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 찾아온 연말. 일 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근 몇 주간은 올 한 해를 반추하고, 내년을 계획하며 매일을 보냈다. 이젠 정말 돈을 벌어야지, 그러려면 내년엔 어떤 것들을 해야할까- 하는 현실적인 고민들 사이에서 생각이 복잡해지는 연말이다.
나는 요즘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도서관을 가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스무 살 때부터 자취를 했지만 늘 관리비는 부모님께서 내주셨기 때문에, 나는 자취 경력 7-8년차가 된 이제서야 스스로 난방비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통신비도 올해가 들어서야 내 통장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그래봤자 여전히 경제적으로 부모님께 의존해 살고 있긴 매한가지지만.
주변 친구들은 하나 둘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초중학생 코찔찔이일 때 만났던 친구들이 번듯한 옷에 사원증을 달고 일하고, 스스로 월세를 내고, 대출 이자를 갚는 모습을 보면 우리 정말 다 컸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와중에 여전히 직장이 없는 나는, 내가 그 친구들보다 조금 덜 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이는 똑같이 먹었는데, 내 친구들은 어느새 어른이 됐고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직도 어린 어른
그저 몸집만 좀 더 큰
너무 하찮아 너무 같잖아
어리단 핑계를 대고 싶어 난
어린 어른 - (여자)아이들
그러니까 어른이란 나이를 먹으면 자연히 얻게 되는 귀속지위는 아닌 것이다.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성취 지위인데, 그 조건이 법이나 규칙으로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경제적 독립이라던가, 정신적인 성숙을 갖춘 사람만이 ‘어른’의 타이틀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동의할 것 같다.
조금 더 개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어른에 반대되는 혹은 어른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개념들을 몇 개 빌려오면 좋을 것 같다. ‘성인’은 사진적으로 ‘다 자라서 어른이 된 사람. 만 19세 이상’을 뜻한다. ‘어른이 된 사람’이라고 적혀는 있지만, ‘성인이라고 다 어른은 아니’고, ‘스무살은 아직 애’라는 말도 공감을 받는다. 그러니 ‘성인’은 실상은 만 19세 이상이면 얻을 수 있는 법적인 지위에 가까운 듯 하다. 그럼 ‘꼰대’는 뭘까? 꼰대는 나이’만’ 먹은 사람, 나이를 권력 삼아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다른 사람의 삶에 간섭하는 등 불합리한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어른에 반대되는 말은? 아무래도 어린이가 있겠다. 어리다는 ‘어리석다’에서 온 말인데, 어원에 충실하게 해석해보자면 어리석고, 철이 없고,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이 어른의 반대 지점에 서 있는 사람이 되겠다.
조합해보면 (1)만 19세 이상의 성인이기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질 수 있고, (2)철 들었고, 세상물정을 알지만 (3)그것을 권력삼아 더 어린 사람들에게 무리한 요구나 간섭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른’인가보다. 그렇다면 ‘경제적 독립’은 (1)과 (2)의 상위 조건을 달성하기 위한 하위 조건이 될 수 있겠다.
그런데 다시보니, (2)의 철 들었고, 세상 물정을 안다는 것은 너무 추상적인 정의인 듯 하다. ‘세상 물정’을 안다는 건 어떤걸까?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다거나, 통찰력을 가졌다는 긍정적인 의미일까 아니면 차가운 현실을 깨달아버렸다는 의미일까?
어른들 세상 추위도 풀렸으면 해
(...) 얼음들이 녹아지면
조금 더 따듯한 노래가 나올텐데
얼음들은 왜 그렇게 차가울까 차가울까요
얼음들 - 악동뮤지션
어른이 늘 긍정적인 뜻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른은 세상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세상이 그리 따뜻하지 않다는 ‘세상 물정’을 알아버렸기에 냉소적이고, 세상에 의해 깍여져 개성을 잃었으며,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꿈을 희생하고 아픔을 티내지도 못하는 사람으로도 여겨진다. 나는 이런 어른을 생각하면 소설 「모모」에 등장하는 회색신사들이 떠오른다. 잿빛 얼굴, 모두가 같은 디자인의 모자와 정장을 입고 있고, 시가를 피우며 사람들에게 ‘쓸데 없는 짓’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하고 어린아이들마저 획일화시키는 모습이.
