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만의 재회
에디터_망
2022년 말 1990년대를 리즈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추억이 강타했다. 당해 12월에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 때문이다. 1996년에 완결을 맞이한 슬램덩크 이후 원작자 이노우에가 직접 디렉팅과 모델링에 참여하여 3D로 제작하였다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전부터 추억과의 재회에 여러 희비가 교차했다. 강백호와 서태웅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거야? 그렇지만 3D라니 어색하게 뚝딱거리는 꼴을 보게 되면 어떡하지.. 그래도 이 기회에 새롭게 슬램덩크를 알게 되는 유입 팬들도 생겨나면 좋겠다.. 뭐? 그런데 주인공이 강백호가 아니라고? 그럼 누구라고?
걱정 많고 기대 많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 이후 1년이 다 되어가는 현시점에도 여전히 극장에 걸려있을 줄은, 그러나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워낙에 유명하다곤 하지만 코로나19 초기 격리 시절에도 달고나 유행에 탑승하지 않은 이가 있듯 자신만의 매력적인 고집이 있는 이들은 여전히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무리 지금까지 극장에 걸려 있다 한들 만화 영화에 관심 없는 사람은 손쉽게 시간 떼우기 용으로도 고르기 힘드니까.
그런 독자분들을 위해 짤막하게 설명하자면, 그래도 농구 만화라는 건 알겠지라는 기대다. 몰랐어도 덩크DUNK라는 표현이 농구 스포츠에 쓰이는 용어라는 건 알아주길 바라니까. 만화 슬램덩크는 농구를 전혀 모르는 북산고교 신입생 강백호가 좋아하는 여자애를 위해 농구부에 가입했다가 결국은 농구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는 이야기다. 보이다시피 강백호가 주인공이었다.
만화 원작 슬램덩크는 TV판 애니메이션으로 전국대회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제작되었는지, 원작 상으론 이후 풍전 고교와 산왕 공업 고교와의 경기가 더 진행된다. 주인공 강백호가 있는 북산 고교는 한번도 전국대회를 밟아본 적 없는 신예팀으로 과거 3번 연속 전국대회 승리를 거머쥔 산왕 공업 고교와 전국대회 2차전에서 경합을 벌인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마찬가지로 영상화 되지 못한 풍전 고교를 건너뛰고 원작 상 마지막 경기인 산왕 공업 고교와의 경기 파트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여기까지는 원작과 다를 게 없는데...
송태섭과의 재회
그러나 원작가 이노우에 및 영화 관계자들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로 선보이는 새로운 슬램덩크의 주인공이 송태섭이라 밝혔다. 농구는 다섯 명이서 경기를 해야 하는 규칙이 있어 주인공 신입생 강백호, 그리고 그가 개인적으로 라이벌 취급하는 서태웅, 복귀한 3학년 선배 정대만, 주장 채치수, 마지막으로 2학년이없으면섭하지의 포지션 즘으로 취급받는 송태섭이 있다. 다섯 명 중 비중이 제일 적고 밝혀진 이야기들도 많이 없는 캐릭터다. 그러나 원작가 이노우에는 그에 대해서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며 그를 산왕 공업 고교 경기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송태섭의 밝혀지지 않은 과거 나올 뿐이며 시점이 그의 것이달 뿐이지 스토리 라인은 원작과 똑같이 흘러간다. 송태섭의 없는 과거라니, 라는 생각에 애독자들은 이노우에게 슬램덩크 외에 선보인적 없는 별도의 단편 「피어스」의 주인공 이름이 송태섭의 이름과 같으며 (일본판 송태섭 이름은 미야기 료타이고 「피어스」의 주인공 이름도 료타.) 작중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 이름은 슬램덩크의 이한나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해당 단편이 송태섭과 이한나의 과거 만남을 그린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했지만 원작가 공인으로는 별도의 패러렐 월드라고 밝혀지긴 했다.
하지만 단편 「피어스」에선 주인공 료타가 우연히 만난 여주인공 아야코에게 죽은 자신의 형을 언급한다. 바다 낚시를 나갔다가 3년째 돌아오고 있지 않은 형, 그 형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낚시에 자신을 데려가지 않는다고 삐쳐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했던 것 때문에 료타는 그때의 형과 같은 나이가 되었음에도 죄책감에 몸부림친다.
그리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어린 소년이 형과 농구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그 소년이 친구들이랑만 바다 낚시를 나가는 형에게 다신 돌아오지 마! 라고 말하는 대사로 문을 연다. 그리고 정말로 바다에 빠진 형이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로.
