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조종 당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줄거리
이미 우리 삶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카페인, 아침에 커피 한 잔 없이는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주인공 현도 카페인 없이는 하루의 시작이 개운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 그 카페인에 음모가 있다고 주장하는 남자가 있다. 남자의 죽음 전엔 그가 하려던 말을 들어주지 못했던 현은 남자에게 빚진 목숨에 대한 책임감과 후회를 가지고 있다. 다시 찾은 그의 집에서 감상에 젖은 것도 잠시 생전 남자가 수집한 증거들을 발견하며 조금씩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현. 그의 말처럼 우리는 정말 조종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Intro
#. 카페인의 음모
나는 뜀박질을 멈추는 순간,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낮에도 밤에도 쉼없이 일만 하던 때가 있었다. 어떻게 직업이 네 가지일 수 있냐는 질문에 대답을 하려면, 그걸 해낸 사람은 내가 아니라 ‘몬스터’였다 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다. 고작 커피로는 버틸 수가 없다. 졸음도 졸음이었지만, 도저히 제 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빈 속이 메스껍고, 바닥이 울렁이고, 관자놀이가 무언가에 짓눌리는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깨어있을 수는 있다. 내 노력을 가상하다 여기신 몬스터 신의 보살핌 덕분에.
그런데 그 뿐이었다. 종일을 무슨 정신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일 했는 지도 모른 채 그저 초점없는 눈으로 하루를 버티기만 했던 것이었다. 대용량 에너지 드링크를 하루에 6캔을 마시며 일 한지 22일 째, 바닥이 울리고 나는 응급실에서 다음날을 맞이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직장과 가장 가까웠던 Kings Cross 에 있는 어느 기독교 병원 응급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옮겨졌다. 응급실에 의료진들이 나를 정신병동으로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태어나 단 한번도 정신 병동을 가본 적이 없던 나는 정신 병동 방은 하얗고 창백할 것이라 상상했다. 그런데 정말 상상한 그대로였다. 온 벽이 하얗고, 침대는 파랗고, 뼈가 시릴 정도로 추웠다. 냉방을 좀 꺼달라고 부탁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이유를 한참이나 늘어놓더니 결국엔 추위를 막는 데는 전혀 소용이 없는 부직포 재질의 담요 더미만 주고 갔다.
그렇게 과하게 친절하지만 싸한 의료진들이 수 없이 방을 다녀갔다. 간호사는 피를 계속 뽑으러 왔다. 너무 많이 뽑아서 더 이상 피가 잘 나오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는 이게 치료인지 고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내가 약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말을 끝까지 믿지 않는 듯 했다.
‘나는 그저 카페인을 조금, 많이, 섭취했을 뿐이라고..’
그 후 비슷하게 생긴 하얀 방으로 옮겨져서 의사와의 상담을 기다려야 했다. 잠을 못 자서 쓰러진 환자를 보호한다며 그들은 장장 4시간 반이 넘는 기다림 동안 내가 잠에 들지도 못하게 했다. 두 명의 의사에게는 최근 식단에 대해 그리고 현재 하고 있는 일의 종류와 가짓수에 대해 설명, 아니 거짓말을 해야했고, 선명히 보이는 큰 멍에 대해서도 해명해야 했다. 결정적으로 내가 자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모국어도 아닌 언어로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그들을 설득해야 했다. 내일 자살할 사람이 굳이 오늘을 왜 이렇게 최선을 다해 살겠냐고 가장 그럴듯한 이유였다.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을 한 다섯번은 했을 즈음엔 자동 응답기 들에게 거의 신경질을 냈던 것 같다.
그렇게 보호자가 올 때까지 꼬박 하루를 갇혀있어야 했다. 햄과 치즈만 들어간 성의 없고 차가운 샌드위치만 받아들고 룸메이트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보호자로 온 룸메이트도 혹시 내가 데이트 폭력을 겪고 있지는 않느냐는 자신들의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질문에 나와 다른 방에 옮겨져 답해야 했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포잡을 뛰어야 하고, 저녁 8시부터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 5시까지 일을 하고, 최소한 아침 8시엔 일어나 씻고 전혀 다른 일에 출근해야 한다고. 내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누구도 억지로 시킨 적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의사결정자는 나 자신이다. 그런데도 무엇에 홀렸는지, 카페인이 내 삶을 온통 갉아 먹고 있는 데도 그걸 가만히 두고만 봤던 것 같다.
