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D-6
4:00 AM
겨울이 막 지나가는 어느 날의 새벽. 이따금 새벽 공기를 깨우는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집에 돌아가지 못한 자들의 마지막 보금자리였던 낡은 술집마저 이제는 영업을 끝낸 옅은 남색의 도시. 술집이 즐비한 길가에서 두블럭 떨어진 한적한 골목에 불 켜진 방 하나가 있다.
형광등의 핏기 없는 불빛 아래, 여자는 여전히 깨어 있다. 토독토독- 최근 구매한 듯 매끈한 모습의 보랏빛 적축 키보드 소음만이 방 안을 채웠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다가 이내 정적. 신경질적인 마우스 스크롤 소리. 여자는 턱을 괴고 건조한 눈을 깜빡이며 컴퓨터 화면을 바라본다. 끝없이 이어지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 흰 바탕에 검은 글씨, 흰 바탕에 검은 글씨. 여자는 어딘지 맘에 들지 않는 듯 마우스를 몇 번 딸각거리더니 흰 바탕에 검은 글씨를 회색 바탕에 흰 글씨로, 남색 바탕에 하늘색 글씨로 바꿔도 본다. 다시 정적. 그리곤 한숨 소리. 여자는 조용히 노트북을 덮는다.
여자의 노트북 옆에는 X표시가 빼곡히 들어찬 탁상 달력이 놓여있다. 여자는 달력을 들어 오늘 날짜 - 아니, 사실은 어제 날짜다 - 에 크게 X표시를 친다. 가벼운 기지개. 불이 꺼진다.
2.
끼이익-
낡은 문이 천천히 열리고, 지저분한 마녀의 작업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빼곡히 채운 유리병에는 잔뜩 휘갈겨 쓴 라벨이 꼼꼼하게, 그러나 결코 깔끔하지 않은 모습으로 덕지덕지 붙어있다. 진흙에 재운 개구리 뒷다리, 발효시킨 참나무 수액, 부엉이 눈알부터 그 구하기 힘들다는 와일드하워의 잿빛 꼬리털과 황금 거미줄까지. 지난 몇 년간 책에서나 겨우 볼 수 있었던 재료를 눈 앞에 둔 엘로지의 큰 눈이 흥분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직 중급 약초학도 덜 배운 애송이와 같이 일을 하라니, 그리멜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건지…”
그런 엘로지를 본 벨라드론이 샛노란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말했다.
“찬장은 건드리지마. 너 같은 애가 대충 건드렸다가 재료들이 섞이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걱정마세요, 학년이 낮아서 그렇지 저 고급약물학까지 선행한 인재라구요. 페어린드에서 약물학은 늘 제가 1등이었어요. 그러니까, 찬장 청소 정도는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자존심이 상한 엘로지의 대답에도 벨라드론은 콧웃음을 칠 뿐이었다.
“아 그래, 그러시겠죠 모범생 아가씨. 그래봤자 D급 영약을 만들어본게 다겠지만. 그것도 그 늙은 마녀가 미리 다듬어놓은 재료를 그냥 섞기만 했겠지.”
하, 쟤가 원래 저렇게 건방진 녀석이었나? 키득키득 웃으며 비아냥거리는 벨라드론의 모습에 엘로지의 붉은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벨라드론은 모를 것이다. 엘로지가 영생의 영약을 시험하던 중 영약의 부작용으로 어려지고만 벨라드론의 스승, 메릴이라는 건. 내가 스승일 땐 착하고 깍듯한 제자였는데, 뒤에선 날 ‘늙은 마녀’라고 불렀단 말이지..? 진작에 알아봤어야 했는데. 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넌 당장 퇴출이다, 이자식아. 엘로지는 처음보는 제자의 본 모습에 속으로 욕을 삼켰다.
하지만 벨라드론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작업실은 기대이상이었다. 역시 내 제자라 그런지 재료 수급은 잘 하고 있군. 엘로지는 생각했다. 어려진 후로는 고급 재료에 접근하기 힘들어 영약을 해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라면 해독제를 개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화살요정의 뿔을 해독하려면 청룡의 뿔가루가 필요할 것 같은데... 찬장을 보는 엘로지의 머릿속에 온갖 수식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바삐 계산을 이어가는 엘로지는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벨라드론의 묘한 눈빛은 미쳐 알아차리지 못했다.