송태섭에게의 재회
누구와의 재회인가에 따라 그 의미는 무수히 통용되겠으나 이별로부터 남겨진 이들은 저를 먼저 두고 떠난 이들과의 재회도 그리워한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잃은 자들을 추모하고 그리워한다. 발상은 가상으로까지 뻗어나가 박애진 작가의 장편 소설 『명월비선가』에서는 망자를 살려보겠다고 그의 손톱과 머리카락까지 몽땅 보관하고 있다가 그를 인공뇌의 회로로 기억만을 깨워내 버린다. 뭇, 재회할 수 있다면 무언들 못했으리랴.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송태섭의 시각으로 본 전국대회 도전까지의 북산 고교의 노력들은 모두 재회의 과정이었다.
송태섭은 형 송준섭의 사후 그가 동생 태섭의 농구 연습을 도와준 길거리 농구 골대 근처 수돗가에 남겨두고 간 손목 아대를 제것처럼 여기며 착용한다. 경기 전에도 형의 아대를 손목에 채우곤 주먹을 움켜쥐며 다녀오겠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이 향하는 대상은 형인 것으로 유추된다.
작중에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경기 장면과 과거 태섭의 에피소드가 교차하며 등장한다. 태섭은 이후에도 농구를 잘 했던 형을 따라 주니어 농구부원이 되지만 경기에서 진 뒤 형에게 위로 받고 싶다는 팬들의 해석에 따라, 형의 남겨진 방에 들어가 형의 옷을 입고 형이 읽던 잡지를 읽는다. 그러나 태섭의 어머니는 태섭이 형 방에만 머무르는 것에 형 방을 치우며 집도 이사 가자고 제안한다. 각자 서로 다른 방식으로 떠나간 이를 그리워하며 그 방법의 차이에서 충돌하며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도 한다. 형의 물건을 보이지 않는 곳에 둠으로써 슬픔을 덮어두려는 어머니의 방식과 달리 태섭은 형을 떠오르게 하는 농구를 계속 함으로써, 그에 대한 눈치와 죄송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다.
어쩐지 모든 세상이 그에게 농구하지 말라고 비난하는 것 같은 시간 속에서, 중학생이 된 태섭은 정대만을 만난다. 슬랭덩크만 보았던 팬들에게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통해 태섭이 정대만과 만난 적 있다는 과거는 처음 엿보는 사실이었다. 정대만은 북산 고교 농구부의 슈터로 무릎 부상으로 인해 2년 정도 농구를 쉬었던 선수다. 하지만 중학생 태섭 앞에 나타난 대만은 부상당하기 전 정대만으로 태섭과 1대 1로 농구하며 다음에도 같이 또 농구하자는 말을 건넨다.
그 말을 듣기 전 태섭은 자진해서 1대 1 농구를 끊고 물러나던 참이었다. 정대만이 송태섭으로 하여금 형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했던 태섭과 달리 정대만은 그에게 다음에 또 같이 농구하자는, 명백한 재회를 희망하는 말을 했다. 그런 정대만과의 재회는 얼마나 심장 뛰는 일이었을까. 다시 만난 정대만이 부상당한 정대만으로서 농구도 완전히 다 포기하고 성실하게(?) 양아치의 길을 걷고 있지만 않았다면 그 두근거림은 긍정적인 신호였을 거였다.
정대만은 북산 고교에 와 농구부 선수로서 만났던 채치수(앞서 언급한, 북산 고교 농구부의 주장.)과 동급생 권준호와의 재회를 거부하며 자멸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그 눈앞에 북산 고교 농구부의 기대주 신입 송태섭(당시 1학년)이 입학했다고 하니 얼마나 눈꼴시려웠을까. 정대만이 송태섭을 보고 예전에 같이 동네 농구를 했던, 초등학생으로 착각했던 그 곱슬머리 소년이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아닌지는 차치하더라도 송태섭은 명확하게 정대만을 알아봤다. 태섭에게 정대만과의 재회의 희망은 산산히 부수어지고 태섭은 형을 떠올리게 했던 그가 농구를 더 하지 못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도발한다.
이번엔 태섭이 그에게 말한다. 농구, 하자고. 지면 지는 쪽이 삭발하는 거라고. 그런 그에게 정대만은 집단 구타로 보답했고 태섭은 그가 선택한 파멸의 길, 그가 제 농구화를 발로 차버리는 태도 등에 실망하며 –또 다른 어떤 것에 실망했는지는 몰라도- 옥상에서의 집단 구타 사건 이후 스쿠터를 타고 도로를 멋대로 질주한다. 헬멧도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그의 모습에서 그가 마치, 더는 농구할 수 없어 자멸하는 정대만보다 더 심한 자해의 마음가짐을 볼 수 있다. 스쿠터를 타고 가다 정말 사고라도 당했는지 송태섭은 순간적으로 형을 두고 온 고향 땅을 환상으로 보며 웃는다.
