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본 아오키도 뻘짓을 할까?
여태껏 당연했던 것들이 갑자기 이상하거나 신기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이를테면 너무나 일상적으로 사용해 온 단어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던가, 내가 침을 삼키고 눈을 깜박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갑자기 내가 이제껏 어떻게 침을 삼켰는지를 잊게 된다든가 하는 순간들.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신기하다는 노래 1가 있고, ‘살면서 갑자기 의구심 생기고 소름돋는 순간들 '같은 오래된 게시글 2이 존재하는 걸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어느 시점에는 그런 기묘함을 느끼는 것 같다.
나는 요즘 모든 사람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내가 내 삶을 경험하고 감각하는 것처럼 모두가 각자의 삶을 일인칭의 시선으로 살아가고 있다니.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누군가는 잠을 자고 똥을 싸고, 방금 만났다가 헤어진 친구의 삶이 내가 없어도 진행되고. 텔레비전 속 연예인도, 정치인도,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얼굴도 모르는 어느 사람도. 각자의 감각으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세계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있다’는 게,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의 삶을 결코 내 것처럼 느낄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게, 아찔하다.
특히 엠비티아이의 대유행 이후, 대문자 S인 사람은 명상하면서 정말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는 걸 깨닫고 나서는 그 사실이 더 아찔해졌다. 그럼 어떤 상태로 있는 거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건 무슨 느낌일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대문자 N인 나는 너무 뻘생각이 많아서 뭘 하나 짚어서 ‘이걸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 때 ‘아무 생각도 안 한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도대체 무슨 뜻일까? 아니 그리고, 아이돌 노래를 들으면서 ‘무대 위에서 기깔나게 춤추는 나'를 상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내 상상 속 나는 5년의 연습생 생활 끝에 그룹으로 데뷔해서 성공적으로 솔로 앨범까지 낸 상태다. 그런 상상을 안 하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노래를 듣는 걸까? 난 클래식을 들을 때도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데. 정말 궁금하다. 나는 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알 수가 없다. 상상조차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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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사는 세계는 내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세계다. 간접 경험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나라면 어떨까’하는 상상을 통해 문틈으로만 잠깐 들여다볼 수 있는 곳. 그마저도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깨닫게 된 계기가 있다. 작년, 나는 인생 24년 차가 되어서야 내가 ‘쥐났다’고 표현하는 상태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상태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다리가 ‘저린’ 상태 즉, 다리에 작은 알갱이가 우글거리는 듯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어서 바닥에 발을 대기가 겁나는 상태를 ‘쥐났다’고 표현하면서 24년을 살았다. 전혀 소통에 문제가 없었고, 그래서 난 ‘쥐났다’는 말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거나 뒤틀린 것처럼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라는 걸 작년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아니 다들 ‘쥐났다’는 말을 그렇게 쓰고 있었다니,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 이래서야 ‘담 걸렸다.’, ‘쑤신다’, ‘시리다.’ 같은 표현을 우리가 같은 뜻으로 쓰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전부터 종종 생각은 해봤지만, 이 경험 이후 더 자주 생각하게 된다. 내가 ‘초록색'이라 부르는 색이 상대방의 눈에는 내가 ‘노란색'이라 부르는 색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걸. 하지만 그 사람은 그 색을 초록색이라 불러왔을 테니 우리의 대화엔 막힘이 없을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다른 걸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수 있다는걸. 기묘하다. 아찔하다!
게다가 간접 경험을 통해서조차 접해보지 않은 세상은 잠깐 들여다볼 수도 없다. 문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였던가, 나는 ‘펀드매니저’나 ‘애널리스트’ 같은 직업명을 처음 들어봤다. 그전까진 그런 직업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이들이 보통 어떤 일을 하면서 일과 시간을 보내는지는 전혀 모른다. 기공사나 감정평가사 같은 직업에 대해서도 비교적 최근, 주변에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생기고서야 알게 됐다. 듣고 나면 그런 직업이 있을 게 당연한데,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조차 못 해본 거다. 여하튼, 있는 줄도 모르는 직업에 대해 검색해 찾아볼 수는 없으니, 나는 수많은 직업군에 대해서 문손잡이 한 번 잡아보지 못할 운명인 것이다.
