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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_2024/26호_어른

26호_핫한 어른이 되고 싶어 / 연푸른

by 밍기적_ 2025. 1. 2.

영화 위키드를 봤다. 너무나 다른 두 주인공 엘파바(신시아 에리보)와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가 진정한 우정을 나누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서로 다른 선택을 하면서도 진심으로 상대의 행복을 빌어주는 이야기에서 씁쓸함과 감동을 동시에 느꼈다. 서사도 서사지만, 화려한 세트장에서 펼쳐지는 잘 짜여진 춤과 노래의 장관이 정말 매력적인 영화였다.

하지만 내 마음에 가장 깊은 울림을 줬던 건, 영화 그 자체보다는 이 영화를 대하는 제작진과 출연진의 태도였다. 위키드와 관련된 어떤 인터뷰 영상을 보든, 나는 어쩐지 조금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게 된다. 인터뷰를 하고 있는 감독, 출연진, 스태프... 그들 모두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위키드에 ‘진심’이다. 다들 여기에 살짝 돌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많은 인터뷰와 비하인드 중에서도 가장 화제가 됐던 장면은 단연 두 주연 배우의 캐스팅 장면이다. 유니버설 픽쳐스에서 공개한 위키드의 비하인드 영상 속에는 글린다 역의 아리아나 그란데와 엘바파 역의 신시아 에리보가 캐스팅을 확정받은 순간의 모습이 담겨있다. ‘당신이 우리들의 글린다/엘파바가 되어줬으면 한다’는 감독의 말을 듣자마자 두 배우는 눈물을 흘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특히 아리아나 그란데의 영상이 기억에 남는다. 고맙다고, 글린다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자신이 글린다를 잘 돌보겠다고 말하며 울먹이는 모습에 나까지 마음이 울렁였다. 오랫동안 꿈꾸던 것을 마침내 얻어낸 사람의 눈물은 이렇게나 힘이 세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아리아나가 글린다 역을 맡았다는 사실은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겐 그 사실이 별로 이상하거나 놀랍지 않았다. 당시엔 위키드의 오디션이 얼마나 거대한 규모로 치뤄졌는지 모르는 상태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아리아나니까. 아리아나는.. ‘아리아나 그란데’니까! 더 설명이 필요한가? 아리아나는 이미 그런 거대한 영화에 주연으로 캐스팅될 만한 대스타고, 나는 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 여겼다. 이게 아리아나에게 그렇게 큰 일일까? 더 이상 이룰 게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다 이룬 사람인데? 그녀 정도라면 자신이 그 자리를 얻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마음 한 구석에 권태나 피로함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이미 이뤄온 것들이 많으니 혹여 오디션에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각했다. 그 영상 속 눈물을 보기 전까지는.

그래서 그 장면은 솔직히 의외였다. 아리아나에게도 글린다 역을 맡는 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미 성공한 가수이자 배우이지만, 그런 아리아나에게도 여전히 이루고 싶은 꿈들이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 꿈을 위해 절박하게 노력하고 미친듯이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으며, 그 결과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리아나는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었다.


사실, 나는 늘 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떤 일에도 쉽게 동요하거나 속상해 하지 않는 사람. 기쁜 일에도 들뜨지도 않을 수 있고, 무언가를 꿈꾸는 데에 있어서도 절박하지 않은, 그래서 지저분해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과한 열정은 질척거리고 가끔은 구질구질하다. 슬픈 일은 물론 기쁜 일을 겪었을 때도 ‘흥, 별거 아니지 뭐’하고 쿨하게 받아치는 사람이 깔끔해 보였다. 드라마 속,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하며 상대를 붙잡는 사람들은 찌질했고, 안되는 일을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은 안타까웠다. 어떤 성취에 기뻐하는 사람을 보면 분명 감동을 느끼곤 했지만, 그것이 멋져보이지는 않았다.

그 때 나는 끝까지 ‘깔끔하고 정제된 모습’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단단하고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모두가 조금씩은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슬픈 영화를 보다 눈물이 날 것 같을 때,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여 본 경험. 눈물이 어서 마를 수 있도록, 그래서 내 슬픔이 티나지 않을 수 있도록. 나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슬픈 일에 대해서는 당연하고, 심지어는 기쁜 일이 있을 때조차 내가 기뻐하고 있음을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게 쿨해보이니까.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당시 나의 추구미는 ‘쿨녀’였던 것이다. 그래서 노력 끝에 쿨녀가 되었으냐고 묻는다면, 글쎄. 사실 난 내가 반틈의 성공 정도는 거뒀다 생각한다. 진심으로 쿨한 사람이 되진 못했을지언정 그런 척까지는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근데 그 무렵부터는 조금씩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쿨함이 냉소로, 침착함이 무관심으로, 담담함이 방어적임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느꼈을 무렵이었다. 절박해본 경험의 부재가 나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다는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식어가고 있었다! 열정적인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뜨거울 수 있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자기 감정에 충실할 수 있는 사람, 내가 어떤 마음인지, 무엇을 바라는지를 알고 있고 그걸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 이러다가 쪽팔리거나 상처받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부딪혀 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다. 속상함, 기쁨, 슬픔 그리고 간절함을 거부하거나 모르는 척 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느끼고 소화하며 온전하게 통과해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이.