동시에, 내가 그렇게 몸과 마음을 해치는 동안 주변의 그 누구도 나를 만류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삶에 체했을 때 누군가가 곁에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해본 적은 없다. 다만 그냥 상상을 해보았다. 그 때 누군가가 한 사람쯤, 한번쯤 성가시게 잔소리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하지만 단지 상상일 뿐이다.
이제껏 나의 부주의와 무신경함으로 생긴 내 문제라고만 믿었다. 그런데 이건 어쩌면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나만 겪은 게 아니라면 어떤 사회 구조적이고 고질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적에게, 아주 집요하게 우리는 조종당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1 부
#. 낯설지 않은 죽음
‘아저씨가 자살이라니.. 그럴 리가 없었다.’
해외 로케 촬영 막바지에야 겨우 소식을 들었다. 예능국에서 시사 교양국으로 부서 이동을 하고 첫 해외 촬영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출국 했지만, 귀국행 비행기는 누구보다 무거웠다. 소식을 듣자마자 최대한 빠르게 그가 있는 곳으로 갔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수사는 이미 종결 나 있었다. 딱한 일이지만 별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나는 달라야했고, 달랐다. 나는 아저씨에게 목숨을 빚졌다. 갑자기 찾아온 그의 부고에 나는 책임이 없지 않다. 그러니까 그가 없는 그의 집까지 찾아가는 것은 내가 오버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비밀번호를 누르려 했는 데, 도어락 배터리가 나갔다는 표시등과 함께 버튼이 헛돌았다.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전과는 다르게 퀘퀘한 상자 냄새가 가장 먼저 났다. 구겨진 자국이 선명한 검은 구두와 그가 좋아하던 세 줄 무늬 슬리퍼, 그리고 한쪽만 끈이 풀린 회색 운동화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서니 4인용 식탁에는 겨우 의자 두 개만 쓸쓸히 놓여있었다. 주인을 잃은 의자가 쓸쓸해보였다. 다리 하나가 부러져 테이프로 꽁꽁 감아놓은 창가 쪽 의자가 그가 주로 썼던 의자였다. 그와 다른 디자인의 의자 하나는 1년 전이었던가.. 그가 나를 위해 툴툴대는 목소리로 들여놓은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툴툴 될지언정, 결국엔 내 말에 다 져주는 사람.
바닥엔 냉장고에서 자성이 다한 전단지들이 버려진 채 나뒹굴었다. 떨어진 전단지들이 발 밑에 채이는 게 걸리적거렸다. 사방으로 널부러진 전단지들을 주워 포개어 놓았다. 맨 앞장에 있던 광고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화이트 프리미엄) 집에서 즐기는 카페라떼, 부드럽게 아침을 여세요.
커피는 입에도 안대는 사람한테 이런 전단지는 왜 가지고 있나 작은 의문이 들며 전단지들을 내려놓으려던 차에, 뒷장도 그 뒷장도 다 커피, 카페, 에너지 드링크.. 죄다 카페인 광고 뿐이란 것을 발견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전단지를 한 손에 쥔 채 턱을 넘어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촌스러운 벽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곰팡이가 피어 보기 흉했다. 언젠가 같이 도배를 도와주겠다던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못했다. 다시 코끝이 시큰해졌다. 책상 위엔 나프탈렌 향이 나는 알약 몇 개가 통 밖으로 나뒹굴었고, 그 옆엔 손때 묻은 종이들이 정신없이 늘여져 있었다. 책상 뒤에 놓인 옆구리 스펀지가 조금 터진 의자가 익숙하게 눈을 사로 잡았다. 바로 옆에 자리한 구식 턴테이블에 몇 장 안되는 lp와 함께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그의 공간에는 꼭 잊혀지고 버려진 것들만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던가.. 그를 찾아갈 때마다 나는 의문이 들었다. 나이도 많이 차이 나고, 같은 일을 하는 사이도, 학교 선후배도 아니었다. 게다가 만날 때면 늘 다른 견해로 다투기만 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 특이한 사이이긴 해도 가까운 관계는 될 수는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야 꽤 오래 맴돌던 의문이 조금 해소가 되는 것 같았다.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 더는 그가 없다는 생각만으로 깊은 심연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와 접점 하나 없는 사람. 접점도 하나 없는 데 나를 제 목숨만큼 귀하게 여겼구나...