3.
D-5
1:18 PM
몇 번의 알람 소리를 무시하고 이불 속을 뒹굴던 여자는 오후가 되어서야 간신히 눈을 떴다. 좀 더 일찍 일어나서 글을 썼어야 했는데. 그래도 오늘 안에 5화까진 완성할 수 있겠지. 그리고 내일부터 하루에 한 화씩 쓰면… 딱 맞게 제출하겠다. 그래, 아직 오늘이 열 시간은 더 남았으니까. 덕지덕지 붙은 눈꺼풀을 떼어내며 여자는 일주일 안에 원고를 완성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하루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올해로 3년. 처음 시작했을 땐 3년 후면 어디선가 정식 연재를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 길을 너무 쉽게봤지 내가. 여자가 생각했다. 웹소설 아카데미를 다니고, 자유 연재 사이트에 몇 차례 글을 올려도 봤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늘 미미했다. 내 글이 그렇게 재미없진 않은데. 차라리 좀 더 인기있는 장르로 써볼까? 그런 생각에 동양풍 판타지부터 무협지, 학원물과 요즘 유행한다는 회귀물까지 온갖 장르를 기웃거린지가 벌써, 3년.
‘좀 더 접근성 높은 방식이 필요해’
여자는 생각했다. 그래, 모든 작품이 독자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여자는 초조해지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찾은게 이번 공모전이었다. 대형 포털사이트에서 진행하는 이번 공모전에만 선정되면 포털 연재는 물론 웹소설 메인 페이지에 광고 배너까지 띄어준다고 했다. 제작년에 이 공모전에서 선정된 작품은 이미 웹툰화가 됐고, 이제는 드라마 계약까지 맺은 상태다.
이름이 뭐였더라. 여자는 그 작품을 쓴 작가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작품이 그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데뷔작부터 엄청난 성공을 거둔 거물 작가가 됐고, 지금은 같은 포털에서 두 개의 소설을 동시에 연재하고 있다.
그리고 여자는 그 작품이 처음 자유 연재 사이트에 업로드 됐을 때부터 봐온 독자였다.
‘나도 이정도는 쓰겠는데?’
클리셰 가득한 회귀물.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귀족 출신 여주인공이 어린 시절로 돌아와 자신을 죽인 모든 이들에게 복수하고 황태자와 결혼하는 내용의 흔하디 흔한 소설. 캐리터가 매력적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특별한 인물은 아니었고, 중간중간 느린 전개와 설정오류로 독자들의 비판도 들었던 작품이다.
‘그래도 내가 단 댓글 덕분에 정신 차렸으니 이렇게까지 성공할 수 있었던 거지’
그 작품에 달린 수많은 댓글 중에는 여자가 단 댓글도 있었다. 사실, 여자의 댓글은 자주 베스트 댓글이 되곤 했고, 그 아래엔 으레 그런 대댓글이 달렸다. ‘본문보다 이 댓글이 더 존잼인 듯’, ‘이 분 작품 분석하시는 거 보면 분명 글 쓰는 분임. 블로그 같은거 안하세요??’ 여자의 건조한 입술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래 내가 각잡고 쓰면 이것보다 더 좋은 작품도 쓸 수 있어. 아직 내 글은 독자를 많이 못만났을 뿐이야. 이것이 여자가 공모전을 준비하는 이유였다.
공모전에는 10화분량의 글을 제출해야 했다. 사실 여자는 그만큼 연재를 이어가본 적이 없었다. 5화 정도를 연재한 후에도 독자 반응이 없으면 그녀의 의지도 일주일간 물을 주지 않은 해바라기처럼 시들해지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 공모전엔 반드시 붙을거니까.
이런저런 구상과 펼쳐질 미래를 상상하며 잠시 누워있던 여자는 세 시가 다 되어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성공한 사람들의 필수 습관이라는 이불 정리와 짧은 스트레칭 후, 여자는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 5화까지 완성하고, 내일부터 하루에 한 화씩. 완벽한 계획이었다.
4.