그리고 그런 마음은 책임감이 된다. 다시 위키드로 돌아가보자. 아리아나와 신시아는 이미 실력을 인정받은 아티스트들이지만, 그럼에도 영화 속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고강도의 트레이닝을 받았다. 와이어에 매달려 말그대로 ‘날아다니면서’ 노래를 불러야했던 신시아는 새벽 두 시에 일어나 러닝머신을 타면서 노래 연습을 하고, 네 시에 촬영을 가는 스케줄을 소화했다. 당시 세 개의 작품에 동시에 참여하고 있던 피예로 역의 조나단 베일리는 대역이나 스턴트 없이 직접 고난이도의 안무를 소화하기 위해 다른 촬영장에서도 짬이 날 때마다 끝없이 춤을 연습했다고 한다.

또 대부분의 뮤지컬 영화가 미리 음원을 녹음을 한 후, 현장에선 배우들이 립싱크를 하는 방식으로 촬영되는 것과 달리, 신시아와 아리아나는 촬영장에서 정말 라이브를 하며 연기를 했다는 사실 역시 화제가 되었다. 이에 대한 인터뷰에서 둘은 ‘브로드웨이에서 일주일에 여덟번씩 공연을 올리는 동료 배우 및 관객에 대한 연대와 존경의 의미’에서 라이브로 촬영을 했다고 밝혔다.

신시아와 아리아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 역할을 절박하게 바라왔던 만큼, 이 역할을 바라온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자신들이 그러했듯 위키드라는 작품을 사랑하는 수많은 관객들이 있다는 걸. 그러니 이 영화의 한 부분을 맡게 된 건 아주 크고 무거운 일이라는 걸. 

출연진 뿐만이 아니다. 존 추 감독은 관객들에게 오즈월드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거대한 세트장을 제작하기로 결정한다. 튤립 900만개를 재배하고, 거대한 물탱크를 만들어 배를 띄우고, 기차역과 기차를 실제로 만들어 작동시키고, 10만개의 유리조각을 붙여 에메랄드 시티를 만들었다. 그래서 촬영장 비하인드 영상을 보면 정말 그 오즈월드가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위키드가 어떤 내용인지도 몰랐다. 위키드가 오즈의 마법사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뮤지컬이라는 것도 몰랐고, 그러니 당연히 위키드의 영화화에 그다지 큰 기대를 품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영화 제작진들의 뜨거운 마음이 나한테까지 닿았다. 이미 위키드를 사랑해온 사람들에겐 이 영화와 영화 제작에 관한 모든 과정이 얼마나 감동적으로 다가올까?


지금, 쿨함은 어떤 사회적 위상을 가지는가. 어떤 사안에 대해 뜨겁게 마음을 토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누군가는 오글거린다거나, ‘긁’혔느냐 혹은 ‘버튼이 눌렸’냐, 왜 이렇게 쿨하지 못하냐 같은 반응을 보이며 뜨겁지 않기를 요구한다. 동시에 속마음은 쿨하지 못한데 쿨한 척 ‘정신승리’하는 사람은 ‘쿨찐’이라 불리며 조롱받는다.

이것만 보면 쿨함에 대한 양가적인 시선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 두 반응은 같은 맥락에 있다. 무언가가 너무 소중해서 도무지 쿨할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그 마음 속 뜨거움을 ‘쿨’하게 포장하지 못하고 티 내버린 사람들은 모두 비아냥을 받는다. 쿨함은 시대정신이다.

쿨한 것은 간편하고, 깔끔하고, 에너지가 덜 든다. 우리가 생각하는 ‘어른’스러운 모습은, 쿨한 모습에 가까운 듯 하다. 하지만 쿨한 건 효율적이기는 쉬워도 감동적이기는 어렵다. 그래서 난 핫한 어른이 되고 싶다.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기에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어른. 그게 더 멋진 어른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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