밍기적의 26호, 어른에서는 이런 다양한 어른의 의미에 대해 성찰한다. 망은 <어른이 된 해리포터>에서 실존성을 깨닫고, 자기 스스로 삶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라 지적한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의 주요 이론을 설명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해리포터」를 다시 읽으며 ‘어른이 되는 것’의 의미를 되짚는다. 연푸른의 <핫한 어른이 되고 싶어>는 영화 위키드를 보고 생각한 것들을 담아낸 에세이다. 연푸른은 ‘쿨한 어른’이라는 인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무언가에 푹 빠질 수 있는 뜨거움을 가진 어른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이야기한다. 또바기의 <길을 잃은 어른>은 어른이 가져야 할 ‘책임’의 범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글이다. 그는 이 사회가 어른에게 얼마만큼의 자유를 제공하고 있는지를 여러 자료를 통해 논의하며, 그 책임 소재가 온전히 한 개인에게만 속해있음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얼마전, SNS에서 ‘어른이 됐다고 느낀 적이 단 한번도 없는데 갑자기 늙어버렸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보다 훨씬 어른들에게도, 여전히 어른은 가지기 어려운 이름인가보다. ‘어른’이란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도달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목표 같기도 하고, 달마다 날아오는 수도세 청구서로 쉽게 증명되는 무엇 같기도 하며, 조언과 꼰대질 사이에서 잠깐의 방심으로 잃게 되는 호칭 같기도 하다. 나는 존경받을만한 어른이 되고 싶지만, 동시에 영원히 어려서 어른의 책임감을 회피하고 싶다. 진짜 어른이 되면 이런 마음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내가 어떤 컨텐츠들을 더 읽어볼만한 컨텐츠로 소개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지만, 어찌되었든 몇 가지 컨텐츠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어른스럽지 못한 대통령이 어른스럽지 못한 짓을 해서 온 나라가 시끄럽고, 모두가 세상 물정을 알려주기 위해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쏟아지는 요즘이다. 부디 모두 건강하길. 새해는 올해보다 조금 더 행복하길.
희곡 유리 동물원 / 테네시 윌리엄스
부모가 자녀에게 의존하여, 자식이 자신이 부모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혹은 가족을 안전하게 지킬 책임이 있다고 압박을 느낄 때 자녀는 ‘부모화’된다. 이 희곡 속 톰은 가정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돈을 벌어오는 사람으로,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나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화려했던 과거의 기억에 취해 사는 어머니와 집에서 유리 동물 모형만 돌보는 누나를 위해 꿈을 포기하며 신발공장에서 일한다. 어느날, 어머니는 톰에게 로라와 결혼시킬만한 휼륭한 신사 손님을 데려오라고 요청한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 감독 김현지
한약방 운영으로 번 전 재산으로 지역의 교육, 인권, 문화, 역사를 위해 기여해 온 김장하를 다룬 다큐멘터리. 위근우 칼럼리스트의 글 일부로 추천의 글을 대신한다. “<어른 김장하>를 보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의 위대함에 다가가고 싶다는 동경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의심도 대가도 없이 선불해준 믿음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만으로도 우리는 평범함 안에서 위대함의 가능성을 믿어볼 수 있다. ‘어른’이란 평범함의 진짜 무게를 안다는 것의 다른 이름이므로”
인터뷰집 새 마음으로 / 이슬아
‘이슬아의 이웃 어른 인터뷰’라는 부재가 달려있는 책. 오랫동안 한 가지 일을 해온 어른들로부터 이들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담은 책이다. 응급실 청소 노동자, 아파트 계단 청소 노동자, 농업인, 인쇄소 기장, 경리, 수선집 사장님과의 대화가 수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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