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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_2024/25호_기술

25호_멈춰버린 세상 / 또바기

by 밍기적_ 2024. 11. 21.

#1.

지구는 한때 끝없는 발전을 꿈꾸던 행성이었다. 기술은 매년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미래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세상은 갑작스럽게 멈췄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더 이상 새로운 기계나 혁신적인 발명품은 나오지 않았고, 인공지능은 더 이상 똑똑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스마트폰은 여전히 빠르고, 자율주행차는 여전히 도로를 달렸으며, 인터넷은 여전히 전 세계를 연결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챈 건 대도시의 중심부에서 일하던 한 연구원이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연구원 이나영은 회사의 연구소에서 동료들에게 물었다. 

이 회사는 최첨단 AI 시스템을 연구하는 곳으로, 그녀는 AI 시스템의 고도화를 연구 중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아무리 코드를 짜고 알고리즘을 수정해도, 시스템의 성능은 더 이상 개선되지 않았다. 마치 한계에 다다른 듯, 무언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더군. 전 세계적으로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 같아," 

얼굴에 피곤함과 불안이 가득 뒤섞인 채로 그녀의 동료가 말했다.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이나영은 불안에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2.

기술의 진보가 멈추자 사회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하며, 자율주행차를 타고 출퇴근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들이 하나둘씩 발생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징후는 기업들의 발표에서 나타났다. 매년 기대를 모으며 발표되던 최신 스마트폰 모델이 그 해에는 단순한 색상 변화와 약간의 배터리 개선 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실망했지만, ‘다음 해에는 더 나아지겠지’라며 넘겼다. 하지만 다음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도. 

사람들은 처음엔 그러한 변화에 개의치 않아 하는 듯 보였다. 기존의 스마트폰은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었으니 굳이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배터리 성능이 떨어지고, 운영체제가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인공지능 비서들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일정을 관리하고 질문에 답하며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해주던 AI는 이제 점점 더 많은 질문에 "죄송합니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데이터베이스는 업데이트되지 않았고,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었다. 

더 이상의 업데이트가 없었기에 사람들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사람들은 다시 과거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어느 누구도 과거로의 회귀가 영구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최신 스마트폰 출시가 지연되는 것 정도로만 보였지만 곧 모든 산업이 이 현상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가전제품은 고장 나면 수리되지 않았고, 자율주행차는 한 번 멈추면 다시 움직일 수 없었다. 기술자들은 문제를 분석했지만, 더 이상 기존 시스템을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사람들은 매년 더 나은 제품과 서비스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제 그 기대는 무너졌다. 

“이러다가는 전자기기가 전부 멈춰버릴 거야.” 

이나영이 동료들과 고장이 난 서버를 수리하다가 중얼거렸다. 그들이 사용하는 부품들은 이미 수년째 교체되지 않았고, 낡은 부품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계속 되면, 우리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질지도 몰라.” 

기술이 정체되자, 기존의 기계들은 점점 더 자주 고장이 났다. 냉장고가 멈추자 식품 보관에 어려움을 겪는 가정들이 늘어났고, 수도 시스템의 자동화가 불가능해지면서 정수 처리도 불안정해졌다. 병원에서는 낡은 의료 장비로 인해 환자들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일도 빈번해졌다. 자율주행차 시스템이 더 이상 업데이트되지 않자 교통 체계는 엉망이 되었고, 대중교통 역시 점점 비효율적으로 변했다. 에너지 공급은 불안정해졌고, 전력망은 자주 다운되었다. 

