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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_2024/26호_어른

26호_어른이 된 해리 포터 / 망

by 밍기적_ 2025. 1. 1.

어른이 된 해리 포터

그는 어떻게 어른이 되었을까?
바로, 실존주의를 통해!

 
🪐“너는 마법사란다, 해리.”

 조앤 K. 롤링 작가의 『해리 포터』시리즈(1997~2007)는 안 읽어본 사람은 있어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지. 시리즈의 처음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1997)』을 영화화한 크리스 콜럼버스는 어린이 가족 영화의 대가 답게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2001)’를 정석적인 크리스마스 가족 영화로 연출했기 때문에, 연말 시즌에 정주행하기에도 딱 걸맞아. 그러고보니 년도까지 언급해놓아 새삼 『해리 포터』 시리즈가 오래되었다는 게 눈에 들어오네. 책으로 출간된 기준으로 하면 벌써 만으로만 27살이야. 작중 주인공 해리 포터도 만 11세로 시리즈를 시작해서 어른이 되는 것으로 에필로그를 맞이하는데, 메타적으로 봐도 『해리 포터』 시리즈 작품 자체가 어른이라니. 20년 이상 사랑받으며 어린 시절에 처음 해리를 만나고 해리와 함께 성장한 어른들도 있을 거고, 시리즈 완결(2007년) 후 태어나 올해(2004)로 만 17세가 된 청소년도 있겠네. (이건 올해 이 글을 쓰기에 딱 좋은 징조야! 왜냐하면 시리즈 마지막에서 해리는 마법 세계의 성인 나이인 17세가 되며 겪는 여정으로 마무리하거든!)

 마침 연말이기도 하니 크리스마스 영화의 정석 해리 포터 영화 시리즈를 정주행하기도 걸맞다 했는데, 연말을 맞이한 지금 순간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는 것에 대해, 즉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우리네 인생을, 『해리 포터』 시리즈 속 해리의 성장과 함께 되돌아 보자. 지금부터는 『해리 포터』 시리즈를 한 편 한 편 언급하며, 시리즈가 거듭됨에 따라 한 살씩 나이를 먹어가는 해리가 어떻게 어른이 되어갔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고자 해. 하지만 그냥 살펴보는 게 아니라, 실존주의와 함께 알아볼거야! 그런데, 실존주의가 뭐냐고?


 
🪐실존주의란?

 실존주의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유럽에서의 급격한 사회적 변화와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 등장한 철학적 사조야. 이 시기는 인간의 전통적 가치관이 흔들리고,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개인의 존재가 소외되는 경험이 빈번했던 시기였어.

 구체적으로, 산업화와 도시화는 전통적인 공동체 기반의 삶을 해체시키고, 개인을 거대한 기계적 구조의 일부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던 시기지. 예를 들어, 산업 혁명 이후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의 공장에서 노동자가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노동은 더 이상 자아실현의 수단이 아니라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반복적인 행위로 전락했어. 이러한 변화는 인간 소외alienation의 경험을 심화시켰고.

 또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했어. 예를 들어,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이 신성한 창조물이 아니라 자연적 과정의 산물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며, 전통적인 신학적 세계관을 뒤흔들었어. 이와 동시에, 프리드리히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신 중심의 세계관이 무너지고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을 대변했어.

 마지막으로, 세계대전의 참혹함은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과 진보에 대한 낙관을 심각하게 손상시켰어... 특히, 제1차 세계대전에서 수백만 명이 희생된 끔찍한 참상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취약하며 무의미할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주었지. 이러한 혼란과 불확실성은 개인들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실존적 질문을 던지게 했어.

 이처럼 실존주의는 인간이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자기 존재를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한 철학적 흐름으로 탄생한 거야. 실존주의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개인의 ‘실존existence’에 대한 물음을 중심으로 발전했어. 실존주의의 핵심은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어. 이 말은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본질이나 목적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간다는 뜻이야.

