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의 미쟝센
에디터 / 망
환경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은 정말 대단하다. 사람은 살아가는 환경에 영향을 받으니 어쩔 수 없다지만 인간은 점차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며 그 어쩔 수 없음에 지배당하고 싶지 않아 환경을 개발하고 지배하려고까지 했다. 강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생기고 바다가 육지가 되기도 한다. 또한, 산림이 평지로 변신하고 평지에서 키운 소들이 우리에게 혓바닥의 행복을 주는 햄버거로 둔갑한다. 물리적 환경을 인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는 것에는 수준 이상의 성취를 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육지나 바다처럼 날씨마저도 지배하고 인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종하고 싶다는 생각이 신박한 주제는 아닐 것이다. 현실에서 구현하고 있지 못할 뿐 다양한 창작 작품에서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날씨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작품이 아마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날씨의 아이>일 것이다. 작중에는 날씨를 마음대로 다루는 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고 실험의 일환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라이트 형제의 무모한 도전과 닐 암스트롱의 위대한 인류의 첫 발걸음 외에는 딱히 인간이 지배(?)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저 하늘만이,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바꿔 말해, 날씨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은 정말 대단하다. 런던은 대부분의 날씨가 흐려 볕이 드는 날에는 너도 나도 광합성 산책을 하러 나온다든가, 스페인은 시종일관 날씨가 푹푹 쪄 일의 효율이 떨어질 정도라서 낮잠 자는 문화가 있다든가 하다.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제 인생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다지만 내일 일기예보가 어떻느냐에 따라 나의 외출 일정이 바뀌기도 하고 기분이 변하기도 한다. 정녕 인간은 스스로를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인류는 <날씨의 아이>같은 작품을 만들고 공감할 정도로 날씨에 대한 지배욕이 있는 동시에 날씨가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것 또한 인정했기에, 날씨는 미장센으로 활용된다. 작품 속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어쩐지 주인공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고, 궂은 일만 일어나던 등장인물에게 해가 쨍하니 내리쬐는 연출이 나오면 위기를 극복했다는 암시로 여겨진다. 눈 내리는 날은 상황에 따라 순수나 이별, 또는 동시에 그리웠던 사람과의 재회, 낭만적인 상황으로 그려진다. 단지 예수가 12월 경에 태어났고, 그래서 크리스마스라는 문화가 생겼고, 하필 그게 겨울이라서 겨울에만 경험할 수 있는 날씨가 눈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증발 작용으로 구름이 되었던 물방울이 고이다 못해 무거워 중력의 힘으로 떨어지려는데 너무 추운 영하의 기온이 그 물방울을 결정으로 만들었을 뿐인 그 단순한 과학적 사실에 인류는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어쩌면 이게, 우리가 단순히 날씨에 의해서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변덕쟁이인 게 아니라 날씨를 보고서도 문학적 감수성을 부여하는 주체적 실존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럼 이쯤에서 질문한다. 당신은 날씨에 의해 영향 받고, 날씨에 의해 변화하고 움직이는가? 인류의 주체성에 대해 다루고 나서 이런 질문을 곧바로 던지자니 의식의 흐름에 따라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는 날씨 영향 별로 안 받는데?’라며 주체적인 답변으로 톡 소리 나게 응수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부끄러울 일 없도록 먼저 말하자면 나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수족냉증이 있다. 그래서 추운 날씨는 쥐약이다. 손발이 굳어 잘 움직이지 않으니 거동의 초입부터 말썽이다. 펜을 많이 쥐어야 하는 학생일 때는 공부하는 것도 힘들었다. (학교라는 곳은 필시 초자연적 현상에 휘말려 같은 고지대의 다른 공간보다 10도 차이 나는 게 틀림없다. 학교가 추운 것은 과학적으로도 증명 불가능하다. 만약 증명 가능하다면 그야말로 노벨상 감이다.) 하지만 단순히 추운 것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평생을 뭐, 따듯한 손발로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가져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나는 손발이 차가운 게 그냥 디폴트인 사람이고 추운 날씨에 손을 주머니에 넣어놓지 않아도 따듯한 사람이 부럽기야 하지만 그게 무슨 느낌인지를 모르니 부러움에도 한계가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미 누리던 것에 대해 박탈당한 경험이 있다면 빼앗긴 것을 당연시 여기던 과거가 그리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이유로 난 정말로 추운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게 맞다.
