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함과 겸손 그 사이
에디터 / 바투
대구 출발 대전행 오후 4:57 열차를 타면, 저무는 해에 눈이 좀 부시긴 하지만 꽤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하던 일을 손에서 놓고 하염없이 창문을 바라보게 하는 마성의 매력을 가진 기차다. 눈이 부신 것을 피하기 위해 누군가는 커튼을 치겠지만,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이를 보다보면 나는 참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구나, 지구라는 곳은 참 신기할 정도로 예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는 겸손해진다. 이건 누구도 인공적으로 만들 수도 없앨 수도 없는, 그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아름다움이구나.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코랄 핑크’와 같은 색이 아닌 빨강과 주황, 분홍색 그 사이 어딘가의 참 묘하면서도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에 잠기게 하는 색에 매료된다. 햇빛에 눈을 찌푸려야 하는 불편함을 조금만 참다 보면 곧 산 아래로 자취를 감춘 해가 그 주변으로 뿜어내는 아름다운 빛깔만 오롯이 즐길 수 있다. 사방이 수채화다. 옆에 있는 그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절로 자아내진다.
여행을 위해 산다고 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여행이 없는 삶이란 과연 살 가치가 있는가 돌아보게 될만큼 여행은 내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어쩌면 출근하기 싫은 날에도 직장으로 향하는 까닭은, 조금만 버티면 여행을 갈 수 있다는 희망 내지 여행을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행을 계획하는 데에 있어 날짜나 장소 또한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아무리 계획을 좋아하고 그것에 자신이 있는 나로써도 컨트롤하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날씨다.
화창하고 쾌적한 날씨는 여행의 즐거움을 배로 만들어 주는 요소이지만, 궂은 날씨는 괜스레 하늘이 미워질 만큼 여행을 망친다. 작년 11월부터 계모임원들과 함께 제주도를 계획했었다. 들뜬 마음으로 여행 루트를 짜고 숙소를 계획하며 그날이 다가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셔라. 여행 시작 전날 갑작스레 닥친 대설 특보로 인해 제주 공항에서 출발하고 그리로 향하는 모든 비행편이 결항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설마, 내일 아침이 되면 괜찮겠지, 눈이 아주 많이 오지 않는 이상 내일은 비행기가 뜨겠지 하며 반신반의한 채 잠에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여전히 제주는 대설 특보였고, 이로 인해 몇몇 주요 도로가 통제되고 있다는 소식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청주 공항에서 출발하는 다른 두 친구의 비행기는 아침 일찍 일치감치 결항되었지만, 이상하게도 대구에서 출발하는 내 비행기 회사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그들도 나처럼 대설 특보가 해제되기만을 기다리며 마지막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일까, 생각하며 혹여나 나 혼자라도 가게 되면 무얼 하고 놀아야 할지 상상 속의 플랜비(?)까지 짜두긴 했다. 이런 상상에 잠기자 마자 결항 및 전액 환불 카톡이 왔다. 십분이나마 부푼 상상에 행복했던 것이 그저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나야 공항과 집이 가까워 아직은 풀지 못한 짐을 문앞에 세워만 두었지만, 친구들은 이미 2박 3일 짐이 담긴 캐리어를 끌고 한 시간 남짓 걸려 공항에 온 상황이었다. 이렇게 아무리 날고 기는 인간이라 하더라도 비와 눈, 자연 재해 앞에서는 무력해지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재벌이라 하더라도 그당시 대설 특보를 뚫고 제주 여행을 갈 수 있었겠는가.
출발도 하기 전에 손도 써보지 못한 채 여행이 어그러진 상황만큼 좌절감이 드는 경우가 또 있으랴.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며 의지를 보인 친구들은 대구로 오고 싶다했고, 우리는 제주 여행만큼 행복하고 즐거운 대구 여행을 즉흥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웃음이 끊기는 순간 없이 행복했다. 장소보다, 날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짐을 꾸려온 그들이 집으로의 복귀를 선택하지 않고 어디든 떠나자 했던 것처럼, 나또한 겨울 제주 여행에 미련이 남아있었다. 작년 11월 주말에 짧게 다녀온 한라산 등반에서 말끔한 백록담을 보았던 것이 새삼 신기하고 감사해졌다.
수수료와 위약금을 걱정하던 우리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대설특보로 인해 비행기가 결항된 경우 그 모든 것이 전액 환불이었다. 놀라웠다. 한 푼도 손해보지 않고 마치 여행을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설특보가 꽤나 익숙한 듯 모든 환불 절차가 순조로웠다. 오히려 우리만 호들갑을 떨고, 제주에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침착하고 태연했다. 태연함을 넘어선 자연 앞에서의 겸손함처럼 느껴졌다. 오두방정을 떨며 놀랐던 우리의 생각이 좀 짧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륙에 사는 우리와 달리 그들은 자연의 거대한 힘을 얼마나 더 많이 느끼면서 그 앞에서 무력감과 겸손함을 느끼고 살았는지 막연히 느껴졌다. 기술과 과학의 힘을 등에 업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인류를 대표하여 자신감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날씨 앞에 이렇게 겸손해지면서 한편으로는 이 날씨와 기후 변화가 결국 여행뿐만 아니라 더 많은 부분에서 제약을 걸 것이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제주도의 사람들이 대설 특보, 안개, 풍랑특보 등에 초연해지는 일상이 이제는 바다 건너 내륙으로도 점차 오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서 집 앞에 나가는 일상이 망가질 수도 있을 것이고, 나와 같은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낙에 그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업에 관련된 중요한 일일 수도 있는 여행에도 자연이 미치는 영향이 점차 커질 것이다. 기후 위기를 넘어선 기후 재앙을 걱정해야 하는 무수히 많은 이유 중 한 가지가 또 늘어난 셈이다.
여행이 취소되었을 때에는 무력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면서 곧 겸손해졌다. 그 겸손함마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까지 가지 않도록 지금부터라도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지 하는 생각, 그래,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다 하는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또 다시 즐거운 다른 여행을 위해 힘을 냈다. 무력함과 겸손 그 사이의 감정을 느낀 겨울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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