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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_2024/26호_어른

26호_길을 잃은 어른 / 또바기

by 밍기적_ 2025. 1. 3.

길을 잃은 어른

: 어른의 무게가 버거운 당신에게

 

“얼른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어!”

 

어린 아이들에게서 한 번씩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어른, 즉 성인의 법적인 기준인 만 19세가 되고자 하는 미성년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아마도 ‘자유’일 것이다. 그런데 어른의 자유는 좋기만 할까?

이에 대해 누군가는 바로 대답할지도 모른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라고 말이다. 그러니 자유가 반드시 좋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예를 들면 대학 입학 후, 그 누구도 나의 지각이나 결석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출결이 성적과 학점에 미치는 영향은 오롯이 본인이 감당해야 할 결과인 것이다.

나는 어른이 되기 싫었던 아이였다. 정확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바로는, 어른이 되었을 때 감당해야 할 책임감의 무게가 너무 무거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기를 강력히 거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무게를 어림짐작하며 십의 자리가 1인 나이 때를 있는 힘껏 즐기고자 했다. 그래서 많은 친구들이 간절히 바라 마지않는, 몇몇은 술집 앞에서 주민등록증을 들고 기다리기도 하는 12월 31일의 마지막 밤에는 혼자 깊이 가라앉기도 했었다. 앞으로 내가 직접 책임져 나가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하며.

사전에 해둔 마음의 준비 덕이었을까, 대학 입학 후에는 오히려 주어진 자유 내에서 모든 것을 직접 선택해나가고 응당 책임을 지길 반복하는 일들이 퍽 마음에 들었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유영하듯 캠퍼스를 헤치고 다니며, 하고 싶은 것들을 허락된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이 하려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언뜻 불안정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방향을 잡고 쉼 없이 전진해나갔다. 정말 말 그대로 쉼 없이 말이다. 자잘한 생계형 아르바이트까지 포함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공백기가 최대 1개월이었으니까. 그 공백기마저도 먹고, 자고, 놀기만 한 게 아니라 다음 할 일을 찾아 입사 지원이라던가 공부를 하던 때였다.

그렇게 졸업은 어느덧 4년 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 속으로 멀어진 추모식이 되었다. 여전히 나는 취업이든, 대학원 진학이 되었든, 어떤 길로도 안정적인 소속을 찾지 못했다. 불확실한 미래 속에 놓인 끝없이 광활한 자유는 해방감이 아니라 족쇄다. ‘어른’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인 아틀라스가 벌로 천구를 떠받치고 있는 것에 비견될 정도이다.

여기까지 얘기를 한 이유는, 단순히 ‘나 힘들어요’ 하고 하소연하기 위함이 아니다. 애초에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건 내가 방향 설정과 선택을 잘못했던 것일 수도 있고, 목표를 이루려는 과정에서 노력이나 전략, 심지어는 운이 조금 부족했던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펙을 제외하고서라도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나태하게만 살지는 않았음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음을 말하고 싶었고, 그 과정에서 갈수록 좌절감과 절망감을 느끼고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청년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취업시장에서는 ‘중고신입’을 선호한다는 것을 취업 준비생들이라면 잘 알 것이다. 그래서 다들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을 하고 나서도 인턴이나 계약직 등을 전전하며 취업시장의 문을 계속해서 두드린다. 자유와 책임. 우리 사회는 지금 청년들에게 자유에 상응하는 적당한 책임만을 부여하고 있는 걸까? 어른이라는 이름의 무게 아래 부단히 스펙을 쌓고, 경험을 만드는 청년들에게, 은근히 책임만이 과하게 부여되어 있지는 않은지 심히 의심스럽다.

[ 그래프 1 ]

- 출처: 한국경제인협회, "2024년 상반기 대기업 채용동향‧인식 조사," 한경협 보도자료, 2024.

 

자유로 포장된 선물을 열어 보니 자유라고 할 만한 것은 손톱만큼 밖에 없고, 그보다 100배쯤은 큰 책임이라는 녀석이 어느새 내게 들러붙어버린다. 자유는 사라지고 책임만 남는 상태. 사회는 우리에게 “자유를 줄게, 마음껏 하고 싶은 일을 해 봐” 하면서도, “그런데 그 중에서도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일만 하는 게 어때” 하고, 사실상 길을 좁히고 마는 것이다.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면서도 기업에서 원하는 인재는 ‘주도성’과 ‘창의성’을 갖춘 인재이니, 아이러니하다.