주제에서 좀 넓어지긴 하지만 추운 날씨라 함은 겨울이라는 계절감을 상징한다. 겨울은 수능뿐만 아니라 많은 시험들이 몰려 있고, 다음해의 봄이 오기 전에 취직하길 원하는 이들이 서슬 퍼런 낯을 띄고 견뎌내는 계절이기도 하다. 앞선 꼭지에서 겨울에는 크리스마스가 있어 낭만성이 된다고도 했지만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이걸 또 어떻게 치울까, 도로를 다니는 중에 차가 밀리지는 않을까 걱정할 때부터 어른이 되었다고 하던데, 이젠 아니라고 빈말로라도 거짓말 못할 때가 되었다. 내가 겪은 수많은 날씨들이 곧 나의 경험이 되어 내가 나이 먹어감에 따라 새로울 게 없는 일상적인 것임과 동시에 그간 쌓인 데이터 베이스로도 작용해 매일의 내 기분을 결정하는, 나의 주체성을 빼앗는 외부 요인이 되기도 한다.
밍기적이 지향하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큰 주제는 날씨에 끌려가기만 하는 인간 군상을 지향하지 않는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날씨가 미쟝센으로 쓰이기도 한다는 이야기로 돌아가고 싶다. 눈을 보고도 더 이상 낭만을 즐기지 못하는 낡은 영혼이 되었다면 차라리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보다 삶에 대한 고민이 많고, 중2병을 핑계로 산다는 건 무엇인가를 질문했던 그 순수의 시절로.
애니메이션 <날씨의 아이>를 언급해서 말인데, 내가 초등학생일 땐 일본 만화 <가정교사 히트맨 REBORN>이라는 게 유행했다. 작품 속엔 주인공을 돕는 수호자 인물들이 나오는데 주인공이 하늘을 상징한다면 수호자 여섯은 각각 날씨를 상징하고 그 날씨와 관련된 힘을 쓸 수 있었다. 폭풍, 태풍을 상징하는 수호자는 다혈질 캐릭터고 비를 상징하는 수호자는 차분하고 유들유들한 기질을 지녔으며 안개의 수호자는 환각술사고 번개의 수호자는 전기로 공격을 하고 구름의 수호자는 유유자적 한다든가.. 뭐 그랬다. 유치찬란한 것 같지만 어릴 때는 파워레인저부터 시작해서 색깔로 인물들의 성격의 규정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다 커서 잊은 그 시절 흠뻑 빠졌던 날씨 역할 놀이였지만 이것이 다시금 우리 삶이 되면 어떨까.
애초에 그 유치한, 날씨로 수호자의 성격을 정하는 분류법도 이미 다 큰 성인이 지어낸 것이고 <날씨의 아이>도 성인이 상상한 것이며 영화나 드라마에서 쓰이는 각종 날씨의 미장센도 성인이 쓰는 시나리오다. 우리라고 매일의 삶을 창작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내일 일기 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하여 ‘우산 들고 다니면 손 하나가 꼼짝없이 묶여 있겠네’라고 생각하기보다 “그럼 내일의 나는 물 흐르듯 흘러가는 유들유들한 성향의 내가 되어 볼까? ^^”라고 선언해 보는 것이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 나도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성인이 아이로 회귀한다는 건 으레 다 역 성장통을 겪어야 하는 일인가 보다. 우리가 날씨를 지배하는 데에 실패했고, 실은 환경을 지배한다는 말조차 이제는 ESG에 역행하는 것인지라 그렇다면 날씨가 우리를 변화하게 만드는데 조금의 유쾌함과 재치를 더하면 어떨까. 비가 와서 우울해 하고 해가 떠서 기뻐하기보다, 매일의 날씨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는다면 다시 눈 내리는 날로부터 낭만을 느끼고 어린 시절의 순수의 세포가 깨어나는 때가 오리라. 날씨의 미쟝센은 단지 창작품에서만 있기를. 비온 뒤 날이 개어야만 행복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비 오는 그 자체만으로 행복이 될 수 있기를, <비긴 어게인> 속 비오는 날의 장면이 그래서 날씨 연출의 클리셰를 깨부수고 오래도록 회자되는 모습이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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