황홀한 달빛이 신천성(新天城)의 골목길을 은은하게 밝혔다. 구경꾼의 웅성거림 속에 백강과 류석만이 서로의 눈을 고요히 마주하고 있었다.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침묵이 쟃빛 골목을 뒤덮자, 둘은 물론 거리를 지나치는 행인조차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서슬퍼런 검기와 팽팽한 긴장감에 공기조차 전율하는 듯 했다.
류석은 희끗한 머리카락을 가진 거구의 사내로, 신천성 상인거리의 암묵적인 지배자였다. 몇 십년 전 몰락한 현월(玄月)가의 마지막 핏줄이라더라, 아니 그 가문의 호위무사였다더라 – 그를 둘러싼 소문 중에 평범한 내용은 단 하나도 없었다. 반면 옆 마을에서 온 백강을 아는 사람은 전무했다. 이방인에게 적대적인 신천성에서 그는 하루가 멀다하고 시비에 휘말리곤 했다. 지겨운 따돌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 류석과 결투하고 지더라도 검사로서의 명예를 인정받는 것 밖에는 없었다.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백강이었지만 살아남아야한다는 열망에 그의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리다고 봐줘선 안되겠군.’
류석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흥분시키기 위해 말을 이었다.
“너는 뭐지? 아직 어린 것 같은데, 주제에 나와 결투를 신청하는 건가?”
류석의 차가운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퍼져나갔다.
“새로 이주했으면 조용히 사는게 좋았을텐데. 네 무모함을 탓해라.”
백강은 부동의 자세로 침묵을 지켰다. 한차례 돌풍이 둘의 사이를 지나가고, 서로 짜기라도 한 듯 둘은 동시에 서로에게 돌진했다. 먼저 공격을 가한 것은 백강이었다. 백강의 검이 바람처럼 빠르게 류석의 어깨를 스쳤다.
‘뭐야, 빠르잖아?’ 류석이 공격을 피하며 생각했다.
‘이렇게 어린 실력자가 있다고는 듣지 못했는데. 어디서 온 녀석이지?’
이어 둘의 검이 가슴앞에서 부딪혔다. 물러서지 않는 서로의 에너지가 찌르르- 두 사람의 검을 울렸다. 류석이 백강의 다리와 복부를 공격했지만 백강은 이를 물흐르듯 피하며 류석의 가슴을 노렸다. 예상치 못한 접전에 관중들 사이에서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구름이 달을 가리고 은은한 불빛마저 잦아든 순간, 백강의 검에서 푸른빛의 검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느낀 류석이 미쳐 방어태세를 취하기도 전, 백강의 검기가 류석의 검을 가르고 류석의 가슴을 벴다. 당황하여 뒷걸음치는 류석의 목에 곧 백강의 검이 붉은 선을 그었다. 쓰러진 류석을 무릎으로 누른 백강이 말했다.
“방금 당신, 죽은 거예요.”
무거운 정적이 골목을 채웠다.
“그래, 그렇군. 네가 이겼다.”
류석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손에서 검을 놓자, 그제야 가쁜 숨을 뱉어낸 백강도 검을 회수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멍하니 서있던 관중들 사이에서 조금씩 환호와 감탄의 박수가 흘러나왔다. 거리의 새로운 지배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5.
D-4
9:20 AM
여자는 오랜만에 일찍 눈을 떴다. 오늘 저녁엔 친구와의 약속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게 몇 년 만인지. 한때는 늘 붙어다니던 친구였지만 취직한 이후론 일년에 한 번 얼굴 보기도 쉽지 않았다.
‘보험계리사라고 했었지.’
분명 함께 경제학을 전공하고 같이 졸업했는데 여자는 보험계리사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직업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잠깐 쓰던 글을 멈추고 인터넷에 보험계리사를 검색하자 ‘보험계리사 하는 일과 연봉’같은 제목의 블로그 글이 주르륵 화면을 채웠다. 없어서 못 뽑는 직군, 금융권 답게 높은 연봉, 수학 및 통계 전문직 중 끝판왕. 그래, 걘 옛날부터 똑똑한 애였으니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를 토막난 정보를 읽으며 여자는 생각했다.