#. 알바생 아무개씨
아저씨와 처음 만난 것은 한해 하고 반 년 정도 전이었다. 그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식당과 바로 마주보고 있는 편의점에서 일을 했다. 동네 분들만 오는 작은 식당이었고, 편의점도 많이 북적이지 않았다. 식당 출근 전에 자주 들렸는 데, 늘 비슷한 시간대에 방문해서 인지, 그를 보고 출근하는 것이 어느새 자연스러운 루틴이 되어있었다. 나는 그의 턱과 인중에 선명히 보이는 수염 때문인지, 언제나 피곤해보이는 기색 때문인지 꽤 나이가 들어 보여 분명 그가 점장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몇 번의 대화를 주고 받은 끝에 나는 그가 친한 형님이라는 분의 친절 덕에 퇴사 후 일자리를 얻은 나와 같은 처지의 아르바이트 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저 식당 알바가 3번째로 얻은 일이고, 저거 말고 하나가 또 있다고?”
어느새 서로 반말을 할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졌을 즈음, 그는 내가 무려 4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오랜 시간 언론 고시를 준비하고 있으며, 건너편 식당으로 출근 이전에 이른 아침 베이커리에서 카운터 알바를 이미 다녀왔고 끼니는 가볍게 건너 뛰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끔씩 퇴근길을 하다가 말고 식당까지 찾아와 빵이나 우유를 사장님 몫까지 챙겨와 주고 갔다. 어차피 폐기해야 것들이었으니 마음 쓰지 말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한번은 계산을 하다가 그 앞에서 코피를 흘렸다. 그때부터 별 이유를 대고 온갖 엉성한 방법을 동원해서 나의 에너지 드링크 구매를 막았다. 제조일자가 지났다, 한 사람한테 너무 많이 팔면 안된다, 아예 에너지 드링크 칸을 비워놓은 적도 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또박또박 말을 전하는 그의 마음만은 고마웠다.
“꿀물 먹어 대신. 오늘 레드불 다 나가서 그래. 진짜야.”
너무 티가 나는 거짓말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단지 어색했을 뿐, 사실 그의 간섭이 싫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하루를 버티게 할 힘이 날개를 달아준다는 레드불이 아니라 저 날개만 없지 천사가 아닐까 싶은 낯선 이의 친절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그날은 차가운 에너지 드링크 대신 그의 마음만큼 따뜻했던 유리병을 받아 들었다.
그가 전한 온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날부터, 나도 함부로 대해선 안되는 귀한 사람이라는 햇살 같은 생각이 마음 한 켠에서 조용히 피어 났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너무 깊게 드리워져 걷어내지 못할 것 같은 내 삶의 그늘을 조금씩 걷어냈다.
#. Rule Out
띵동-
예의상 눌러봐 준 초인종에 역시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내 손이 도어락 쪽으로 바로 향했다. 예전에 옆에서 슬쩍 눈으로 비밀번호를 읽어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기네 집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길도 몇 번이나 버벅이는 것이 허점이 많고 엉성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허점이 많다는 수식어를 쓰기에 그는 주변 사람들의 번호와 생일 따위는 달달 외우고 다녔다. 친구가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그런 정보를 외우고 다니는 사람은 주변에서 찾기 힘들었다. 사실 쓸데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휴대폰을 잃어버리면 번호까지 다 잃을 까봐 그러지”
그는 구형 모델의 휴대폰을 내게 흔들어 보이며 미숙하게 변명했다.
“어차피 요새는 다 연동되서 자동 저장 되는데도?”
봐주지 않고 정직하게 화답했다. 이건 장난이었는데, 그 말을 듣는 그의 표정은 꽤 치가 떨린다는 것 같았다. 무섭게 변했던 표정에 그땐 나까지 괜히 머쓱해졌다.
방에 기척 없이 들어가보니 그는 내게 정수리만 보인 채 한쪽 팔을 쭉 뺀 채 골아 떨어져 있었다. 역시나 전날도 꼬박 샌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키우기 쉽다는 다육이도 전에 왔을 때보다 색이 황갈색을 띄는게 생기가 없어 보였다. 깜빡 졸다가 떨구기라도 했는지, 바닥엔 종이 묶음 들과 펜이 어수선하게 떨어져있었다.
“아저씨!”
그는 화들짝 놀라며 손님이라곤 나 뿐인 방을 두리번댔다. 다크 써클이 광대 아래까지 무겁게 내려온 얼굴을 세수 하듯 비볐다. 왔냐고 안 잔척 자연스럽게 물어봐도 다 티가 난다며 핀잔을 주었다.
“이게… 취준생이야.. 취중생이야..”