이후 기적적으로 살아나긴 했지만 태섭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 혼자 고향으로 향해, 형과 함께 비밀 기지로 공유했던 바닷가 동굴로 가 물건들을 뒤적이다가 형이 보던 잡지, 손목 아대 등을 찾아낸다. (과거 회상 장면이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태섭은 형의 아대를 아직 하고 있지 않은 채였다.) 태섭은 바다를 향해 참아왔다는 듯이 울음을 터뜨리며 형을 애도하고, 그와는 앞으로 영영 이런 방식으로밖에 재회할 수 없다는 것을 감내한다.
태섭은 곳곳에서 형과의 재회를 이루어냈고 나름의 방식으로 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속 마지막 태섭은 형이 남기고 간 아대를 벗어내고 매끈한 손목으로 경기에 임하는 모습을 보인다.
26년만의 송태섭
필자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통해 송태섭을 처음 알게 되었지만 세 가지 버전으로 재출간된 원작 만화책을 전부 사 모은 기존 팬 친구는 예전부터 송태섭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 친구는 자신의 최애(=제일 좋아하는) 캐릭터가 송태섭이라고 했다. 원작이 실시간으로 연재되던 신기 인기순으로 치면 북산 고교 주전 멤버 중에선 하위권을 차지하고 있던 송태섭의 포지션을 생각하면 그 친구의 취향도 의외다.
다만 친구는 송태섭이 원작에서 보여준, 이한나라는 매니저 캐릭터에게 보이는 허당같은 모습과 경기장에서는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에 빠졌지 그에게 이런 과거가 있은 줄은 몰랐다고 했다. 친구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개봉 이후 송태섭에 대한 애정이 시험받은 셈이다.
원작가 이노우에는 이제야 그의 이야기를 그릴 수 있는 시기인 것 같다고 밝혔다. 잡지에 슬램덩크가 연재되던 당시 밝히기엔 너무 딥deep한 이야기들이라 꺼려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팬들은 덕분에 다시 한 번, 송태섭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과거의 영광, 북산 고교 주전 멤버들과 재회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몰랐던 송태섭의 이면을 알게 되었다.
재회라는 것은 어쩌면 과거 내가 알았던 상대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는지 더듬어 가는 추억 여행이며 동시에, 나와 함께 하지 않은 세월동안 어떤 것들을 잃고 어떤 새로운 것들을 경험해 왔는지 그 간극을 나누며 괴리감을 해소하는 과정이다. 다시 만난다는 말 뜻에는 더 알아간다는 의미가 함께 한다.
작중에서 태섭은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죽은 자를 그리워하기에, 이를 두고 재회라고 할 수 있겠냐마는, ‘더 알아간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면 형이 죽을 당시의 태섭과 중학생의 태섭과 고등학생의 태섭은 그 자신 자체가 바뀌었다. 형은 그대로의 모습일지라도 재회의 당사자 중 한 명이 성장하였기에 태섭이 그를 추모하는 방식이-재회라면-그리고 재회할수록 더 알아가는 과정이라면,
작중 누구의 상상인지 모를 장면에선 남편마저 일찍이 잃은 태섭의 어머니가 방에 주저 앉아 울고 있고, 죽은 어린 시절 그대로의 모습인 형은 10보 뒤에 서 울고 있으되, 어린 시절에는 형보다도 더 뒤에서 꼼짝 못했던 태섭이 고등학생 태섭의 모습이 되어, 그때의 형과 같은 키가 되어선, 형을 지나쳐 어머니의 등을 끌어안는 시퀀스가 지나간다.
태섭은 키도 크고, 어릴 때와 달리 어머니를 안아줄 줄도 안다.
태섭은 곳곳에서 형과의 재회를 이루어냈다고 언급하였다. 그럴 때마다 태섭은 성장해 있었고, 새로운 모습으로 형을 마주하며 형을 더 알아가고 나아가는 형을 뛰어넘는다. 산왕 공업 고교와의 경기 또한, 초등학생이었던 형이 이기고 싶어 했던 상대로서, 태섭은 그 강팀을 강백호를 비롯한 북산 고교의 주전 멤버들로 이겨낸다.
재회는 어쩌면=괴리감 해소와=더 알아가는 것을 넘어=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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