나도 뭔가, 이런 일을 했어야 했나. 나도 꾸준히 공부를 계속했으면 전공 살려서 뭐라도 할 수 있었을텐데. 그럼 지금쯤 낮에는 직장 다니고 저녁에는 글 쓰면서.. 지금보다 안정적으로 살 수 있었을거야. 여자의 머릿속에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가 스쳐지나갔다. 안온하고 지루하던 강의실의 풍경, 결코 정이 가지 않던 전공서적 몇 페이지. 아니야, 나랑은 안맞았을거야. 걔니까 한거지. 생각하지 말자. 여자는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기가 필요한 타이밍이었다.
6.
7:00 PM
야, 오랜만이다.
얼마만이지? 일 년? 이 년?
우리 그때 회 한 번 같이 먹었잖아.
그게 마지막이야? 재작년인 것 같은데.
그래? 시간 빠르네.
요즘 뭐하고 살아?
뭐 똑같지. 요즘은 공모전 준비하고 있고. 작년이랑 똑같애. 너는 회사 다닌지 얼마나 됐더라, 이제 한 일 년 됐나?
응.. 이제 일 년 거의 다 되가네. 작년 4월에 들어왔으니까.
지낼만은 하고?
그냥 그렇지 뭐. 그만 두고 싶다.
그래도 돈은 많이 벌잖아.
그런가. 근데 별로 재미는 없어.
누가 일을 재미보고 하냐. 돈 벌려고 하는거지.
니가 그런 말 하니까 진짜 이상하네. 제일 재미 찾아가고 있으면서.
...
나는 네가 진짜 대단한 것 같아. 나는 지금도 내가 뭐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거든. 흘러가는 대로 가다보니까 여기 취직하긴 했지만... 네가 갑자기 작가 되겠다고 했을 때, 나 사실 좀 놀랐어.
...뭐가 돼야 대단한거지.
그 결정 자체가 어려우니까.
그래 뭐. 고맙다, 그래.
요즘은 뭐 쓰고 있는 거 있고?
그냥 평범한.. 학원물.
나중에 웹드라마로 만들면 되겠네. 아, 내년에 그거 드라마 나온다던데, 네가 옛날에 추천해준.
그렇다더라.
너도 나중에 드라마 찍으면 나 불러. 내가 좋아하는 배우, 알지? 걔 섭외해줘.
그게 내맘대로 되냐?
아니 뭐 원작잔데 의견이야 말할 수 있겠지. 성공하면 친구비용 한 번에 주는 거 잊지 말고.
진짜 어이없네.
대신 오늘은 내가 산다.
나 돈 있거든.
알아 알아. 그냥 미래의 김은숙 작가님께 투자하는거야.
김은숙은 무슨.... 뭐, 그러시겠다면야 거절은 절대 안하지. ...잘먹을게, 고맙다.
고마워 하십시오.
아 예, 예.
7.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눌러 쓴 후드를 걷자, 풍성한 붉은빛 머리카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가 귀찮다는 듯 가벼운 고갯짓으로 머리를 털어내자, 익숙한 얼굴를 알아본 일부 대신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저 분은... 카밀라 황녀?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죽은 게 아니었다는 말입니까?’
‘젠장... 황녀가 살아 돌아왔으니 우리 가문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쉿, 조용히 하시오, 백작. 이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오.’
놀라움과 반가움, 카밀라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는 목소리까지. 모두 카밀라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카밀라는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황제와 그녀의 친구들, 그녀의 기사들의 눈을 차례차례 마주했다. 죽은 줄 알았던 딸의 귀환에 황제의 깊은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게 보였다. 그녀를 알아보자마자 오열하기 시작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카밀라 역시 울컥하는 감정을 숨기기가 힘들었다.
“제국의 황제에게 인사 올립니다. 다녀왔습니다, 폐하.”
“딸아, 드디어 네가 돌아왔구나. 도대체 어떻게... 이제야... ”
울먹이는 목소리를 숨기고 카밀라가 인사를 올리자 황제는 벅찬 목소리로 그녀를 환영했다. 말을 잇지조차 못하는 처음 보는 황제의 감정적인 모습에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카밀라가 큼- 목소리를 정돈하고는 말을 이었다.