“취중은 아니지. 나 알코올은 입에도 안대.”
그는 물을 홀짝이며 대답했다. 나도 따라 들고 온 텀블러의 커피를 조금 마셨다.
“넌 커피 좀 그만 마셔라.”
인상을 쓰고 말하는 게,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일부러 속이 안 보이는 텀블러에 가지고 온 건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속일 사람을 속였어야 했다. 하긴, 예전부터 유독 내 카페인 섭취에 불만도 걱정도 많은 사람이었다. 노파심에 하는 소리겠지 넘기기에는 걱정하는 안색이 꽤나 진지해보였다.
“저 이거 오늘 첫 잔 이에요. 이제 하루에 두 잔 이상은 안 마시는데..”
“두 잔을 마신다고 중독 안되는 거 아니고, 열 잔 마셨다고 중독인 게 아니야.”
“그러면요?”
“그 두 잔 마셨을 때 너랑 한잔도 안 마셨을 때의 네가 눈에 띄게 다르면 중독 된 거야 그거.”
“음... 꼭 의학 저널에 나오는 말 같네요. 대체 뭐하는 사람이에요 진짜?”
“그러게~ 모르긴 몰라도 그 물음에 대답 할 수 있어지면, 재미없어서 그만 살고 싶어질 거 같다.”
그런 말을 하는 장난끼 가득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표정은 개구져 보이진 않았다. 대화를 하는 중에도 손은 무언가를 써 내려가느라 바삐 움직였다. 왼 뺨에 볼펜 자국이 남았고, 눈도 충혈되어 있어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퀭 해져가지고.. 커피 마셔요 커피. 아저씨는 왜 맨날 쉬운 길 두고 어려운 길만 택해요..?”
“너 임마 나 아저씨 아니라니까. 나 이제 서른인데 아저씨는 아니지 않냐?”
“그게 싫으면 면도를 하시던가요 그러니까.”
“흠.. 역시 이건 미디어의 문제야..”
“...무슨 뜬 구름 잡는 이야기에요 그건”
“수염 있는 남자를 자기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게 보는 거 그게 다 방송에서 이미지를 그렇게….”
“근데 아저씨도 옛날에 사회부 기자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물론 지금은 나이 먹은 취준생이시지만..”
나는 또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다며 그의 말꼬리를 잘랐다.
“그랬지.. 그 놈들 한테는 아주 미운 오~리 새끼였지.”
분명 사연이 있는 표정이었다. 무언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바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사적인 질문을 해도 될 만큼 가까운 사이인가..?’ 아닌 것 같았다. 해도 되는 이야기였다면 예전에 자신의 전 직업에 대해 털어놓을 때 먼저 했겠지.. 목구멍까지 올라온 질문은 그렇게 자기 검열 되었다.
“저는 성격이 뉴스를 할 법 하진 않아서.. 그래서 예능국으로 들어간 건데 이것도 쉽지가 않은 거 있죠?”
“뭐가 그렇게 쉽지가 않은데?”
그는 가벼운 이야기로 급하게 화두를 돌린 나를 눈치챈 듯 자연스럽게 내 질문에 반응해주었다.
“그거야 웬만한 프로그램은 이미 다 나와버렸으니, 저 같은 초짜가 설 자리가 없는 거죠. 웃긴 거 이미 너무 많잖아요.”
“네가 아이디어가 그만큼 없는 건 아니고?”
“에이 아저씨..!”
“아 농담이야 농담.”
그는 생각보다 내 언성이 높아지자 처음으로 당황한 듯 농담이라며 말을 바꾸었다. 갑자기 물을 뜨러 가겠다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컵에 물 아직 남아있던데.. 속으로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가 앉아있던 결대로 쿠션의 숨이 죽어 제 모습을 찾는 데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나는 까닭도 없이 그가 앉았던 의자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그렇게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돼..”
아저씨는 내가 멍 하니 의자만 쳐다보고 있으니 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사실 별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데.. 그렇게 뜬금없는 위로를 전했다.
“그게 이제 입사 1년차인 패기 빼면 시체인 신입사원한테 해줄 말이에요?”
“그냥.. 최선을 다해 뛰기 전에 그게 애초에 맞는 방향이었는지 생각해보는 일, 나는 미쳐 못 해봤거든.. 네가 나처럼 한참 후에 나의 최선이 누군가를 해치고 난 후에야 그 사실을 깨우치며 후회하지 않길 바라거든.”
“어.. 그 사람도 아저씨가 악의를 가지고 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 거에요. 아저씨.. 되게 좋은 사람이거든요.”