 실존주의를 주장한 사상가들의 공통점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다는 거야.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자유로우며, 이로 인해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야.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동시에 선택에 따른 책임을 수반하기에, 인간은 종종 불안과 두려움에 직면할 거야. 실존주의는 이러한 불안 속에서도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해.



🪐실존주의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

 실존주의는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었고, 그들 각각이 독특한 관점을 제시했어. 주요 사상가로는 프리드리히 니체, 쇠렌 키르케고르, 장 폴 사르트르, 마르틴 하이데거 등이 있는데 먼저, 첫 꼭지에서도 언급되었던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는 저서로 유명한 사람이지. 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와도 연관성이 있어서 언급할까 하는데, … 요즘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 가면 한강 작가의 저서가 베스트셀러 자리를 독점하기 전에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 매대에 꼭 한 권씩 올려져 있는 걸 본 적 있어? 그래서 요즘따라 더 친숙한 철학자일 거야.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는 저서로 표현했는데, 그는 인간 존재와 세계의 본질을 맹목적인 의지will로 보았어. 쇼펜하우어는 물질적 세계와 모든 생명체의 행동이 맹목적이고 충동적인 생존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았어. 이 의지는 이성과 무관하게 인간을 끊임없는 갈망과 고통으로 몰아넣지. 그래서 쇼펜하우어가 말하길, “삶은 끊임없는 결핍과 갈망의 연속이며, 이는 고통을 동반한다”고 주장했어. 인간은 욕망을 충족시키더라도 금세 새로운 갈망이 생겨나며, 궁극적으로 만족에 도달할 수 없잖아. 개체로서의 인간은 자기보존을 위해 타인의 살려는 의지를 부정하게 되고 결국은 타인을 해치는 부당한 행동을 하기도 하지.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예술, 철학적 명상, 금욕적인 삶 등을 제시했어. 특히, 의지will를 부정함으로써 삶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했지.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깊이 연구하며 초기 철학에 영향을 받았어. 특히, 쇼펜하우어의 “삶은 고통”이라는 관점은 니체의 초기 사상에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어. 니체는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삶의 고통과 비극을 예술과 철학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고. 또한, 쇼펜하우어는 예술을 삶의 고통을 완화하는 도구로 보았고, 이는 니체의 초기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중심 주제로 다뤄져.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에너지와 예술이 삶의 고통을 극복하는 힘이라고 보았어. 하지만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를 넘어서 삶을 긍정하는 철학으로 발전했어. 쇼펜하우어가 삶의 고통을 부정하고 의지를 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춘 반면, 니체는 “삶의 고통과 비극을 포함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해. 특히 니체는 의지를 부정하기보다는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자신의 삶과 가치를 창조하는 초인Übermensch의 개념을 제시하지. 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부정 철학과는 대조적이야.

 니체가 만든 개념인 초인은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해. 이 책은 니체의 유명한 어구인 “신은 죽었다”는 문장이 나오는 책이기도 해.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 신의 사망을 의미하지 않아. 대신, 서구 문명이 의지했던 전통적인 종교적 세계관과 도덕적 가치 체계가 무너졌다는 철학적 선언이야. 니체는 기독교적 가치관이 근대의 과학, 합리주의,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더 이상 인간의 삶을 지도하는 권위를 갖지 못한다고 보았어. 특히, 전통적 종교가 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중심 역할을 상실했으며, 이는 정신적 공허와 가치의 해체를 초래했다고 주장하지. 니체는 이러한 진공 상태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필요성을 촉구하고,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해야 하며 이를 통해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

 참고로, 니체의 저서명에 나오는 ‘차라투스트라’는 책의 주인공으로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적 인물인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에서 따온 거야. 그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로, 역사적으로 선과 악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제시한 인물로, 도덕적 가치 체계를 형성한 상징적 존재야. 니체는 그가 제시한 선과 악의 도덕 체계가 서구 기독교 윤리의 토대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어. 니체는 책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을 차라투스트라의 이름을 빌려 표현하면서, 전통적 도덕을 뒤엎고 새로운 가치를 제안하는 역할을 부여한 거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기존의 선악 이분법을 비판하며,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인물로 등장하고 초인, 영원 회귀eternal recurrence, 운명 사랑amor fati과 같은 자신의 철학적 아이디어를 서사적으로, 그리고 은유적으로 전달했어.

