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날씨는 빨강
에디터 / 연푸른
이사를 했다. 원래 살던 곳에서 지하철로 세 정거장쯤 이동하면 나오는 나의 새로운 집은 이곳저곳 낡은 티가 나고 맘에 안차는 구석이 많다. 그럼에도 이 집을 고른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그 모든 것을 이해해줄 수 있을만큼 넉넉한 사이즈다. 게다가 이 집에는 자취방에선 퍽 보기 힘든 공간이 하나 있는데, 바로 베란다다. 그리고 나는 베란다가 있는 집에 살게 되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바로 바로, 베란다 텃밭을 만드는 것!
대구에 있는 나의 본가에도 텃밭 두 조각이 있다. 아파트 1층에 딸린 작은 공간. 고기를 구워 먹는 날에는 빨간색 바구니를 들고나가 고추, 피망, 상추, 깻잎과 오이를 따서 돌아왔다. 이제야 조금씩 붉은 빛을 띠기 시작한 아기 방울토마토 몇 개를 따는 날도 있었다. 금방 딴 방울토마토를 바로 헹궈 먹으면 미지근한 과즙이 입 안을 채웠다. 풍족하고 따뜻하고 새콤한 물. 그 기억 때문인지 서울에 올라와 자취를 하게 된 후에도 ‘충분한 공간이 생기면 쌈채소 정도는 직접 길러 먹어야지’ 하는 다짐을 하곤 했다. 식물이 잔뜩 자라는 텃밭을 바라보는 건 두꺼운 지갑을 들고 마트 채소칸을 바라보는 것 만큼이나 풍족한 일이다. 그리고 상경 7년만에 이제는 나에게도 기회가 생겼다!
당장 온라인에서 씨앗을 주문했다. 내가 주문한 씨앗은 모듬 상추와 유러피안 모듬 샐러드, 스위트 바질 씨앗이다. 아직은 날씨가 추우니 방 안에서 씨앗을 발아시키고, 조금 더 날이 풀리면 흙으로 옮겨 베란다에서 기를 생각이다. 이 아이들은 물을 축축히 뿌린 키친 타월 위에 올려둔 지 단 하루만에 뿌리를 내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4일이 지난 지금은 새끼손가락 반마디 길이의 줄기를 키워내곤 연두빛 떡잎을 내밀기 위해 분투하는 중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집이 꽤 춥다는 것과, 씨를 뿌린 이후부터 글을 쓰고 있는 오늘까지 거의 일주일 내내 흐린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햇빛이 충분히 들지 않으면 식물들은 웃자라기 마련이고 한 번 웃자란 아이들은 다시 햇빛을 쬐어준다고 압축되지도 않는다(당연하다). 그리고 사실 이녀석들, 이미 웃자라기 시작한 것 같다. 그래서 얼마전부터는 내일은 부디 햇빛이 쨍쨍 내리쬐게 해주세요- 기도하며 잠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오늘의 광량과 기온을 확인하며, 오늘은 이 녀석들을 어디에 올려둬야 그나마 햇빛을 잘 받을 수 있을지, 얼마나 창가 가까운 곳에 둬야 햇빛은 받되 냉해는 입지 않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이렇게 매일의 날씨를 신경쓰는 건 실내형 인간인 나에게는 퍽 낯선 일이다. 현대인 중에 실내형 인간이 아닌 사람이 뭐 얼마나 있겠냐만은, 나는 일년에 많아야 너댓 번 정도 일기예보를 확인할만큼 날씨에 무관심한 인간이다. 전에 살던 집에선 아예 창문에 암막 스티커를 붙여버려서 바깥 날씨를 전혀 모르고도 지낼 수 있었다. 그런 내가 날씨를 신경쓰는 몇 안되는 이유가 이런 거다 - 오늘의 날씨가 나의 반려 식물들에게 좋은 날씨일지 아닐지를 신경쓰는 것 말이다.
어떤 날씨든 그냥저냥 살아가는 대로 살 수 있는 나와 달리, 식물은 날씨와 함께 변한다. 줄기의 색이, 잎의 통통함이, 꽃의 개화 시기와 빈도가 변한다. 대부분의 식물은 광량이 풍부하면 더 짙은 녹색의 잎을 가지게 되지만, 어떤 식물은 햇빛을 더 많이 받을수록 흰색이나 붉은 빛의 잎을 키워낸다. 나는 식물을 통해 날씨를 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신경쓰는 날씨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의 햇빛 정도다. 오늘 서울 동작구의 날씨보다 오늘 우리집 창문의 날씨가 내겐 더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은 춥고 어두운 우리 집에서 새로운 씨앗들도, 원래 잘 자라던 다육들도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결심을 했다! 식물등을 샀다!! 식물등은 식물이 성장에 사용하는 파장의 빛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실내에서도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명이다. 요즘에는 식물이 다양한 파장의 빛을 모두 사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자연광에 가까운 백색광을 많이 쓰지만, 그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붉은빛과 푸른빛의 파장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고 하여 그 두 색만을 이용한 식물등이 많았다. 내가 구매한 중국산 식물등도 그런 모델이라, 붉은색과 약간의 푸른색이 섞인 자주빛 빛을 내뿜을 예정이다.
아직은 식물등이 배송되지 않았지만, 식물등이 오면 이제 매일 아침에 일어나 오늘의 하늘을 살필 이유가 없어진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해야할 일은 식물등의 조명을 키는 것 뿐. 밖의 날씨와 상관없이 우리집 날씨를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홀가분한 마음과 함께, 이제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매일의 날씨를 체크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사라진다는 묘한 아쉬움을 동시에 느낀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쉬움보단 홀가분한 마음이 더 크다. 우리 애들 웃자라면 안되니까, 빨리 식물등이 왔으면 좋겠다! 이 글을 쓰면서 작은키 방울토마토와 깻잎 씨앗을 추가로 주문했다. 자주빛 조명 아래에서 더 빨갛게 익어갈 방울토마토가 보고 싶다. 일기예보는 필요없다. 식물등을 키면, 언제나 우리집 날씨는 빨강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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