할 수 있겠지. 젊은이들이 새로운 가정 꾸리기를 꺼려하는 이유를 귀담아 듣고 싶으시다면, 태어난 아이들이 바라는 세상은 어떤 것인지도 물어보자고. 갈라테이아들이 바라는 피그말리온은 어떤 모습이며, 사실은 나도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었노라고. 그리하여 미래에 태어날 실존자들이, 같은 질문을 건네받았을 때 반복해 대답할 말까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추측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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