 다시 실존주의자들의 이야기로 넘어와, 다음 철학자인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죽음에 이르는 병(1849)』이라는 저서를 통해 제목에 있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단순히 생물학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의하지 않아. 오히려 이 책은 인간의 절망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고, 이 절망은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지 못하거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단절을 경험할 때 발생한다고 보지.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죽음 포함)과 무한성(영혼, 영원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설명해. 이 과정에서 스스로의 실존적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회피하면, 절망이라는 상태에 빠진다고 주장했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제목은 이 절망이 영적인 문제이며, 육체의 죽음과는 달리 영혼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거야. 키르케고르는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죽음을 두려워하며 허비한다기보다는, 인간이 자신의 실존적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진정한 신앙에 이르지 못할 때 절망에 빠진다고 보았어. 그래서 실존주의자 중 몇 안되는, 신적인 존재를 믿는 실존주의자이기도 해. 따라서 이 절망은 단순한 죽음의 두려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상태에서 비롯된 거야.

 다음으로,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존재와 무(1943)』라는 책을 써,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로 유명해. 이 말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고정된 본질이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형성해나가는 존재라는 의미야. 사르트르는 인간이 어떤 정해진 틀에 의해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선택으로 존재의 의미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철저히 자유로운 존재로 바라봤어.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단순히 긍정적인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야. 인간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완전한 책임을 져야 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불안과 고통을 동반한다고 주장했지. 사르트르는 이를 “실존적 불안”으로 표현하며, 자유롭다는 것은 곧 삶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종종 이 책임감 앞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고 보았어.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 떠오르는 대목이야. 이러한 점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이 실존의 순간순간마다 선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며, 이 과정이 곧 실존의 본질임을 강조해.

 둘 다 실존주의자라는 점에서 사르트르와 키에르케고르는 유사한 면이 있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어. 키르케고르가 인간의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신앙의 힘에 의존한 반면, 사르트르는 인간 자신에게만 의지했다는 점이야.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이 자신의 삶과 실존적 고뇌를 오직 자신의 선택과 행동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어. 신이 없는 세계에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실존적 자유의 본질이야. 그래서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종교적 맥락에서 분리하고,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사상으로 정립한 인물로 평가받고, 실존주의를 인간 중심의 철학으로 자리 잡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어.

 마지막으로,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그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1927)』을 통해 철학의 근본 질문인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해. 하이데거는 전통 철학이 “존재”의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고 보고, 이를 재조명하기 위해 독창적인 철학적 방법론을 제시했어. 그는 인간을 단순히 사고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존재로 보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인간을 현존재Dasein로 정의해. Dasein은 문자 그대로 “거기-존재”를 뜻하며, 하이데거는 이를 인간이 자기 존재를 자각하고,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물을 수 있는 존재로 이해했어.

 하이데거 철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야.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죽음을 자각할 때 비로소 진정한 실존에 도달할 수 있어.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궁극적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고, 인간은 죽음을 직면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깨달을 수 있어. 하이데거는 죽음의 자각을 바탕으로 인간이 비본래적 존재inauthentic existence와 본래적 존재authentic existence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어. 비본래적 존재란, 인간이 타인과 사회의 기대에 따라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상태야. 반면, 본래적 존재란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의식하며 자신의 삶에 주체적으로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상태지. 그는 인간이 매 순간 자신의 선택을 통해 본래적 존재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어. 결국,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적 물음이 단순히 추상적인 철학적 논의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한다고 보고 이에 대한 성찰을 귀중하게 여겨.