그는 더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에게서 마음을 닫아버린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땐 정말 하려는 말을 막지 않았어야 하는데. 그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나도 들었어야 했다. 그가 말한 후회가 지금 내 감정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분명한 건, 나는 지금 후회를 하고 있다.
#. 판도라의 상자
그의 책상에 걸터 앉아 손으로 나무의 결대로 쓸었다. 책상과 아래의 서랍을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며 처음 이곳에 온 날 나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던 것이 생각 났다. 맨들 거리는 윗면과 달리 가장자리로 갈수록 미숙한 사포질 때문인지 손날에 닿는 감촉이 꺼끌거렸다.
‘솜씨 좋은 목수는 무슨..’
속상한 마음은 괜시리 툴툴거리는 말투로만 튀어나왔다. 이상하게 아저씨 앞에 설 때면, 애 어른은 온데 간데 없고 꼭 투정 부리고 싶은 아이가 되어 버렸다. 책상의 무게를 버티고 있는 서랍장 세 개로 시선이 아래로 옮겨졌다. 서랍 높낮이가 묘하게 달랐다.
‘이거 다 내가 직접 만든 거야.. 내가 직접 하나하나...’
나는 불현듯 그가 책상과 서랍을 직접 만든 것을 여러 번 말한 것이 본인이 얼마나 솜씨 좋은 목수인지 말하기 위함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뜩 드는 생각과 함께 걸터앉은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숙여 서랍장 쪽으로 다가갔다. 첫 번째 서랍은 뻑뻑한 느낌과 함께 겨우 열렸다. 서랍장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났다.
두 번째 서랍장을 열기 위해 손잡이 턱에 손을 넣었다. 서랍은 첫 번째보다 더 쉽게 열리지가 않았다. 위로 들어올려 힘을 한껏 주니 서랍장 자체가 빠져버렸다. 반동과 함께 뒤로 넘어져 서랍 안에 든 물건이 내 쪽으로 쏟아졌다. 시중에 판매되는 커피 믹스들이 손아귀에 한 웅큼 잡혔다.
‘이게 왜 여기에..’
얼얼한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쏟아진 커피부터 주워 담았다. 빠진 서랍장을 도로 끼워 넣기 위해서 다가갔다. 그런데 서랍장 끝에 구멍이 나서 안 쪽으로 공간이 있었다. 겨우 오므린 손이 들어갈 작은 구멍이었다. 깊게 손을 넣으니 수첩 같은 게 손에 잡혔다.
손바닥만한 낡은 수첩에는 2016년도, CBS 로고가 박혀있었다. 틀림없이 그의 기자 시절 수첩이었다. 가끔 훔쳐볼려 할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의 반응때문에 나는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가장 앞 장에는 맥x 커피 성분표가 적혀 있고, 이어지는 페이지에서도 익숙한 상표의 성분표를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뒷 장을 넘기니 연두색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 있었다. 포스트잇에는 삼화 연구소라는 상호와 함께 연구소 번호가 함께 적혀있었다. 일련 번호같은 것을 보니, 그가 삼화 연구소라는 곳에 무언가 의뢰를 한 모양이었다. 수첩에는 그가 작성한 사건 일지 같은 내용이 시간 순서대로 적혀있었다. 따라 내려가다 보니 익숙한 이름도 발견할 수 있었다.
계산동 할아버지 발작 사건, 아현 양 사건과 분명한 연관 존재
‘계산동 할아버지면 설마..’
나는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충격적이었다. 아저씨도 사실을 알아내고 꽤나 흥분 했는 지, 글자 위에 여러 번 동그라미칠을 한 흔적이 보였다. 커피 믹스, 듣지 못한 기사 은퇴 이유, 전단지, 그리고 이 수첩까지.. 지금 강하게 드는 미심쩍은 느낌을 해결하지 않으면 아저씨를 죽어서도 외면하는 일이 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 계산동 할아버지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여닫이 문에 달린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출근을 했다. 뒤통수만 봐도 알 수 있는 익숙한 실루엣이 가장 먼저 보였다. 한숨부터 나왔다. 실루엣의 주인공은 요앞 인력 사무소에서 가장 나이가 지긋한 양반인데 매너라고는 개미 오줌만큼도 없는 사람이다. 사모님은 오랫동안 이 동네에서 세탁소를 하시면서도 늘 웃는 얼굴이시고 사람 참 좋아 보이셨는데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맞는 지 참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할아버지는 야간조로 근무하고 오면 늘 내가 출근할 시간 즈음 와서 동태탕이나 순두부 같은 무른 음식을 시켜 먹는다. 식사를 다 하고 나면 앉은 자리에서 사장님과 나에게 믹스 커피를 타오라는 둥,
TV 채널을 바꾸라는 등 꼭 갖은 심부름을 시켰다.