“마수 습격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흑마법사 무리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죽임 당했지만... 다행히 실마리를 찾아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카밀라의 이야기는 그곳에 있는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습격 사건의 배후가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카밀라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베네릭 백작과 눈을 마주쳤다.
“제가 죽지 않아 아쉬움이 크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백작?”
모두의 시선이 초록빛 머리를 가진 남자에게로 쏠렸다. 백작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모함이라고 주장했지만 카밀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시종을 불러 밖에 대기 중인 누군가를 데려오라 했을 뿐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카밀라가 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카밀라의 시선 끝에는 아란테 공작이 있었다. 침착해보이지만, 공작의 눈빛에 들어찬 형형한 살기를 카밀라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팡이를 쥔 공작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게 보였다. 카밀라가 미소지었다.
‘기다리십시오 공작, 곧 당신이 있는 곳까지 닿을테니까.’
이젠 이 싸움을 매듭지을 때가 됐지. 카밀라는 황제에게 한 발을 더 내딛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제를 배신하고 황녀를 암살하고자 했던, 아란테 공작가 몰락의 시발점이 될 이야기를.
8.
D-3
11:52 PM
어제와 똑같은 책상, 똑같은 형광등 아래 여자는 미동도 없이 앉아있다.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눈에는 초점이 없다. 그렇게 몇 분을 멍하게 앉아있었을까, 여자는 눈을 꼭 감고는 고개를 품속에 파묻는다. 그렇게 다시 몇 분, 몇 십분의 시간이 흐른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여자의 눈가는 어쩐지 평소보다 붉다. 갈 곳을 잃은 듯 보이는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고는 조금 더 내려와 눈을 가린다. 그리고는 또 정적.
사실 여자는 이런 순간이 익숙하다. 모든 것들이 구려보이는 순간, 모든 선택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는 순간. 늘 이 즈음이다. 레포트를 제출하기 4시간 쯤 전, 졸업 논문의 마지막 대여섯 페이지를 앞두고 있을 즈음, 10화까지 써야할 웹소설의 8화를 써내려갈 즈음. 아득하던 도착점이 이제는 눈앞에 보이고, 내 선택의 결말이 이제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는 80%의 순간. 모두가 더 힘을 내어 달려나가는 이 순간을 여자는 견디기 힘들었다. 여자는 늘 이 순간에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곤 했다. 지금까지 달려온 80%를 의심하면서.
‘이번에도 안될 것 같아.’
여자가 생각한다.
‘학원물을 선택하면 안됐던 것 같아. 임팩트가 없어. 매력적인 설정도 못 보여주고.’
여자가 생각한다.
‘예전에 쓴 무협지를 고쳐서 냈어야 했나. 그 전에 쓴 판타지 소설도 괜찮았는데.’
여자가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그걸 가져와서 좀 고쳐볼까. 전에 4화까지 쓰고 구상도 해뒀으니까...’
여자가 고개를 든다. 키패드 대신 마우스를 쥐고는 온갖 파일 사이를 뒤적이며 여자가 예전에 썼던 소설을 찾아 읽는다. 옛 작품을 읽는 그녀의 얼굴에 뿌듯함인지 씁쓸함인지, 답답함인지 모를 표정이 스쳤다 사라진다. 차라리 장르 하나를 제대로 팠었더라면, 세계관 하나라도 디테일하게 만들어 뒀더라면. 나 원래 판타지에 강점이 있지 않았던가. 아니야 경쟁률은 현대물이 더 낮을 거야.
그렇게 여자는 한참 이 폴더 저 폴더를 맴돌았다. 거기에 뭔가 더 나은 답이 있을 것처럼, 여자는 새로운 가능성의 흔적을 찾아 집착적으로 이 파일 저 파일을 눌러대기 시작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자들이 타르처럼 끈적하게 여자를 붙잡았다. 80%의 자리는 늘 중독적이었고, 여자는 언제나처럼 이 자리를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앞으로 나가기가 무서워 계속 뒤를 돌아보는 어린 아이처럼 이 자리에 머물러있던 여자는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다시 쓰던 화면을 키고, 스크롤을 올렸다. 여자는 소설의 첫 장면을 다시 읽어내리기 시작한다.
9.
“이번 중간고사 일등은...”