 이처럼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각기 다른 시각에서 인간 실존의 문제를 탐구했으며, 이들의 사상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지침을 제공하지. 지금부터는 『해리 포터』에 담겨 있는 실존주의 사상을 살펴볼거야. 그리고 주인공 해리 포터가 11살의 해리에서 성인 해리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른이 되는 조건으로서의 관문, 실존성을 어떻게 자각하는지 알아보자고!


 
🪐“그 돌은 사용하지는 않을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거란다.”

 『해리 포터』의 주인공 해리는 평범한 비마법사 가족인 더즐리 가에서 학대받으며 자라던 소년으로, 11살 생일에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과 부모가 볼드모트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비밀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돼. 그 볼드모트는 해리를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자신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해리는 마법 세계의 구국 영웅으로 알려져 있지. 볼드모트는 아주 무시무시한 어둠의 마법사였고, 비마법사를 차별하고 그들을 자신들 아래에 두자는 사상에 반대하는 마법사들을 공격하고 다녔거든. 해리는 마법세계에 진입하며 이 모든 걸 알게 되고 호그와트라는 마법학교에 입학하며 그곳에서 론 위즐리와 헤르미온느 그레인저라는 친구들과 함께 성장하지.

 그러나 입학 첫 해에 해리는 부모를 죽이고 자신의 생명도 빼앗으려 했던 어둠의 마법사 볼드모트가 사실 살아 있었다는 걸 알게 돼. 그러나 볼드모트는 죽었다고 알려질만큼 힘이 아주 약해지고 혼자서는 자립할 수도 없어서, 마법사의 돌이라는 불로장생 약을 구하려고 자신의 수하를 이용해 호그와트에 잠입해 있었어. 그리고 ‘소원의 거울’ 앞에서 해리와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지. 이 거울은 바라보는 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비춰주는 신묘한 힘을 갖고 있어. 볼드모트는 마법사의 돌을 통해 영생을 얻으려 했기에, 거울 앞에 섰을 때 돌 자체는 보이지 않고 오직 ‘영생’이라는 목적만 비쳤을 거야. 뭐, 건강한 자신의 모습이라든가? 자립한 자신의 모습 같은 게 보였겠지? 그러나 해리는 마법사의 돌을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어. 마법사의 돌을 볼드모트와 같이 이 돌을 악용하려는 사람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목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거울 입장에서는 해리가 바라는 건 영생도 다른 무엇도 아닌 ‘돌 자체’라는 걸 알고서 마법의 돌 자체를 소유한 해리의 모습을 보여주지.

 이 현상에 대해 호그와트의 교장이자 해리의 멘토가 되는 덤블도어 교수도 다음과 같이 말해. “그 돌은 찾고 싶어 했던 사람만이, 찾기만 할 뿐 사용하지 않을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거란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단지 자신이 금을 만들고 있거나 불로장수 약을 마시는 모습만 보게 되겠지.” 실존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해리는 마법사의 돌을 그 자체로 대했지만, 볼드모트는 돌을 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했어. 본질과 수단을 구분하지 못한 볼드모트의 탐욕은 결국 마법사의 돌을 얻지 못하게 만든 반면, 해리의 순수한 마음은 돌을 손에 넣을 수 있게 한 거야. 우리도 우리를 바라볼 때 자기 자신을 어떤 목적을 위해 태어난 수단이 아니라, 스스로 삶의 목적을 설정하는 그 자체임을 자각해야 해. 해리는 11살의 나이에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깨달음이 자기 자신을 향했다기 보다 악을 저지하기 위해 무자각으로 현명한 행동을 한 것이라, 해리가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해. 어쨌든, 여기까지가 시리즈의 1권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1997)』의 내용이었어. 그 다음은 시리즈를 좀 건너 뛰어서 5권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2003)』으로 바로 넘어가 보자.