“이거야 원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쥐어 주는 구만..”
그 막무가내 할아버지는 색 바랜 조끼에 입가를 닦아내며 불평 가득한 목소리로 읍조렸다. 제 성미에 못 이겨 테이블을 두 번이나 내리쳤다. 쾅쾅 거리는 소리에 옆 자리에서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는 손님 한 분이 덩달아 놀라셨다. 몇 장 되지 않는 지폐를 세다 한 장을 테이블 위에 대충 올려 두었다. 사장님은 식사를 다 했는 지 슬쩍 읽으시더니, 종이컵에 탄 커피 한 잔을 놓아주며 다가가 지폐를 집어 들었다. 지폐를 가져가는 동안에도 내리깐 눈으로 사장님을 아래위를 훑고 있었다. 사장님은 저 할아버지도 원래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며, 기구한 인생이라며 애써 편을 들어주려 했지만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기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어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더 힘들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커피는 알아서 타 드시라고.. 나는 이 집 딸이라도 되는 냥 약속을 받아내려 했다.
“현아 알았어, 네 말 무슨 말인지 다 알겠어.”
사장님은 계산대에 받아온 지폐를 넣으며 울상인 나를 보시더니 어깨를 두 번 두드리셨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래도 다음엔..”
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너무 놀라 쥐고 있던 행주 까지 떨어뜨렸다. 그 할아버지는 티비를 보다 말고 우리 대화를 엿 들었는 지,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사장님도 동시에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다물었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테이블에 지탱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은 여전히 우리 쪽을 바라보면서. 조금씩 출구가 아닌 계산대 쪽으로 다가온다.
“동희 할아버지 그런 게 아니에요... 일단 진정하세요 진정..”
애초에 분풀이 대상을 찾는 것처럼 내 말은 들은 체도 않았다. 동태탕 국물 퍼먹을 때마다 수저 들던 손도 벌벌 떨던 양반이다. 겁 먹을 것 없다 생각했지만, 한 손에 젓가락을 쥔 채 다가오는 건 위협적인 일이었다. 손만 조금 뻗으면 가게 전화기인데, 앞치마에 넣은 손을 빼서 두 뼘만 더 가까이에 가는 게 어려웠다. 벌벌 떨고 있는 건 저 할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내 옆에 사장님도 얼어 붙기는 마찬가지 였다. 나는 조심스레 사장님을 내 뒤로 세웠다.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며 전화기 쪽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움직임은 최소화하고 손만 최대한으로 뻗어 전화기에 닿으려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손 끝에 수화기가 닿은 순간, 생각지도 못한 종소리가 들렸다. 때맞춰 도착한 폐기 예정인 빵과 우유, 그리고 아저씨가 서 있었다. 종소리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홱 하니 돌렸다. 손에 들린 날 선 젓가락, 창백해진 사장님의 얼굴, 느닷없는 대치 사항을 보고 아저씨의 얼굴이 한 순간 일그러졌다. 들고 있던 봉지를 내친 채 젓가락부터 내려놓게 하기 위해 할아버지에게 한 발을 내딛었다. 할아버지는 아저씨와 채 몸이 닿기도 전에 마른 기침을 해대며 쓰러졌다.
우리는 토끼 눈이 되어 그 자리로 뛰어갔고 발작을 일으키며 거품을 문 할아버지가 상체를 들썩이고 있었다. 아저씨도 꽤 놀란 듯 달려와 할아버지의 상태를 살폈다. 사장님에게 119에 신고를 나에게는 세탁소 사모님께 전화하라고 지시하고는 할아버지를 돌려 옆으로 눕혔다. 과 호흡이 온 듯 숨을 쉬기 힘들어하는 할아버지를 보고 아저씨는 카라 단추까지 잠근 할아버지의 셔츠 단추 두개를 풀어주었다.
