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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_2022/15호_진짜, 가짜, 거짓말

15호_배설욕 / 망

by 밍기적_ 2022. 5. 25.

배설욕

 

에디터 망

 

똑, 똑. 물 떨어지는 샤워기 소리를 들으며 재희는 생각했다. 방금까지 쏟아지는 샤워기 소리를 위장삼아 울어보려고 했지만 울음소리도 나오지 않아 결국 꺼버린 그것에선 자꾸만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재희는 방금 있었던 대화를 생각했다.

“엄마는 나 낳고 나서 후회한 적 없어?”

어쩌다 이 질문이 나왔는지 구구절절 떠올리기엔 걷어내야 할 것이 많다.

“그런 적 없지.”

고민 없이 나온 대답이 재희에게는 든든한 아군이었다.

“근데 엄마는 나 너무 일찍 낳았잖아.”

“어휴, 그래, 그치만 그게 말이지. 남자애라고 알려줬는데 나중에 여자애라고 정정해주더라. 여자애라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지.”

믿었던 만큼 부메랑이 되어 날아온다. 세상에 나는 생명들 중 그 어느 것도 의도한 것은 없다지만 꺼져버릴 생명이었다는 사실을 목도하는 건 제법 충격이다.

“어, 정말?”

당황하긴 하였지만 재희는 이미 충분히 남아선호사상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는 나이였다.-그야 당연했다. 1930년생이란 그래야 했다.- 그래도 화목한 가정에서 그런 탄생 비밀(?)이 있을 줄은. 너무나도 가볍게 나오는 대화는 어쩌면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말 저를 지워버릴 생각은 아니었으리라.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상관없이 끝까지 품고 있으려 하였지만 이제와 농담처럼 말 하는 것이리라. 그 정도의 신뢰관계는 있었다. 30 넘은 세월이란 그런 거였다. 다만 30년 넘게 이 화제로는 대화를 해보지 않은 탓이다.

“에이, 그래도. 너무 솔직한 거 아니야? 이제 와서. 진짜였어도 차라리 거짓말로라도 나 낳고 싶어 죽겠었다고 해주지.”

무엇을 바라서 이런 말을 했던 걸까. 자식됨에 있어 보호자에게 바라는 근거 없는 무한한 애정을 바란다. 재희는 제 감정의 근간을 알았다. 인간으로서 뻔뻔한 요구였지만 자식이기에 당당한 요구였다.

“아니 어떻게 거짓말을 해, 이런 걸 가지고.”

“이런 거니까 거짓말이라도 해 달라는 거지.”

재희가 서러운 건, 그러니까 그거였다. 이제 와 제가 원하지 않았어도 늦었으니 낳은 자식이라 하더라도 여아를 원하지 않는 사회 덕분에 간접적인 상처야 받을 만큼 받았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어릴 때부터 저를 후벼 팠던 그의 지나치게 솔직한 언행들이었다. 너는 나랑 친하니까 이 정도 말은 해도 된다는 무한한 신뢰감. 부모가 자식에게 당신들 힘든걸 전부 말하면 안된다고, 재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지켜야 하는 선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는 가끔 그 선을 넘는다. 선을 넘는 그조차도 재희는 사랑했지만, 이제 와 그 사랑이 자기 방어 기제는 아닌가 생각이 든다. 원하지 않는 자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처감에 울어볼까도 싶었지만 마음이 술렁이는 것과 달리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쏟아낼 눈물은 이미 20대에 다 쏟아내서 그럴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이야길 나한테 하는 이유는 뭐야?”

똑, 똑 들리는 소리가,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아니었다. 그것이 타고 흐르는 건 시원한 맥주캔의 표면이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과 차도의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서 맞는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이미 마음 정리, 생각 정리 할 거 다 한 거 같은데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그래. 시비 거는 게 아니고.”

맥주와 함께 뜯어놓은 과자를 물어다 와작 와작 씹는다. 똑, 똑 소리를 묻어버린다.

“마음 정리가 안됐나?”

재희는 모른 척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나도 너한테 물어보고 싶어서 그래. 이해 안 되지 않아, 우리 엄마? 그때 그 상황에서 거짓말로라도 나 낳고 싶었다고 해주면 되잖아.”

“근데 너네 엄마가 그런 말을 해서, 덕분에?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널 낳고 나서 후회 없으셨다는 말도 완전 찐인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그게 찐으로 느껴지라고 더 충격적인 말을 숨기지도 않고 해? 배신이야.”

“정작 별로 배신감 느끼지도 않는 것 같구만..”

“부정적인 감정 계속 갖고 있으면 그게 갉아먹는 건 결국 나거든.”

재희는 과자를 먹지 않는다. 기름져서 그렇다. 맥주만 마신다. 똑, 기울인 캔의 바닥을 타고 물방울이 청바지 위로 떨어진다.

“그래서 엄마가 밉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상처 안 받는 것도 아니라서. 그런 말 좀 안했으면 좋겠어.”

“네가 바라는 건 아에 말을 안 하는 거야, 아니면 거짓말로라도 꾸며내길 바라는 거야?”

“나는 전자가 좋아. 사실 거짓말도 싫어. 엄마보고 거짓말이라도 해주면 어디 덧나냐고 하긴 했는데, 그냥 그 얘기 자체를 30년간 안했으면, 그때도 안하고 넘어갔으면 좀 좋아.”

“그러게. 너희 어머니 왜 그런 말을 하셨을까. 새삼스레. 너라면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신 걸까?”

“우리 엄마 그냥 공감 능력이 떨어지나 봐.”

“그렇게 생각해도 좋고. 너 편한대로.”

이맛살을 찌푸린다. 답은 나오지 않는다. 상처받은 건 저인데 자꾸 변명할 기회를 주려는 것도 자신이다. 결국 저는 엄마를 완전히 미워할 수 없다. 부정적인 감정은 저를 갉아먹으니까, 말했던 이유 그대로다.

“그래도 적당히 포기하고 사니까 이제 좀 괜찮은 거 같아. 엄마가 그렇게, 지나치게 가감없이 솔직하신 거.”

“누가 다 우리한테 맞춰주고 살겠냐.. 너랑 나도 안 맞는 게 있는데 가족이라고 없겠어..”

짠 하자, 짠. 재희가 맥주캔을 먼저 내밀었다. 부딪히는 맥주캔의 말이 맞았다. 이미 생각 정리, 마음 정리 다 하고 나서 꺼낸 말이니까. 어떠한 해결책이나 위로나 공감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다만, 배설욕은 인간의 3대 욕구라고 하니까. 그래서 어디 꺼내 놓을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지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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