사람들이 의존하던 많은 자동화 시스템들이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기술에 의존하던 세상에는 조금씩 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3.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은 것은 기술 산업이었다. 혁신이 없으니 새로운 제품을 만들 수 없었고, 이는 곧 경제적 침체로 이어졌다. 한때 세계 경제의 중심지였던 실리콘밸리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가 나오지 않자 투자자들이 등을 돌렸고, 많은 스타트업들이 문을 닫았다. 대기업들조차 매출이 급감하여 수익을 내지 못하자 대규모 해고 사태가 벌어졌다. 기술에 의존하던 많은 직업들이 사라졌고, 사람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젊은 세대는 자신들이 꿈꾸던 미래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꼈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가상현실과 우주여행 같은 미래 기술을 꿈꿔왔지만, 이제 그런 꿈은 단지 꿈으로만 남게 되었다. 일부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은 여전히 기술의 진보를 갈망하며 연구를 계속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어떠한 혁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4.

의료 기술 또한 정체된 기술의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현대 병원은 자동화된 기기와 최첨단 의료 기술에 의존해왔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이 멈추자 이 기계들은 유지보수가 불가능해졌다. 수술용 로봇은 오작동을 일으켰고, 인공장기 제조 기술은 멈춰서 많은 환자들이 생명 유지 장치 없이 고통을 겪었다. 

심장 이식을 기다리던 한 환자는 최첨단 인공심장이 개발되기를 기다렸지만, 이제 그는 그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병원의 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인공장기가 생산되지 않을 겁니다. 수술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의료 시스템은 차츰 무너져 내렸다. 일상적인 치료조차 어려워지면서, 간단한 감염도 치료하지 못해 사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백신과 신약 개발이 중단된 이후로 전염병이 다시 기승을 부렸고, 대규모 재난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기술의 발전이 정지한 사회는 병원에서조차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5.

전통적인 산업으로 간주되던 농업 분야 역시 위기를 맞았다. 기후 변화에 대응해 효율적인 생산을 가능하게 했던 스마트 농업 시스템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으면서, 식량 생산이 점차 감소했다. 기계가 고장 나고 스마트 센서들이 기능을 멈추자 농부들은 다시 손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만, 인구를 감당할 만큼의 식량을 생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시의 슈퍼마켓 진열대는 점차 비어갔다. 기술에 의존하던 수많은 자동화 생산 시설들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으면서, 대규모 식량 생산이 어려워졌다. 사람들은 점차 배고픔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식량 부족은 사회적 불안과 혼란으로 이어졌다. 도시의 광장에는 식량을 구하기 위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폭력 사태가 점차 늘어났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안 나와. 씨앗은 있지만, 물을 댈 방법이 없으니까." 

한 농부가 마른 흙을 손으로 부드럽게 만지며 한탄했다. 자동 관개 시스템이 멈추고, 대규모 기계로 수확하던 농장은 이제 소규모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술의 한계에 부딪힌 농업은 결국 다시 수작업으로 돌아가야만 했지만, 그 속도는 사람들의 굶주림을 따라잡지 못했다. 

 

#6.

기술 발전이 멈춘 세계에서 인류는 점점 더 과거로 회귀하고 있었다. 기술에 의존하지 않는 삶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계 없이 살아가는 법을 다시 배우고, 손으로 농사를 짓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기도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아무도 미래를 다시 설계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더 나은 미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더 나은 삶을 향한 꿈보다는 지금 이 순간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사람들은 예전의 편리함을 기억하며 그리워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되찾을 수 없음을 알았다. 세상은 정체되었고, 사람들은 기술이 준 편리함 없이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었다.

그렇게 기술의 멈춤은 사회 전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기술의 정체는 단순히 불편함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질을 위협하는 문제로 자리 잡았다. 기계가 멈추자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했고, 자원은 점점 더 고갈되었다. 도시는 분열되었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던 사람들은 이제 생존을 걱정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혼란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더 이상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었다. 경찰과 소방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고, 정부는 통제력을 잃었다. 시민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시위와 폭동이 잇따랐고, 도시는 점점 더 무질서한 상태로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거리는 위험한 장소가 되었고, 밤이 되면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도시 전체를 뒤덮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시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갔다. 이제는 법과 질서가 아닌 힘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도시 곳곳에는 무장한 집단들이 자리 잡았다. 이들은 남은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고, 약한 자들을 착취했다. 한때 번영했던 도시의 중심부는 이제 폐허가 되었고, 그곳에서는 매일같이 생존을 위한 전투가 벌어졌다. 