할아버지는 눈깔이 까뒤집히는데도 무어라 말을 하려 했는 데, 사실 입만 벙긋대는 정도라 내가 대강 들은 말이 맞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그 소리 없는 아우성을 바로 알아 들었는 지, 듣자마자 혼이 나간 얼굴로 테이블을 올려다 보았다. 아저씨는 테이블에 놓인 커피가 그대로 담긴 종이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모님과 119 대원은 다행히 금방 도착했다. 할아버지가 호흡기를 달고 들것에 들려 옮겨졌다. 사모님은 할아버지의 자글한 손을 꼭 잡고 계셨다. 그렇게 겨우 상황이 마무리 되는 듯 한숨을 돌리고 우리는 할아버지가 쓰러진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쓰러진 사람 앞에서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던 아저씨가 왜인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손을 떨고 있었다.
“아저씨 왜 아직까지 이렇게 떨어요..”
“그냥.. 무서워서.. 내 예감이 맞을 까봐 무섭네.. ”
“무슨 예감인데요..? 안 좋은 거에요?”
“처음이 아니거든. 내가 본 처음이 아니야.”
“뭐가 처음이 아닌데요..”
사람을 잔뜩 불안하게 해놓고는 말을 아꼈다. 쪼그려 앉은 자리에서 테이블을 잡고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입 댄 흔적도 없는 커피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었다.
나도 이제는 계산동 할아버지가 마른 입술로 애절하게 외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알겠다.
할아버지는 까뒤집어진 눈을 하고서도,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헐떡대면서도, ‘커피 이리 줘, 커피.’
분명 이렇게 말했다.
#. 정아현 학생 사건
아현양 사건, 일명 부천 여중생 투신 사건으로 불리우는 그 끔찍했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겨우 16살의 여학생이 학교 옥상에서 투신한 일로, 처음 기사화 되었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이제는 비슷한 류의 사건이 일어날 때, 몇 번 비교 언급되는 게 전부일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러버렸다.
기사에 따르면 아현양은 학교에서 조용한 편이었지만, 따돌림 문제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 증거로 2학년 때는 부반장까지 도맡았다는 기사 내용이 있었다. 부반장은 왕따 안 당하나.. 당시에도 나는 왕따설을 부정 하기 위한 근거로 학교 임원 선출 기록을 대는 기사에서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다. 담당 교사의 말로는 유복한 집안 환경에, 외국어 고등학교로 진학을 준비했고 실제로 성적도 상위권인 말 그대로 어디 하나 부족한 곳 없는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아까보다 한결 더 찜찜해졌다.
이 사건은 철저히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흐지부지하게 종결이 났었다.그럴 것이다라는 추측만 있고, 어느 하나 명확하게 떨어지는 지점이 없다 보니, 넷상에서는 온갖 괴담만 돌았다 그 중 열에 아홉은 걸러야 할 성의도 없는 거짓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 중엔 오히려 수사결과보다 더 설득력 있는 커뮤니티 글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썰’ 이다.
ㅎㅇ 난 익명 쓰니 람비라고 함. 중리중 2학년 때 정아현이랑 같은 3반 이었음.
체육쌤이 담임이었는 데,담탱 반 애들한테 관심 1도 없던 거, 중리중 다녔던 애들은 알거..
정아현은 일단 공부는 전교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혔지.. 1등도 여러 번 했던 걸로 기억함.
대신에 성적 스트레스 심한 거 알만한 애들은 다 알고, 멘탈도 유리였음. 지나가는 애랑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엄청 놀라고, 지 기분 나쁘다고 째려보고.. 하여튼 예민하게구는 걸로 전교에서 유명했음.
원래 입학할 때도 좀 마른 체형?이었는 데, 진짜 점점 야위더라. 하긴 3년 내내 급식 먹는 거 본 기억이 거의 없음. 한번은 급식실 갔더니, 정아현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소리 지르는 거임. 무슨 벌레가 기어 다닌대나 뭐라나 하면서 식판 내던진 적 있음. 벌레가 어디 있었겠음, 걔가 걍 헛것 보고 난리 친 거지.. 거기 있었던 애들은 다들 정아현 드디어 정줄 놓는 거냐 그랬음.
그러니까 내가 봤을 땐, 정아현 죽으려고 죽은 게 아니라, 이번에도 헛것 보고, 난관 잡을 힘도 없어서 그렇게 된 거라는 거지. 한마디로 개죽음.
Q. 정아현 학교 폭력은 아님? 몸에서 발견된 타상 보고 그런 말도 있던 데?
ㄴ 빡대가리신가? 떨어졌을 때 생긴 거겠지 당연.
ㄴ 괴롭힘 없었지 당연히.. 걔네 아버지가 3선 국회의원이었음.