‘고립·은둔 청년’이라는 말은 이제 뉴스에서 종종 들려오는 어색하지 않은 말이 되었다. 정부가 고립·은둔 청년 문제의 심각성을 본격적으로 인지하고 대응하기 시작한 시점은 2023년 5월이다. 국무조정실에서 ‘청년의 삶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고립·은둔을 생각하는 위기 청년 규모가 최대 약 54만 명에 달할 수도 있다는 추정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후 보건복지부의 주관으로 7~8월 두 달간 전국 청년(19~39세)을 대상으로 온라인 심층 실태조사를 실시하였고, 12월에는 「고립·은둔 청년 지원방안」을 발표하였다.[각주:1]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3년 시행한 온라인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34세 청년들이 고립과 은둔을 하게 된 주된 이유는 취업 실패(24.1%)대인 관계(23.5%)인 것으로 드러났다. [각주:2] 취업 실패는 단순히 그 자체로만 끝나지 않는다. 자존감 하락과 더불어 주변 사람들과 스스로를 비교해봤을 때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기조차 꺼려지게 된다. 취업을 한 친구와, 취업을 하지 못한 나. 주변 친구들을 볼 자신이 없을뿐더러, 어차피 만나서 놀 돈도 부족하고, 취업 준비를 하느라 시간도 부족하다. 그렇게 친구들의 연락을 피하게 된다. 따라서 대인 관계 문제 역시 사실상 취업 실패로 인해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취업 실패’가 청년들의 고립과 은둔의 가장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는데, 이걸 개인의 나약함으로만 봐야 할 문제인 걸까? 개인의 문제도 있을 수는 있지만, 나는 이 현상이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분명히 결부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사회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뒷받침하고자 지금부터 관련 통계자료들을 살펴볼 것이다. 숫자만 보면 멀미가 난다, 하는 사람들은 결론만 봐도 무방하다. 그럼 먼저 거시경제 지표를 보자. 실업률은 2014년부터 점차 증가해 오다가, 코로나가 발병한 2020년에 최대 수치를 찍고는 매년 감소해 왔다. 그것도 2022년에 ‘급감’해서 2023년에는 지난 10년 중 역대 최저 수치를 기록했다. 이는 2030의 실업률 경향과도 비슷하다.

 

[ 그래프 2 ]

- 출처: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실업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적어졌다고 볼 수 있으니, 청년들의 사회적인 문제는 없다고 봐야 할까? 그렇다고 곧바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실업률은 ‘능동적으로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취업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비율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그래서 취업을 하고는 싶어도 반복된 구직 실패로 체념과 무기력에 빠진 이들은 지표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맹점이 있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나온 지표가 ‘고용률’이다. 고용률은 ‘취업 준비를 적극적으로 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모두 포함하여, 취업 상태에 있는 사람의 비율을 산정한다.

 

[ 그래프 3 ]

그림으로 나타내자면 다음과 같다. 능동적으로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이 경제활동 인구에 포함되며, 고립·은둔 청년들처럼 구직을 포기한 이들은 비경제활동 인구에 들어간다. 다시 말해, 실업률은 구직단념자들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은 채 계산을 하는 반면, 고용률은 이들을 포함한 전체 생산가능 인구를 대상으로 계산을 한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처럼 구직을 포기한 이들이 많다고 판단될수록 실업률보다는 고용률 지표를 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이제 고용률 지표를 보자. 청년들의 취업 실패에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에, 예상대로라면 고용률 지표는 좋지 않아야 한다.

 

[ 그래프 4 ]

- 출처: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그런데 그래프를 보면 고용률도 2020년도 이래로 꾸준히 증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20세~39세 사이의 연령별 통계도 전체 평균과 비슷한 추세를 보인다. 여기까지만 보면 청년들의 고단함은 사회적인 문제라기보다 개개인이 나약하거나 부족해서 느끼는 것일 뿐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취업률로 보자면, 고립·은둔 청년이 늘어났어도 분모의 수는 똑같으니 결국 절대적인 취업자의 수가 늘어난 것이다. '고립·은둔 청년'과 '취업한 청년'의 수가 모두 증가했다면, 사실상 지금의 '청년 생산가능인구'는 < 고립·은둔 청년 vs. 취업 청년 > 의 구도로 거의 양분화되어 있다는 얘기가 된다. ‘나 빼고는 다 취업했네’라는 생각에 청년들이 더욱 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숨어들기 쉬운 구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자료들까지 살펴봤음에도 불구하고, 놓친 것이 하나 더 있다. 취업한 이들이 증가한 이유가 비정규직 근로자까지 모두 통계에 포함된 것은 아닐지 살펴봐야 한다. 비정규직의 경우 고용불안과 근로조건에서의 차별을 겪기 때문에 통상 일자리의 질이 낮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정규직 근로자란 한시적근로자, 시간제근로자, 비전형근로자 등을 포함하는 근로자를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정규직에 비해 근로 시간이 1시간이라도 짧거나, 계약을 주기적으로 갱신해야 해서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불안에 떨어야 하는 이들을 말한다.

