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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_2021/10호_사소하고 거대한 배움

10호_사소하고 거대한 배움 / 편집장의 인사

by 밍기적_ 2021. 10. 26.

사소하고 거대한 배움

편집장 / 연푸른


이번 학기엔 12학점을 수강 신청했다. 학기가 두 달 정도 지난 지금, 나는 수업을 하나하나 취소해 3학점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럴 거면 진작 빨리빨리 취소할 것을 왜 두 달 동안 꾸역꾸역 수업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 두 달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수업을 3학점만 듣는다고 이야기하면 내 친구들 대부분은 나의 졸업을 걱정해준다. 나는 대학에 들어온 이후 대부분의 학기를 이런 식(?)으로 살아왔고, 그 덕에 제때 졸업을 하지 못하고 초과 학기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참 한결같다. 오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변하는 게 없고, 지금이나 그때나 나에겐 학교 공부보다 중요한 게 많다. 그리고 그 많은 것들을 하면서, 나는 또 분명 많은 것을 배웠다.

공부와 배움의 차이는 뭘까? 나는 ‘공부’라는 단어를 들으면 책상에 앉아 책과 노트를 펼치는 장면이나, 뭔가를 암기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한편 ‘배움’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모습이나, 어린아이가 절하는 부모를 어색하게 따라 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사전은 ‘공부’를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라 정의한다. 한편 ‘배움’의 기본형인 ‘배우다’는 ‘새로운 지식이나 교양을 얻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다 혹은 남의 행동이나 태도를 본받아 따르다’라는 뜻이다. 학문이나 기술은 공부할 수도 있고 배울 수도 있지만, 학문도 기술도 되지 못한 지식, 어떤 행동이나 태도는 ‘공부’할 수는 없되 ‘배울’ 수만 있다. 그러니 배움은 ‘공부’를 포함한 더 넓은 범주의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빨래하는 법을 배울 수는 있지만, 이를 ‘빨래 공부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빨래 공부’라는 말을 쓴다면 그건 단순히 빨래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을 것 같다. 이를테면 특정 질감의 옷에 가장 적합한 세제 비율과 온도를 알아내 기록해두고, 세탁기의 작동법과 각 버튼이 의미하는 법을 암기하는 것까지는 되어야 ‘공부’라 할 수 있다는 느낌이랄까?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공부는 조금 더 체계적이고 전문화된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것 같다. 반면 ‘배움’은 거기에 더해 실용적이고 언뜻 사소해 보이는 것, 기술로 인정받지 못하고 ‘꿀팁’ 정도로 전수되는 것을 익히는 것까지 포함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어떤 배움을 종종 무시당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에게는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잘 정리해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받는 것이 배움의 최우선 순위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취미에 관한 배움이나, 인간관계에 관한 배움은 어른들에 의해 종종 뒷전으로 밀려난다. 반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업인 사람에게는 사물의 비례를 익히고 이를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적절한 의사소통 기술을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나에게 어떤 배움이 필요한지를 결정하고, 내가 무엇을 배웠는지는 다시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한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하루 무언가를 배우며 살아왔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걷는 법과 말하는 법을 배웠고,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는 법을 배웠으며, 나 자신을 유지하고 키워가는 법을 배웠다. 수학과 과학 같은 학문적 배움을 접했고, 여러 가지 문제 상황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법도 조금씩 배웠다. 문제라는 것은 닥칠 때마다 새롭고, 그렇기 때문에 이 배움은 앞으로도 영원히 이어질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공부이든 공부가 아닌 배움이든, 이들은 쌓여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그게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혹은 심지어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어떤 배움은 서서히 사람의 태도와 습관을 만들어 갈 것이고, 또 어떤 것은 이전까지의 삶의 방식이 완전히 바꿀 수도 있다. 그리고 밍기적의 10호는, 이런 ‘배움’을 주제로 한 세 개의 글을 담았다.
바투와 망은 교사라는 그들의 직업과 긴밀히 관련된 글을 써주었다. 바투의 <시험은 배움에 도움이 되는가>는 ‘시험’이라는 제도의 유효성을 따진다. 시험은 누군가를 배우도록 동기부여 해주는 동시에 배움을 시험 안에 가두는 양날의 검이다. 그의 글에서 배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바투의 고민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런 고민은 망의 글에서도 이어진다. 망은 그의 글 <교사의 배움>에서 배움을 전달하는 직업이라 여겨지는 ‘교사’ 역시 끝없이 배워야 하는 존재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끝없는 배움 속에는 ‘배움을 전달하는 방법’에 대한 배움 역시 포함된다. 그의 글을 통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진부한 말의 진실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연푸른은 <더 풍부한 세상을 사는 법>에서 배움이 자신의 시야를 넓혀주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 이 세상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이 글을 그것을 위해서라도 끝없는 배움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보시다시피 이번 호에는 온기의 글이 없다. 그는 잠시 쉬기 위해 떠났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렇듯, 그도 나도 제대로 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쓸데없는 배움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번아웃이나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졌다. 이제는 우리 모두 제대로 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글을 읽는 이들 역시 다가오는 날들을 더 건강히 즐길 방법을 배울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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