 
🪐“어느 쪽이든 반드시 다른 한쪽의 손에 죽어야 하리라…”

 4권에서 볼드모트는 완전한 부활에 성공해. 해리는 1권에서부터 볼드모트가 왜 자신을 죽이려고 했는지 궁금해했지. 덤블도어는 그때 대답을 피했어. 그리고 그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해리가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서, 해리가 예언 속 아이라는 현실의 더 큰 짐을 주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렇지만 5권의 끝에서 해리는 자신과 볼드모트를 엮는 예언의 내용을 알게 돼. 이 예언은 해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삶을 규정짓는 듯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

“어둠의 마왕을 물리칠 힘을 가진 자가 오리라… 그에게 세 번 저항한 이들의 자식으로 태어날 것이며, 일곱 번째 달이 기울 때 태어나리라… 어둠의 마왕은 그가 자신과 동등한 존재라는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둠의 마왕이 알지 못하는 능력을 가지리라… 그들은 다른 한쪽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어느 쪽도 온전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반드시 다른 한쪽의 손에 죽어야 하리라…”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2003)』 중

 예언 속에서 언급하는 ‘세 번 저항한 이들의 자식’이자 ‘일곱 번째 달이 기울 때 태어’난 조건에 부합하는 아이는 해리와 네빌이라는 또 다른 소년이었어. 선택지가 두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볼드모트는 해리를 선택해 예언이 실현될 수 없도록 갓난아기였던 그를 죽이려 했어. 그렇지만 해리의 부모는 해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이 희생이 예언에서 말하는, ‘어둠의 마왕(볼드모트)이 알지 못하는 능력’인 ‘사랑의 힘’을 남겼지. 이 능력 때문에 볼드모트는 한동안 해리를 만질 수도 없었어. 또한, 예언 속에서 말하는 ‘어둠의 마왕은 그가 자신과 동등한 존재라는 흔적을 남길 것이다’에서의 흔적은 살아남은 아이, 해리의 이마에 번개 모양의 흉터로 자리매김하며 그들의 운명을 엮었어.

 문제는 이 예언이 단순한 운명에 그치지 않고 해리에게 삶의 목적을 강제한다는 점이야. 지금까지 모든 게 예언에 딱딱 맞아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남은 예언에 따르면 해리는 볼드모트를 죽여야만 자신의 삶을 완성할 수 있지. 실존주의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자유와 책임인데, 해리는 예언 때문에 그 자유를 잃은 거지. 예언을 알기 전까지 해리는 나름대로의 이유로, 살아남기 위해서 볼드모트와 맞섰지만, 이제는 자신이 ‘예언 속 아이’라는 사실이 해리로 하여금 그에게 볼드모트에게 선택된 이후부터 강제로 주어진 삶의 목적에서 압박을 받아.



 
🪐“넌 네 길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거야…… 예언을 무시하고 돌아설 수도 있어!”

 그렇지만 다음 권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2005)』에서 해리는 그의 멘토 덤블도어 교수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눠.

 “하지만 해리, 그 예언이 의미가 있었던 것은 오직 볼드모트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걸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지난해 말에 너에게 말했었지. 볼드모트는 장차 자신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될 사람으로 너를 지목했어.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그자는 너를 그에게 가장 커다란 위협이 될 인물로 만들어 놓은 셈이란다!”

 “어쨌든 똑같은 이야기잖아요.”

 “아니, 그렇지 않아! 넌 그 예언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교수님께서는 그 예언이 의미하는 바가……”

 “만약 볼드모트가 그 예언을 듣지 못했다면, 과연 그 예언이 이루어졌을까? 그게 무슨 의미라도 있었을까? 물론 아니야! 너는 예언의 방에 있는 그 모든 예언들이 그대로 이루어졌을 거라고 생각하니?”

 “하지만… 작년에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 두 사람 중 하나가 상대를 죽여야 한다고…”

 “해리, 해리, 그것은 오직 볼드모트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고, 트릴로니 교수의 예언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야! 만약 볼드모트가 네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네 마음속에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는 강렬한 욕망을 심어 놓을 수 있었을 것 같으냐? 절대 그럴 리가 없지! 또한 그자가 네 어머니가 너를 위해 목숨을 내놓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지 않았더라면, 볼드모트조차 뚫을 수 없는 마법의 보호막이 너에게 생겨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물론 아니야, 해리! 그래도 모르겠니? (…) 그 예언을 듣게 되자, 얼른 행동에 착수한 거야. 그 결과 그는 자신을 끝장낼 수 있는 사람을 스스로 골라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손에 대단히 치명적이고 특별한 무기를 쥐여 준 꼴이 된 거야!”