몇몇 사람들은 도시 외곽이나 숲 속에 숨어들었다. 그들은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자급자족하려 했지만, 자연에서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린 현대인들에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정수 시스템 역시 전력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깨끗한 물을 구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강이나 호수에서 물을 길어오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그 물은 오염되어 있었다. 질병이 퍼지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이 병에 걸리기 시작했다. 

세계는 점차 혼돈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의존해왔던 기술이 더 이상 그들에게 해결책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멈춰있을 뿐이었다. 

 

#7.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 

이나영은 텅 비어버린 도시 중심가의 한 거리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한때 인류를 풍요롭게 만들었던 기술의 잔재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고장 난 로봇들, 녹슨 자율주행차들, 그리고 작동하지 않는 스마트 기기들... 이 모든 것들은 이제 쓸모없는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었다. 과거에는 혁신의 상징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인류의 몰락을 상징하는 유물로 남았다. 

그녀는 과거를 떠올렸다. 한때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믿었다 — 무한한 정보와 연결성, 그리고 끝없는 가능성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한때 사랑했던 도시,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빛나던 이곳은 이제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전문성과 지식이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허탈감을 느꼈고,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기술이 멈춘 이유에 대해 많은 이론이 제기되었다. 일부 과학자들은 우리가 이미 기술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달성했다고 주장했다. "더 이상 발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은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데, 이제 그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또 다른 일부는 이 현상을 자연적인 기술의 한계라고 주장했지만, 다른 이들은 인류의 지나친 욕망에 대한 자연의 반격이라 믿었다. 그러나 정작 아무도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이나영은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질문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정말 이대로 모든 발전을 다 이룬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차원의 혁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8.

그런 와중에 이나영은 그녀만의 실험을 계속했다. 기술의 본질을 다시 파악하기 위해 매일같이 코드를 분석하고, 데이터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녀 역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연구소에서 홀로 실험을 마친 후 도시의 빌딩 옥상에 올라갔다. 그녀의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도시의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 아래에서 기술의 진보는 이미 멈춰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그녀는 중얼거렸다. 

인간이 기술에 의존해왔던 그 모든 것이 갑자기 무용지물이 된 세상. 이나영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기술이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편리함의 상실을 넘어, 인류의 미래를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스마트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기술 정체가 시작된 후로 그 동안 아무런 작동도 하지 않던 스마트폰이었다. 놀라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자 화면에는 단 한 줄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 진보가 멈춘 것은 인간 자신이다. ]

 

이나영은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그 문장을 읽었다.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것이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은 결국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말이었다. 동시에 이 혼란은 인간이 진보함으로써 해결이 가능하다는 뜻과도 같았다. 그녀는 그동안 기술의 진보를 해결해야만 이 혼란이 해결되리라 믿어왔다. 하지만, 발신인이 불분명한 이 메시지는 그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지나치게 기술에 의존한 게 문제였을지도 몰라.” 

이나영은 부족해진 전력 공급을 대신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작은 촛불을 키며 말했다.

그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꼭 원인을 파헤쳐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현재 직면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앞만 보기로 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만을.

이나영은 남아있는 제조업체들부터 일으켜 세우기로 결심했다. 기술의 발전이 아닌 스스로의 발전을 꾀하는 자세,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다 함께 진보해나가려는 태도를 기르기로 한 것이다. 