또 어떤 삶은 대중 매체에 잘 노출되지 않아서 내가 노력해 찾아봐야 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개 식용 금지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니, 그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5년 전의 나에게 개 식용과 관련된 이해당사자는 누가 있을까요-하고 물어봤다면 난 개를 죽여 파는 사람과, 그를 사 먹는 사람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개 농장을 운영하는 농장 주인이 있고, 그들로부터 품종견을 공급받는 분양샵이 있으며, 품종견이나 식용견을 거래하는 경매소가 있고, 농장에 있는 강아지들의 미용을 도와주는 애견미용사가 그 사슬 안에 끼어 있다는 사실은 관련 서적 을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다. 그 외에도 지워지거나 무시되어 찾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수많은 삶이 있겠으나, 사실은 여기에 어떤 예시를 적는 게 조금은 조심스럽다. 나만 혼자 관심이 없어서 몰랐던 걸까 봐, 내가 여기에 어떤 예시를 드는 게 오히려 당사자들의 삶을 무시하는 꼴이 될까 봐. 관심 없었던 시간이 길었다. 아, 저기에도 문이 있었구나, 그 문 안에는 이런 삶이 있구나, 라는 사실을 여전히 알아가고 있을 뿐. 3
남이 사는 세계는 잘 보이지 않는 문으로 닫혀 있다. 그 문을 기어코 찾아 열고, 그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꽤 피곤하다. 그마저 내가 제대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는 세계인걸. 내게 너무 낯선 삶은 몇 번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고 쉽게 상상이 되지도 않는다. 드라마 작가, 소설 작가, 그리고 배우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한 세계를 창조해 내기 위해서는 이미 있는 세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공부해서 응용까지 가능해야 한다. 괜히 중학생, 고등학생이 적은 인터넷 소설 속 대학이 8교시를 하고 석식을 먹는 게 아니다. 모르는 세계니까. 그런 의미에서 요즘 나의 피드를 털어놓자면, 요즘 이상하게 <꽃보다 남자> 클립이 자꾸 뜬다. 지금 보면 아주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진창인 드라만데, 어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봤던 것 같다. 아, 고등학교는 원래 저런 곳이구나- 하고 지나갔었겠지, 난 고등학교가 어떤 곳인지는 전혀 몰랐으니까.
남의 세상 대문 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서 종종 그냥 문을 닫아놓고 오래 방치해 두기도 한다. 문제는 그 닫힌 문들이 나를 편협하게 만든다는 거다. 타인에게 공감하는 일에는 너무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세 발짝 떨어져서 ‘나라면 저렇게 안 해’ 말하는 건 쉽다. 그러니 어떡해. 끝없이 배우고 공부할밖에. 모든 사람이 나 같지 않고, 내 일인칭 시점의 삶을 사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거. 모두가 각자의 시선에서, 각자의 삶의 맥락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계속 기억하고 더 많은 세상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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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은 어그로성 제목이지만, 그냥 궁금했다. 예전에 ‘절대로 방심하지 말 것’이라는 제목으로 돌아다니는 쇼츠 4를 본 적이 있다. 어느 시상식에 참여한 듯 보이는 블랙핑크 지수가, 어깨에 플라스틱 물병을 세우기 위해 씨름하고 있는 영상. 뒤늦게 카메라가 자신을 찍고 있다는 걸 깨닫자 민망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는다. 영상에 댓글 하나가 뜬다. ‘월클도 뻘짓이라는 걸 하는구나…’. 사실 블랙핑크가 서로 장난치며 노는 영상을 몇 번 본 적이 있어서인지, 나이대가 나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서인지 지수가 뻘짓을 하는 건 크게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상대가 데본 아오키라면?
갑자기 데본 아오키가 등장하는 이유는 별 게 아니다. 어제저녁,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데본 아오키가 출연한 영화 의 한 장면 5이 내게 닿았을 뿐. 파란색 체크무늬가 그려진 로우라이즈 치마를 입고 걸어 들어와 시크하게 블랙커피를 주문하는 데본 아오키. 뾰로통한 부잣집 고양이 같은 모습을 몇 번 돌려보다가, 어느 사이트에서 그가 이제는 세 아이를 둔 40대 여성이라는 사실을 읽어 내리다가, 그럼에도 여전히 2004년도 영화 속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그의 최근 인스타그램 사진을 구경하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최연소 샤넬 뮤즈의 자리를 꿰찬, 나는 상상도 못 할 세계에 속해있는 데본 아오키도 자기 어깨에 물병을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적이 있을까?
그러니까 상상한다는 건 그런 거다. 나와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도 나와 비슷한 면이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일이자, 대충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는 듯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일. 이영지가 말했다. “인생은 ‘저 사람도 결국 나랑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와 ‘저 사람은 결국 나랑은 전혀 다른 인격체니 존중해야한다’의 연속 6"이라고. 오늘도 대문자 N은 무언가를 상상하다 잠든다. 이를테면, 데본 아오키도 뻘짓을 할까- 같은 무언가를.
- 2016년도에 발매된 악동뮤지션의 노래. 앨범 '사춘기 상(思春記 上)이라는 앨범의 타이틀곡이다. https://youtu.be/sbc2yBheAbo?si=gaATI_tZy3uJA43N [본문으로]
- 인스티즈에 올라온 게시물. 원본 주소는 다음과 같다.https://www.instiz.net/pt/4858727 [본문으로]
- 하재영 작가의 르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본인은 2018년 창비에서 출간된 버전을 읽었다. 지금은 2023년 7월, 출판사 잠비에서 출간한 개정증보판도 읽을 수 있다.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1129321 [본문으로]
- https://youtube.com/shorts/QVBSGU30NHM?si=It6kIDQSR9RssQP8 [본문으로]
- https://youtube.com/shorts/dMzC7Whn-rs?si=2RaVc48NwZB8AoK5 [본문으로]
- https://twitter.com/dokgodieinsaeng/status/145592112639202099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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