 “하지만…”

 “네가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단다! (…) 널 죽이려고 함으로써, 볼드모트는 자기 손으로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특별한 사람을 뽑은 꼴이 된 거지. (…) 하지만 해리, 너는 볼드모트의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특별한 통찰력, 죽음을 먹는 자라면 누구든 그걸 위해 살인이라도 서슴지 않을 만한 놀라운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어둠의 마법에 흔들린 적이 없었어. 볼드모트의 추종자 중 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은 단 1초도 가져 본 적이 없었어!”

 “그거야 너무 당연하잖아요! 그자는 제 엄마와 아빠를 죽였다고요!”

 “한마디로 너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게다! (…) 볼드모트와 같은 엄청난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너를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보호막이란 말이야! 네가 겪었던 그 모든 유혹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너는 여전히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어. 네가 열한 살 때 가졌던 그 순수한 마음 그대로 말이야. 그때 너는 네 마음의 소망을 비추는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고, 거울은 너에게 영원한 생명이나 엄청난 재물이 아니라, 볼드모트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해리, 너는 네가 그 거울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그런 장면을 보는 마법사들이 얼마나 드문지 짐작이나 하니?”

 “하지만 교수님…… 그래도 결국 다 똑같은 거 아닌가요? 저는 그자를 죽이려고 노력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노력해야 한다고? (…) 물론 넌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그 예언 때문이 아니야! 단지 너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는 결코 편안히 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 우리 둘 다 그 사실을 알고 있어! 잠깐 한번 상상해 보렴. 네가 그 예언을 절대로 못 들었다고 말이다. 그럼 지금 볼드모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생각해 봐라!”

 (…) 해리는 그가 알고 있는 볼드모트의 모든 끔찍한 짓들을 생각해 보았다. 순간 그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목구멍까지 활활 치솟았다.

 “그자를 끝장내고 싶어 했을 거예요. (…) 반드시 그렇게 하고 싶었을 거예요.”

 “당연히 그랬을 거다! 그거 봐라. 예언은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알려 주고 있지 않아! 다만 예언은 볼드모트 경으로 하여금 너를 그의 상대로 점 찍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넌 네 길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거야…… 예언을 무시하고 돌아설 수도 있어! 하지만 볼드모트가 계속해서 그 예언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너를 잡으려고 할 거야…… 그 때문에 결국에는 진짜로……”

 “우리 두 사람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죽이게 되고 말겠군요.”

 “그렇단다.”

 마침내 해리는 덤블도어가 그에게 계속 말해 주려고 애를 썼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목숨을 건 싸움을 앞두고 경기장에 억지로 끌려 들어가느냐, 아니면 고개를 높이 쳐들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느냐 하는 것의 차이였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든 그게 그거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덤블도어는 알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어. 해리는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자부심을 느끼며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들도 알고 계셨어. 그것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전혀 다르다는 것을.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2005)』 중

 즉, 해리는 처음엔 예언이 자기 삶의 목적을 강제로 정해버린 증거라고 생각했어. “우리 두 사람 중 하나가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운명에 갇힌 느낌이었지. 하지만 덤블도어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줘. 예언이 의미를 갖게 된 건 볼드모트가 그걸 믿었기 때문이고, 결국 그 믿음이 예언을 실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라는 거야. 다시 말해, 해리가 볼드모트를 물리치려는 건 예언 때문이 아니라 해리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는 거지.