ㄴ 맞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 아닌 이상 못 건들지.
Q. 정아현이면 그 맨날 피곤해보이는 애 맞음?
ㄴ 맞을 껄? 다크써클 쩌는 애 있잖음
ㄴ 나도 이동수업 합반 이라서 옆에서 보는 데, 거의 툭 치면 쓰러질 것 같던데..
ㄴ 전설적인 존재있음.. 공포의 스누피 우유도 이긴다는 말이 있더라.
실제로 정아현양 몸무게가 몇 달 새 10키로가 넘게 빠져있었고, 중심 잃고 떨어졌다고 가정 했을 때, 추락사 때 가장 먼저 닿은 부분까지 일치했다. 그래도 중요한 건, 아현양 사건은 계산동 할아버지 사건보다도 3년이나 이전에 일어난 사건이고, 사건이 일어난 장소, 주변인, 경위 모든 게 달랐다.
‘대체 무슨 근거로 연관이 존재한다는 거야..’
전혀 다른 사건으로만 보이는 두 사건 사이의 연결 고리를 나는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유도 없이 허튼 말을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최소한 내가 아는 아저씨는 그렇다.
헛것.. 헛것이라니.. 나는 결심이 선 사람처럼 깍지 낀 손을 풀고 타자를 쳤다.
ㄴ TBC 방송국 시사보도 팀입니다. 사건 관련해서 여쭤볼 말이 있는 데 쪽지 확인 부탁 드립니다.
당시의 16세였던 아이디명 람비는 풋풋한 새내기가 되어 있었다. 공교롭게 언론 정보학과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람비는 방송국이라는 말만 듣고 눈이 초롱 초롱해져 메일에 회신을 해준 것이었다. 졸업하면 꼭 TBC 들어가고 싶다며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를 보니 뜻 하지 않게 실망을 안겨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만남이 성사되었으니, 내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스타트였다. 수 많은 사칭범들을 봐왔기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는 것이 먼저였다. 먼저 그녀에게 가지고 와달라 부탁한 중학교 졸업앨범을 함께 확인하기로 했다.
“확실하게 해서 나쁠 거 없으니까..”
내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람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앨범의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검은 배경에서 어색하게 표정을 지은 그녀의 얼굴과 정아현의 얼굴을 각각 가리켜주었다.
“단체 사진에는 걔가 없어요. 단체 사진을 학기말에 찍었거든요.”
아.. 그래.. 전혀 친분이 없는 사람의 죽음도 내게 낯설지가 않았다. 왜인지 서글펐다.
“걔는 부반장 그것도 나가기 싫어했어요. 원체 그런 거 나서서 하는 애가 아니거든요.”
“나가기 싫어했다고? 왜? 또 당선은 어떻게 된 거야?”
“수학 문제 하나 더 푸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애 였으니까요. 재수 없다고 엿먹어 보라고 던진 표가 애매하게 맞아 떨어져서 하기 싫은 중책까지 떠맡은 거죠.”
“헛것 본다고 한 얘기, 급식실에서 있었던 일 말고 다른 일은 없었니?”
“진짜 말 그대로 헛것이에요. 누가 자기 목을 조른다고 그런 적도 있어요. 보이지도 않는 걸 가지고 혼자 무슨 과몰입이라도 하는 건지...”
갑자기 수중에라도 들어간 듯이, 람비의 목소리는 고막 뒷전으로 웅웅 울렸다. 생전에 그가 내게 했던 알 수 없는 말의 의미를 이제 조금씩 알 것 같아서..
원래 가장 경계해야 하는 적은 보이지 않는 적이지.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오고, 꼼짝없이 당했을 땐 이미 늦어버려. 그 놈은 말이야.. 정말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자비 없는 어퍼컷을 날려버린다니까?
2 부
#. 단언하는 고슴도치 신중한 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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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마세요. 저 하나 입막음 한다고 해결될 일 아니라는 거 아시잖습니까.
-해야할 일을 하세요. 엄한 데 힘쓰지 마시고.
-아현 양 사건, 자살이 아니고 사인이 따로 있습니다. 저도 선배님도 진실을 미쳐 보지 못하고 실수했죠.
그 진실을 규명하는 게 제가 해야할 일이죠.
- 거참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이러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거 본인이 제일 잘 알지 않아요?
-그 말은 꼭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부당한지 본인이 제일 잘 아신다는 말로 들립니다?
쉽게 쉽게 갑시다. 결국 단순한 거에 끌리는 게 일반 대중 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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