 

[ 그래프 5 ]

- 출처: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형태별 부가조사」 각 연도 8월

 

[ 그래프 6 ]

[단위: %]

  2018 2019 2020 2021 2022 2023 2024
전체 33.0 36.4 36.3 38.4 37.5 37.0 38.2
남성 26.3 29.4 29.4 31.0 30.6 29.8 30.4
여성 41.4 45.0 45.0 47.4 46.0 45.5 47.3
연령
집단
15-19세 74.0 77.8 84.1 85.1 86.4 89.0 89.9
20-29세 32.3 38.3 37.7 40.0 39.0 40.3 43.1
30-39세 21.0 23.7 22.8 23.0 21.9 21.6 22.7
40-49세 25.3 27.0 26.7 28.6 26.6 26.3 26.7
50-59세 34.0 35.5 34.3 35.9 35.3 33.2 33.7
60세 이상 67.9 71.6 71.0 73.7 71.3 68.7 69.7

- 출처: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형태별 부가조사」 각 연도 8월

[그래프 5]를 보면, 지난 10년간 비정규직 규모는 꾸준히 증가해 왔다. 파란색 막대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수’를 의미하고, 노란색 선은 임금근로자 중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율’을 의미한다. 절대적인 수치든, 상대적인 비율이든 모두 2024년에 최대를 기록했다. 24년 8월 조사 결과에 따르면, 비정규직 근로자는 전체 임금근로자 중 38%에 달한다. 10명 중 4명꼴은 비정규직 근로자라는 의미이다. 특히 [그래프 6] 연령별 세부 통계를 보면, 최근 3년간 청년 세대 ━ 특히 20대 에서 비정규직 증가 추이가 눈에 띄게 증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취업시장 앞에서 느끼는 벽이 얼마나 높을지 상상이 되는가? 어느 정도의 안정성이 보장된 정규직 취업에 성공하지 못하는 이상, 청년들은 반복적인 실패로 인해 지쳐 밖으로 나갈 힘조차 잃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사회 구조가 청년들이 고립과 은둔을 택하게 된 데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래에 가시적인 통계자료를 추가해 놓았다.

[ 그래프 7 ]

- 출처: 송혜미, “일하는 20대 43%는 비정규직… 정규직은 200만명 처음 밑돌아”, 동아일보, 2024.10.28,  https://www.donga.com/news/Economy/article/all/20241028/130304203/2

 

[ 그래프 8 ]

- 출처: 송혜미, “일하는 20대 43%는 비정규직… 정규직은 200만명 처음 밑돌아”, 동아일보, 2024.10.28,  https://www.donga.com/news/Economy/article/all/20241028/130304203/2

 

추가로, 통계청에서 발간한 ‘한국의 사회동향 2023’ 자료집에 따르면 2022년도에는 20대의 사망원인 중 자살이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50.6% [각주:3] 로 과반을 넘겼다. 20대에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사망하는 사람들보다도 극단적인 선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던 것이다. 젊은 나이에 치러지는 장례식 2곳 중 1곳은 고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와닿을까. 결국에는 단순히 고립과 은둔을 택하는 이들을 넘어, 극단적인 선택으로 나아가는 청년들도 많다는 의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저 사회를 탓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부족해서, 내가 못나서’라고 생각하게 되는 청년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당신은 충분히 노력했고 지금껏 잘해왔지만, 경제나 사회 상황이 좋지 않은 게 한몫했다고 말이다. 그게 좀 억울하게 느껴질 수는 있어도, 적어도 스스로를 너무 과하게 질책하지는 말라는 말이다. 결국엔 오롯이 견뎌내야 할 책임의 무게를 더 무겁게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 

자유라는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법적으로는 엄연한 어른인 청년들이 부디 깊고 어두운 바닷속으로 그저 가라앉아 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헤엄쳐 나가길 택할 테니 말이다.

 

by. 또바기

 


  1. 오은정, “고립·은둔 청년, 이제 국가가 돕겠습니다.”, 보건복지부 인구정책총괄과, 2023.12.13. https://www.mohw.go.kr/board.es?act=view&bid=0027&list_no=1479278&mid=a10503000000 [본문으로]
  2. 박세진·황수빈, “[우울한 청년들] ③ "방에서 안 나가요"…늘어나는 고립·은둔 청년”, 연합뉴스, 2024.6.16., https://www.yna.co.kr/view/AKR20240613141400053 [본문으로]
  3. 통계청 통계개발원, 『한국의 사회동향 2023』 (대전: 통계청, 202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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