 이 대화를 통해 해리는 자신의 삶이 예언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내린 결정으로 만들어진다는 걸 깨달아. 덤블도어는 예언을 무시하고 돌아설 수도 있다고 했지만, 해리는 볼드모트가 저지른 악행을 떠올리며 단호히 말해. “그자를 끝장내고 싶어 했을 거예요. 반드시 그렇게 하고 싶었을 거예요.” 이건 해리가 예언을 넘어서, 자신의 신념과 정의감을 기준으로 행동하기로 선택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야.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이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고, 그 선택에 책임지는 걸 중요하게 여겨. 그런 의미에서 해리의 선택은 단순히 예언의 희생자로 남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자유와 의지를 가진 실존적 존재라는 걸 증명해. 더군다나, 예언은 단지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었어. 그는 더 이상 억지로 경기장에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야. 이제는 고개를 높이 쳐들고 스스로의 결단으로 볼드모트와의 싸움에 나서는 사람이 된 거지. 해리는 대화 초반에 “그래도 결국 다 똑같은 거 아닌가요?”라고 하지만 대화를 끝내며 깨닫지. “그것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건 해리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외부에서 주어진 예언이 아니라, 자기 안의 신념과 가치를 바탕으로 정의했다는 걸 의미해. “목숨을 건 싸움을 앞두고 경기장에 억지로 끌려 들어가느냐, 아니면 고개를 높이 쳐들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느냐”는 단순한 태도의 문제가 아니었어. 해리에겐 이게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느냐, 아니면 남이 정한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남느냐를 가르는 중요한 순간이었던 거야.

 결국 해리는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예언을 초월해. 그는 볼드모트와의 싸움을 단순히 예언을 따르는 행위로 만들지 않았어. 그 싸움을 자신이 믿는 정의와 사랑의 가치를 실현하는 길로 바꾼 거지. 그래서 해리는 운명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진정한 실존적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 된 거야.

 마법사의 세계에서는 17살 생일을 기점으로 성인임을 인정받아. 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해리는 16살이었지. 해리는 자신의 실존성을 회복하고 자신의 삶의 목적을 스스로 설정하며 나이만 성인에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정신적 성숙도 어른에 가까워지지. 하지만 해리가 어른이 되기 위해선 아직 관문이 더 남아 있어.


 
🪐“제게 선택권이 있다고요?”

 시리즈의 마지막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2007)』에서 해리는 정말로 볼드모트를 이겼을까? 해리는 남은 관문을 넘어내고 이번에도 살아남아 어른이 되었을까? 6권에서 덤블도어와의 대화를 통해 해리는 예언이나 운명이 아닌, 자신이 내린 결단으로 볼드모트를 끝장내기로 결심했어. 하지만 7권에서 처음 등장하는 죽음의 성물이라는 강력한 유혹 앞에서 해리는 잠시 흔들리게 돼. 세 종류의 성물을 모두 소유한 자는 죽음마저도 넘어선다고 알려져 있어. 볼드모트도 죽음의 성물을 노려 죽음의 지배자가 되려 한다는 걸 알고 해리도 볼드모트를 죽이는 수단인 ‘호크룩스’를 찾지 않고 죽음의 성물을 찾는 데에 정신이 팔리지. 죽음의 성물을 소유하면 볼드모트를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건 마치 예언에 의존하던 초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듯한 행동이었지.

 하지만 친한 친구의 죽음을 겪으며 해리는 자신의 길을 다시 선택해. 그 친구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해리를 돕다 죽음을 맞이했어. 그 죽음은 해리에게 많은 걸 깨닫게 했지. 자신이 추구해야 할 것은 죽음의 성물이라는 강력한 힘이 아니라, 볼드모트의 영혼을 지상에 묶어두는 마법인 호크룩스를 파괴해 볼드모트를 무찌르는 자신의 신념과 목표라는 것을 말이야. 

 다시금 목적을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수정한 해리는 호크룩스 파괴 과정에서 잠시 죽음을 맞이하는 경험을 해. 죽음을 맞이할 때 해리는 자신이 이 선택을 하면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지. 실존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목소리 높이고 있는 지점도 바로 ‘죽음에 대한 자각’이야.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우리는 실존 그 자체에 더 가까워질 수 있어. 해리는 죽음이라는 선택을 감수하겠다고 한 시점에서 더 한움큼 어른에 가까워진 거야.