하림이겠지. 일년내내 변하지 않았던 00여고 불변의 전교 1등, 오하림. 아니나다를까, 이미 자신의 이름이 불린 듯, 하림은 느긋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반쯤 일어난 듯한 모습이였다. 하지만 모든 반전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
“.. 김아영.”
뭐라고? 헉 하는 숨소리가 반 전체에 울려퍼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하림을 마주하는 순수하고 흔들림 없는 눈. 모두의 시선이 하림을 따라 한 곳으로 향했다. 삼분단 가장 뒷자리, 모두가 기피하는 짝꿍이자 2학년 6반의 공식 왕따. 전학생 김아영이 오하림을 재쳤다.
조용히 일어나 선생님께 걸어가는 아영의 뒤를 스무쌍의 눈이 조용히 뒤쫓았다. 성적표를 받아든 아영이 뒤를 돌면, 불신과 경악, 경멸이 담긴 스무쌍의 눈이 찌르듯 아영의 얼굴을 쳐다본다. 아영은 조금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모두의 시선을 당당하게 맞받아쳤다. 잘못된 교실을 알려주고, 교과서에 물을 붓고, 노트를 훔쳐 쓰레기통에 버려도 아무 반응도 없었던 아영. 모든 괴롭힘에 순응하는 듯, 그저 죽은 듯 지내는 것 같아보였던 아영.
‘이것봐. 니네가 아무리 그래봤자, 난 절대 무너지지 않아.’
라 말하는 듯한 시선에 몇몇은 조용히 시선을 걷는다.
“우리 학교에 새로운 1등이 생겼네? 아영이가 이번에 전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 다들 박수!”
짝- 짝. 마지못해 치는 듯한 두어번의 박수소리가 끝나자 아영은 선생님께 목례하곤 조용히 자리로 돌아간다. 그런 아영의 뒤를 끈질기게 뒤쫓는 시선. 오하림이다. 오하림은 졌다. 그렇게 아영을 괴롭히고도. 교실 여기저기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와, 결국 오하림이 졌네.’
‘그렇게 이기려고 아등바등하더니.’
‘그럼 이제 우린 어떡해야 되는거야? 계속 오하림 말 들어?’
‘아니지 이제 1등은 아영이잖아.’
하림이 신경질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지만 아무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흔들리는 하림의 동공. 분을 못 이겨 부들거리는 하림을 보고, 아영이 싱긋- 미소를 짓는다. 둘의 눈이 마주친다. 아영의 미소와 굳어버린 하림. 누가봐도 아영의 완벽한 승리였다.
10.
D-2
7:00 PM
카페에 앉아있는 여자의 뒷모습에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여자의 앞에는 또 다른 여자가 앉아있다. 테이블 위에는 방금 인쇄한 듯 새하얀 종이 한 뭉치가 제법 부피감을 가진 채 놓여있다.
“플롯은 거의 다 썼고 디테일한 부분만 고쳐서 내려고.”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더니 종이뭉치에 얼굴을 묻는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여유로운 척 말했지만 여자의 심장은 빠르게 두근거리고 있다. 앞에 앉은 이 사람이면 여자에게 제대로 된 평가를 해줄거라는 기대와, 그런 평가는 받고 싶지 않다는 엇갈린 마음이 여자의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뒤엉켰다. 사실 그 어떤 냉정하고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되더라도, 여자가 원고를 수정할 시간따위는 없었다. 이제는 마감 기한이 48시간도 남지 않았다.
‘왜 내가 이걸 보여주고 있지. 조금 더 빨리 보여줄걸. 아니, 그냥 보여주지 말걸.’
종이가 넘어가는 규칙적인 소음 사이로, 틱- 틱- 여자가 손톱을 뜯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자는 고개를 박고 한참 책상만 쳐다보다 용기를 낸 듯 고개를 들어 앞에 앉은 친구의 얼굴을 살핀다. 여자의 앞에 앉은 또 다른 여자, 시연은 여자가 웹소설 아카데미를 다닐 때 만난 친구다.