아직 피해를 직격탄으로 받지 않은 소도시들을 찾아가 쓰러져가기 일보 직전인 기업 관계자들을 만났다. 제조업에서는 매년 새로운 모델을 출시하면서 소비자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해왔지만, 이제는 그런 전략이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에게 기존 제품을 최대한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내구성을 강화하고, 수리 서비스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 후 기계나 전자기기를 고치는 수리 업종이 점차 활기를 띠었고, 사람들이 직접 만나서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늘어났다. 특히 IT 전문가들은 새로운 기술 개발 대신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역할로 전환되었다. 

또한, 사람들의 기대치도 변했다. 더 이상 새로운 기술을 기다리지 않게 되면서 소비자들은 점점 현재에 만족하게 되었다. 새로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사는 대신, 기존의 제품을 최대한 오래 사용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고장 난 제품을 수리하는 서비스업이 다시 활기를 띠었고, ‘오래 쓰는 것’이 미덕으로 자리 잡으며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것이 사회적 가치로 인정받았다. 

그러자 도시의 혼란은 점차 정돈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기술 없이도 살아가는 방법을 서서히 배워갔고, 일상생활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여전히 기술의 진보는 멈춘 채로.

 

#9.

그녀의 노력이 인정이라도 받듯 기업 주변은 점차 사람들이 모여들며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기 시작했고, 시간이 가면서 기술의 멈춤에 적응하려는 자발적인 시도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첫 번째로 부상한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움직임이었다. 더 이상 도심지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진 많은 사람들이 농촌으로 이주해 자급자족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들은 기술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자연과 함께하는 삶에서 의미를 찾았다.

이러한 움직임은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으며, 젊은 세대는 더 이상 최신 기술에 집착하지 않고 아날로그적인 경험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거나 직접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활동들이 다시 인기를 끌었고,'디지털 디톡스'에서 나아가 디지털을 아예 없애자는 의미의 ‘디지털 리무브’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졌다.

자율주행차가 멈춘 도로는 다시 사람이 운전하는 자동차로 채워졌고, 스마트폰을 대체할 수 있는 아날로그 기기들이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또 다른 변화는 예술과 철학에서 나타났다. 기술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인간 본연의 창조성과 사고력에 집중하게 되었다. 예술가들은 더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철학자들은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기술적 진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 믿었지만, 이제는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가 중요한 주제로 떠올랐다.

교육 시스템 역시 변화했다. 과거에는 학생들이 최신 기술을 배우는 데 집중했지만 이제는 실용적인 지식과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이 강조되었다. 특히 예술과 인문학 분야가 다시 주목받았으며, 직업적으로도 창작 활동이나 인간 중심의 서비스 업종이 각광받았다.

그리고 기술 발전의 정체는 국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신기술 개발이 멈추면서 오히려 환경 문제 해결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다. 기술적 해결책 대신 사람들이 직접 생활 방식을 바꾸면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이 강화되었다.

세상은 그렇게 정체된 채로도 흘러갔다 —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 그리고 그 속에서 인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아갔다. 

 

#10.

기술이 멈춘 세상에서 인류는 새로운 방향을 찾아 나갔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적응하는 존재였고, 기술 없이도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은 아니었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냈다. 

도시는 이제 더 이상 거대한 기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유기체처럼 서로 연결된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고 있었다 — 바로 협력하고 창조하는 능력 말이다. 

더 이상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이 아닌,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불편함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에게 더 가까워진 것이었다. 과거에는 모든 것을 온라인에서 해결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직접 만나서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에 이웃 간의 관계가 다시 중요해졌고, 지역 사회에서 서로 돕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기술적 진보가 멈췄다고 해서 인류의 진보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류는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재정립할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그날 밤 옥상에서 본 메시지를 되새기던 이나영은 새로운 결심을 했다. 기술의 본질을 다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기술이 멈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기술이 아닌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었다. 

이나영은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기술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와 욕망, 그리고 그들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함께 나아가는 것이었다. 

"우리가 기술을 발전시킨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기술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있었던 거야." 

이나영은 그제야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세상은 여전히 멈춰 있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진보의 가능성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였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을 때였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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