 그리고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덤블도어와 대화를 나누는데, 이게 상상인지 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해리는 마지막 깨달음을 얻어.

 “전 돌아가야겠죠, 그렇죠?”

 “그건 네게 달렸단다.”

 “제게 선택권이 있다고요?

 “만약 네가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너는…… 말하자면…… 열차(=죽음)에 오를 수 있다는 거란다. (…) 죽은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마라, 해리. 산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라. 그중에서도 사랑 없이 사는 사람들을 가장 불쌍하게 여기렴. 네가 돌아간다면, 넌 분명히 불구가 되는 영혼이 더 적어지도록, 뿔뿔이 흩어지는 가족이 덜 생기도록 할 수 있을 거야. 만약 그것이 너에게 가치 있는 목표인 것 같다면, 그럼, 우리는 이만 작별 인사를 하자꾸나.”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2007)』 중

 이 대화에서 덤블도어는 해리에게 "네가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너는 열차에 오를 수 있다는 거란다"고 말해. 이 말은 해리가 죽음을 수용할 수 있는 자유도 있지만, 동시에 산 자들을 위해 싸우는 길을 선택할 자유도 있다는 뜻이었어. 중요한 건 선택이 강요된 것이 아니라 해리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내린 결정이라는 점이지.

 덤블도어의 "죽은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마라, 해리. 산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라. 그중에서도 사랑 없이 사는 사람들을 가장 불쌍하게 여기렴"이라는 말은 해리가 삶의 목적을 명확히 하도록 이끌어. 해리는 사랑과 희생을 통해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을 다시 하나로 묶고, 더 많은 불구의 영혼이 생기는 것을 막는 데 삶을 바치겠다고 결심해.

 결국 해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개척해. 이는 실존주의가 말하는 "스스로 삶의 목적을 설정하고 책임지는 존재"의 전형적인 모습이야. 해리는 죽음의 성물이라는 강력한 힘 대신 사랑과 희생이라는 가치를 선택함으로써, 단순히 운명을 따르는 소년에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끄는 어른으로 거듭났어.

 해리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 운명과 맞서고, 사랑이라는 가치에 따라 싸우며 진정한 실존적 존재로 성장해. 마지막 시련을 넘어, 그는 단순히 볼드모트를 물리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세운 삶의 목표를 실현하며 어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거야. 이는 해리가 실존주의의 핵심을 체화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순간이지.


 실존성을 깨닫는 건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전환점이야. 어른으로서의 조건은 나이와 책임감을 넘어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태도를 갖추는 거야. 외부의 기대나 규범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선택한 삶의 길을 걸어가는 용기와 통찰이 필요한 거지. 이 과정은 흔히 삶의 도전 속에서 시작되며, 그 순간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만나게 돼.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설명했던 『해리 포터』 시리즈는 청소년이 처음으로 실존주의에 대해 배우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나의 삶의 목적은 무엇으로 설정해야 할까?’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기까지를 도와주는 책으로서 추천해. 『해리 포터』 시리즈까지 다 읽었다면 이어 읽기 좋은 책으로는 파울로 코엘로의 『연금술사(1988)』는 이런 실존적 깨달음과 성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야. 주인공 산티아고는 양치기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어떤 왕을 만나며 자신의 진정한 꿈이 무엇인지 찾아 나서는 여정을 떠나지. 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19)』을 추천할게. 『데미안』에는 유명한 구절인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가 나와. 이 말의 뜻을 실존주의의 시각에서 이해해보자.

 추운 겨울, 봄을 위해 거리로 나서는 어른들이 더 많길 바라는 날이지만, 아직 실존성과 주체성을 회복하지 못해 어른에 미처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자신을 돌아보기에는 감수성 넘치는 새벽만큼 좋은 시간대가 없지. 해가 뜨기 전이 가장 춥대. 올해의 겨울과 새벽이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추운 날이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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