‘더 이상 읽을 웹소설이 없어서, 이제는 슬슬 제가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시연은 수업 중 예시로 언급되는 모든 웹소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흥행한 작품은 물론이고, 조회수가 간신히 250정도 나오는 신규 웹소설까지 시연의 손가락이 닿지 않는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웹소설과 웹툰의 연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어쩐지 배운 사람 같은 분위기마저 흘렀다. 오죽하면 강사님마저 시연의 웹소설 사랑에 감탄과 감동을 표현할 정도였다.
읽기만큼 쓰기에도 열정적이었던 시연을 여자는 가끔 질투하기도, 존경하기도 했다. 시연이 쓴 글이 유달리 좋았던 건 아니지만 글을 쓰는 시연의 태도는 뭐랄까, 누구든 시연이 글 쓰는 양을 알게 되면 저정도 쓰다보면 안좋아질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정확한 평가였다. 몇 달 되지도 않는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시연의 캐릭터는 빠른 속도로 생동감을 가지게 됐고, 시연의 세계관은 영화로 만들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변해갔다.
‘분명 작은 공모전에서 수상도 했다고 들었는데’
어쩐지 시연은 더 이상 웹소설을 쓰고 있지 않았다. 시연은 웹소설PD가 됐다. 한동안 신규 사이트에서 작가를 발굴하는 일을 하던 시연은 이제 웹소설을 드라마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물론 그것도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여자는 시연이 아까웠다. 시연은 웹소설작가로도 성공할 수 있었을텐데. 어쩌면, 자신보다 더 재능있는 사람은 시연일텐데. 어쩌면, 작가를 포기해야 하는 건. 어쩌면, 차라리 PD를 준비해야하는 건 내가 아닐까 - 여자는 생각했다.
‘웹소설 PD가 되려면 뭘 해야하지... 한 번 물어나 볼까.’
그런 생각이 여자의 머리를 스칠 때, 시연이 입을 열었다.
“음 뭐 나쁘지는 않은데...”
불길한 시작. 나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좋지도 못하다는 말이었다. 혹시나 했던 기대가 사라지고, 여자의 시선은 갈 곳을 잃고 공중을 떠돌기 시작했다.
“전에도 얘기 했던 것 같은데, 네 소설 속 주인공한테는 장애물이 별로 없어.”
맞다. 여자도 이미 들어본 이야기다.
“물론 먼치킨물이 주는 쾌감도 있지만, 성장하는 주인공만큼 매력적인 주인공이 없잖아.”
여자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조금 더 매력적인 역경과 노력. 실패도 좀 하고. 그리고 나서 극복이 있어야 하는데...”
수 없이 들었지만 여자가 아직 극복하지 못한 무언가.
“그 서사가 약해. 너무 쉽게 모든 걸 이겨내버리니까, 캐릭터 호소력이 좀 떨어지는 것 같아.”
여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비판.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여자는 역경과 극복을 설계하는 데 약했다. 주인공을 손에 물 한 방울 안 닿게 기르고 싶어하는 엄마같아요,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라 신같아서 생동감이 떨어져요 – 여자가 받곤했던 평이다. 본인의 인생에도 분명 실패와, 노력을 통한 극복의 과정이 있었을텐데, 그걸 담아보는 건 어때요 – 강사님은 말씀해주셨다.
하지만 전 그런게 없는 걸요. 뭘 극복하려고 노력해본 적이 없는 걸요.
하지만 그런 말 대신에, 여자는 그저 ‘네...’ 하고 조용히 대답하곤 했다. 사실 그때, 여자는 자신의 삶에 뭔가 결여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극복할 수는 없었다. 그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11.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날씨였다.
“어이, 정말 그 도깨비동굴로 들어가려는거야?”
무슨 상관이람. 화연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홍진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어머니에게 든 병마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약초가 필요하다고 했다. 화연에겐 더 이상 시간이 없었고, 말도 안되는 소문에도 목숨을 걸 수 있을만큼 절박한 상태였다.
‘서쪽으로 강 두 개와 골짜기 세 개를 넘어가면 귀신들의 마을이 있대요. 그 마을 북쪽에 있는 동굴이요. 그 동굴 속은 새로운 세상이랬어요. 미래와 과거, 조선과 양이의 세계가 뒤섞인 곳이래요. 거기에 사는 노란눈을 가진 도깨비에게 화살요정의 뿔을 달라고 하면 줄거랬어요. 동쪽마을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그 할아버지도 도깨비의 은혜를 입어 신천성 전투에서 살아남았대요.’
