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워진 나와 함께 one more round
에디터_연푸른
요즘 나는 변해가는 현대 사회 속 인류의 미래와 우주의 평화, 못된 욕망에 일그러져 버리던 Algorithm들이 존재를 무기로 파괴로 집어삼키고 모두가 스마트한 감옥에 자발적으로 갇혀 0과 1로 만든 디지털에 인격을 맡기는 삭막한 세상 속에서 세계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나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이 무슨 광야(KWANGYA)의 주인공같은 고민인가 싶겠지만, 사실은 그냥,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다는 뜻이다.
2,000자 분량으로 A4 용지에 12포인트로 타이핑하여 제출, 전공 선택 동기, 수학 목표, 자신의 성장 과정, 미래의 목표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시오.
요즘 나는 대학원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다. 나는 학부로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연기과 석사 과정으로 들어가기 위한 입시를 준비중이다. 원서 제출까지 2-3주가 남은 현재, 지난 한 달 동안 내 근황은 모두 자기소개서였다. 알바를 마치고 자소서를 쓰다가 운동을 하고 자소서를 쓰고, 자고 일어나서 자소서를 쓰며, 자소서 피드백을 받고 다시 자소서를 쓰고... 근데 지금은 또 자기소개서 쓰기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니... 정말 지겹다.
한 달동안 나는 누구이고, 누가 나이며, 그래서 내가 이 대학에, 이 사회에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지를 설명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의 사회 인식에까지 생각이 닿았다. 요즘 세상은 이게 문제고, 그래서 전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고자 이런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 이게 내가 세계 평화에 대해서까지 고민하게 된 계기다. 거창하지 못한 삶이라도 자기소개서만큼은 꽤나 거창하다.
자기소개서는 악명이 높다. 자기소개서를 써보지 않은 사람은 많더라도 ‘자소설’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올해부턴 없어졌다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대입 자기소개서가 입시의 중요한 요소였고, 대입을 지나고 나면 취업 자기소개서, 대학원 자기소개서... 그리고 더 어른이 되면 포트폴리오가 자기소개서를 대신할 것이다. 인생은 자기 증명의 연속이다.
자기소개서를 위해서는 짧게는 2000자에서 많아봐야 A4용지 너덧장 안에 내 인생을, 내 성장 과정과 삶의 철학, 미래의 목표를 기술해야한다. 수십년간 쌓아온 내 삶을 압축하는 것부터가 고난이지만, 짧은 분량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말이 자기를 소개하는 글이지, 사실은 내가 학교나 회사가 원하는 형태의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한 글이다. 그리고 그 ‘이상형’에 나를 맞추기 위해 분명 내 모습인 부분을 잘라내고, 수정하고, 포장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현타가 따라온다. 솔직하고 허세 없는 글을 써야하지만 동시에 너무 솔직해선 안되고, 분명히 나지만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 보여야 한다. 마치 인생샷을 찍는 기분이다. 나보다 예뻐야 하지만 너무 예쁘면 안되고, 나보다 나아야 하지만 나와 닮아야하고... 포장에 실패한 글은 날 합격시켜주지 못하고, 지나친 포장은 면접관 앞에 선 나를 난감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나도 현타의 연속을 경험하고 있다. 빈 화면 앞에 앉아 뭘 쓸 수 있고 뭘 써야할까를 고민하다 인류의 운명과 지구의 미래까지 고민하고 있으니. 하지만 그러다 문득, 언제 이런 고민을 마지막으로 했더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하루하루의 갓생을 추구하며, 그리고 또 대체로 실패하며 하루 단위의 삶을 살아왔는데, 그러다 오랜만에 지난 내 몇 년을 돌아볼 기회가 생긴 거다.
내가 마지막으로 자기소개서를 쓴 건 대학교 입시를 준비하면서였다. 무려 7년 전이다. 그리고 그 7년동안 나는 내가 살아온 날들에 대해 이렇게 치열하고 고민하고, 그 결과를 밀도 높은 글로 정리해본 적이 없었다. 자기소개서를 쓰면서야 겨우 7년간 내가 해온 활동을 정리해보게 됐다. 그 중 가장 의미있고 중요한 일을 고르고,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활동을 유기적으로 틀짓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매일매일은 충동적으로, 일주일은 손쌀같이, 한 달은 한심하게 보낸 것 같았는데 그런 7년이 모이니 흐름이 보이고, 내 취향과 생각의 변화가 보인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날 설명하는 역사가 생겼다.
내 취향, 내 선호의 변화를 따라가다보니 내 가치관과도 만나게 된다. 나는 연기과 지망생이니 아무래도 좋아하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이 연극 좋다’ 혹은 ‘이 작품 좋다.’ 하며 개별 작품에 던지던 평에 ‘왜’를 질문하게 됐다. 이게 ‘왜’ 좋아? 네가 연극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게 ‘뭐’라서 이게 좋은 것 같아? 지금의 연극은 ‘어때야’ 한다고 생각해? 평소라면 ‘그냥’ 혹은 ‘당연한 거 아니야’하고 대충 대답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를 자기소개서를 쓸 때는 굳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 언어화해야한다. 마땅한 이유랄게 없는데 뭘 설명하라는 건지 짜증나고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를 알게 되는 것 같다. 나도 몰랐던 내 취향의 이유를 발견하고, 그걸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생각이 더 정리됨을 느낀다. 이제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내 가치관에 의문을 던지고, 근거를 찾고. 그렇게 지금의 나를 정리해 글로 쓴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나는 또 자기소개서를 수정하러 가야한다. 이제는 정말 그만 좀 쓰고 싶다. 진짜 지겨워... 하지만 짜증나게도, 자기소개서 작성을 통해 내가 날 더 알게 되고, 내 방향성을 더 정립할 수 있었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자기소개서를 쓰며 답답한 기분이 들었던 건 내가 아직 내 본질까지 성찰해본 적이 없어서였던 것 같다. 필요한 질문을 계속 미루고 있었는데 이제야 미뤄둔 질문에 답을 하게 된거다. 그렇게 나를 좀 더 알게 됐다. 아직 자기소개서를 제출하진 않았지만, 일단 나에게 나를 소개하는 데까진 그럭저럭 성공한 것 같다. 이제... 대학도 날 받아주기만 하면 좋을텐데... 자 관계자 여러분, 이게 지금까지의 접니다. 부족할 수 있겠지만 이게 지금의 제 생각입니다. 이런 저의 다음 라운드를 함께해줄 수 있는 곳이 이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본교에 지원합니다.
(물론 자소서를 이렇게 쓰지는 않았음. 당연함. 이 글은 자소서 아님)
* 새로워진 나와 함께 one more round (소녀시대-oh 가사)
* 못된 욕망에 일그러져 버리던 Algorithm들이 존재를 무기로 파괴로 집어삼키고 (에스파-girls 가사)
* 모두가 스마트한 감옥에 자발적으로 갇혀 0과 1로 만든 디지털에 인격을 맡기는 ... 삭막한 세상 (엑소 – MAMA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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