화연도 알고 있었다. 시공간이 뒤섞인 동굴, 도깨비, 화살요정의 뿔. 그런 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죽어가는 어머니를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게 정말 맞는 길인걸까, 차라리 어머니의 곁에 남아있어야했나. 그냥 자존심 다 버리고 다른 집안의 첩으로라도 들어갔더라면 어머니가 병에 걸릴 일도 없지 않았을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두고 마음을 저울질하며 산을 올라가길 한참, 그런 화연의 앞에 거대한 절벽이 나타났다.
“여긴 정말 못올라가겠는데? 아가씨, 이제 고집 그만 부리고 돌아가야겠어”
“......안돼, 이렇겐 안돼요...”
화연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오른손을 들어 벽을 만지자 건조해진 흑벽에서 푸슬푸슬 갈색의 흙덩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집고 올라갈 나무뿌리, 발을 받칠 돌자국 하나 없는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화연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져 흙을 적셨다.
‘정말 더는 올라갈 수 없는건가...’
눈물로 뿌얘진 시야 저편에 어머니가 보이는 것 같았다. 방에 누워 죽어가는 어머니가 떠오르자 시다리에서 힘이 풀리는게 느껴졌다. 풀썩 주저앉으려는 화연을 홍진이 가까스로 잡아 부축했다. 어머니, 보고싶어요... 그 애틋한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화연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탈진이었다.
12.
D-1
11:30 PM
나는 내가 한 반정도만 읽은 책을 한 가득 쌓아두고 사는 사람 같아. 끝까지 읽어본 책이 한 권도 없는거야. 왜 그럴까 생각해봤거든. 나는 결말까지 가는 게 무서운가봐. 결말이 내 기대와 다를 수도 있으니까. 끝까지 읽지 않으면 얼마든지 내가 마지막을 상상할 수 있는데. 근데 억울한 게 뭔지 알아? 그랬더니 난 분명 평생 열심히 책을 읽은 것 같은데,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책이 한 권도 없는거야. 결말을 아는 책이 하나도 없으니까.
내 인생이 그래. 뭔가 많이 하면서 살아온 것 같거든? 이것도 배우고 저것도 배우고,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면서 열심히 살아온 것 같단 말이야. 근데 제대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 내가 해온 모든 것들이, 어딘가 부딪혀서 멈춰있어. 시베리아 벌판 한가운데에, 그냥 얼음처럼 얼어서. 여기저기 한 덩이씩 놓인 상태로. 그 위에 눈만 쌓이고 있어. 난 이제 그것들 중 뭐 하나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 밀어도 밀리지 않을 것 같아서 무서워.
그래서... 그래서 난 그냥. 새로운 책을 펼치게 돼. 알면서도. 이 책도 끝까지 못 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그냥 새로운 책을 읽을래. 언젠간 얼음이 녹겠지. 난 그냥 그 순간을 기다릴래.
13.
D-Day
1:26 PM
여자는 여전히 잠들어 있다. 어젯밤 여자는 새로운 공모전을 찾아보느라 늦게 잠들었고, 세 달 후가 마감인 공모전 하나를 발견했다. 세 달이면 더 여유롭게, 조금 더 매력적인 글을 완성할 수 있을거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14.
D-Day
5:59 PM
여자가 한 쪽 턱을 괴고는 부스스한 눈으로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여자는 생각에 잠겨있다. 시간이 흘러가는 걸 지켜보던 여자가 천천히 손을 내려, 새로고침 버튼을 누른다.
[제출 기한이 만료되어 페이지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여자는 불쾌한, 혹은 통쾌하다는 마음으로. 어쩌면 조금은 우울한 듯, 아니 오히려 시원한 기분으로, 홀가분하게 아니, 속상한 마음을 안고, 내일을 기약하며. 그래. 내일을 기약하며. 요 근래 못잔 잠을 자기 위해 일찍 침대로 돌아간다.
15.
D-day
6:01 PM
그래 결국 난 이게 제일 자신 있다.
앞으로 뭐든 될 수 있는 사람으로 남는 거. 지망생으로 남는 거.
난 프로 지망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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