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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_2025/27호_실패

27호_37년의 삶이 남기고 간 것 / 또바기

by 밍기적_ 2025. 3. 2.
“삶은 언제나, 어디서나 계속된다. 아우슈비츠에서도 일상은 있었다.”

 

 시작부터 강렬했던, 내가 준비하던 시험의 한 지문 서두였다. 인상 깊게 남은 이 문장들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좌초될 위기가 있더라도 결국 삶을 지속해 나가게 만드는 한마디가 되었다. 어떤 일을 겪더라도 죽음이 오지 않는 이상 삶은,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간다는 사실. 이것은 성공이든 실패든, 하나의 순간에 불과함을 일깨워주고 현실을 직시하게 해준다. 그리하여 다가올 성취에 자만하지 않게, 다가올 실패를 가벼이 여길 수 있게 만들어 준다.

 한편 이미 다가온 결과, 특히 다가온 실패를 이겨내게 하는 나만의 주문도 있다. “그래도 해야지.” 근래에 들어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이다. 한 마디를 더 덧붙여 중얼거릴 때도 있다. “그래도 해야지, 뭐 어쩌겠어.” 실패에서 비롯되는 좌절감에 갇혀있지 않고 행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마법 같은 문장이다. 물론 이 말 하나로 힘든 게 사라지진 않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감정에 매몰된 채 시간만 흘려보내진 않게 된다.

 통상 ‘실패’라 함은 ‘목표로 했던 일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렇기에 개개인의 ‘목표’가 무엇이냐에 따라 실패 여부는 달라진다. 나 같은 경우는 회피적으로 살 때가 왕왕 있었어서, 목표를 굳이 설정하지 않곤 했다.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달성하고자 노력할 동력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달성에 실패했을 때 절망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목표 없이 살던 때의 나는 크게 실패라고 여긴 것 없이 뭐든 훌훌 털어낼 수 있었으며, 동시에 기대하지 못했던 성취들을 맛보곤 했다.

 그러다 난생 처음 절실한 목표가 하나 생긴 뒤로, 나름 전력을 다 해봤던 적이 있었다. 물론 목표 달성일을 앞두고 내내 100%를 다 쏟아부었다는 말은 아니고, 전력을 다 해봤던 ‘기간이 있다’는 것 정도다. 여하튼, 그래서인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점까지는 그 목표를 이뤄내지 못한 상태이고, 중간에 크게 좌절했던 적도 있다. 이 실패의 경험이 내게 남긴 상흔은 의욕 상실과 무기력감이었다. 그래서 이 때부터 입에 달고 살기 시작한 말이 앞서의 “그래도 해야지.”였다.

 이렇듯 행동하길 멈추지 않은 덕분인지, 시간이 흘러 기억이 차츰 풍화된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한결 괜찮아졌다. 그 당시의 실패는 여전히 아픈 손가락처럼 남아 있지만,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

 서론이 좀 길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실패 혹은 절망감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저마다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앞서는 나의 경우를 예시로 든 것이다. 애초에 실패를 실패라 치부하지 않는 것이 실패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방안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삶은 어찌 됐든 계속된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다시 나아가는 것이었다. 이 외에 어떤 것들이 삶을 지속하게 만들어줄까?

 여기, 37년간 끝내 제대로 된 성공을 맛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은 ‘부와 명예’로 한정하도록 하겠다. 이 사람이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큰 성공 없이도 갖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지, 먼저 그의 생애를 주요 특징적인 사건들 위주로 소개해보려 한다.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의 한 도시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V는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성직자가 되고자 했으나, 번번이 신학대학 입학에 실패했다.

1869년 7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삼촌이 운영하는 화랑에서 판화를 복제해 판매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고객과의 갈등으로 인해 비자발적으로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1873년 6월
화랑을 옮긴 후, 열아홉 살의 하숙집 딸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다.

1875년 5월-1876년 3월
성서를 탐독하기 시작하면서 종교에 몰입하게 되자 미술품 거래 일을 혐오하게 된다. 그 결과 고객들과 동료 직원들과의 관계가 나빠져 직장에서 해고된다.

1878년 7월
전도사가 되고자 하였으나 광적인 신앙심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봉사 정신 등 여러 이유로 다른 종교인들과 마찰을 빚었다.

1879년 여름
V는 동생의 권유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82년 1월
작업장을 얻어 정착 후 농촌 생활을 그리는 화가가 되겠다는 다짐을 한 와중에, 매춘부이자 알코올 중독자, 매독 환자인 한 여자를 알게 되어 집으로 데려온다. 이로 인해 가족 및 동료 화가들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런 한편, 열두 점의 스케치를 그려 돈을 받기도 했다.

1882년 11월
V가 처음으로 제작한 석판화를 본 화상이 특별 주문을 의뢰하여 기쁨을 맛보았다.

1883년 9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여자와 헤어지고 지역을 옮겼으나,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버렸다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1884년 여름
연상의 여자와 사귀면서 결혼까지 고려하였지만, 그녀의 가족이 반대하여 헤어지게 되었다.

1885년 3월
심각한 갈등을 여러 번 겪었던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1885년 11월-1886년 1월
도시 풍경과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고자 다른 도시로 이사를 하였으나, 신경과민 증세가 심해지자 그 곳을 떠났다. 이후 정착한 대도시에서 다른 화가들과 어울리며 과음과 퇴폐적인 생활에 빠졌고, 건강이 나빠지는 한편 화풍에 변화가 생겼다. 한 모델과 사귀기도 했으나 곧 헤어졌다.

1886년 11월
한 전시회에서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V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여기서 짧고 굵은 우정을 나눌 동료 화가 P를 만나게 된다.

1888년 2월-12월
200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으나 대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 새로운 작업실에서 P와 공동생활을 하며 우정을 쌓았지만, 이내 작품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달라 갈등을 빚었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잘랐고, 친구와는 다른 곳으로 떠난다. 더하여 이 기간 동안 양극성 장애와 조현병을 앓아 종종 심각한 발작을 일으켰다.

1889년 1월
회복 후 그림을 지속적으로 그려나갔으나 환각 증상이 나타났고, 이를 본 주민들의 고발로 3월 말까지 병원에 강제 입원하게 된다. 이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200여 점에 이르는 그림을 그린다.

1889년 5월-12월
죄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리던 V는 요양원으로 들어간다. 그러던 중 작품 두 점이 전시회에 전시되어 좋은 평가를 받으며 이 시기에 V의 작품은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점점 더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12월 말에는 일주일이나 계속된 발작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1890년 1월-5월
유화 작품이 전시된 후 권위 있는 평론가에 의해 호의적인 평론이 기고되기도 했다. 하지만 간질성 발작이 점점 잦아지는 데다 요양원 생활을 견딜 수 없어 다시 한 번 이사를 했다.

1890년 6월
건강이 나빠진 동생을 만나러 갔다가 동생과 돈 문제로 다투고 돌아왔다.

1890년 7월 27일
가슴에 총을 맞고 다락방의 침대 위에 피를 흘리고 누워 있는 V의 시신이 발견된다.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숨이 완전히 멎지 않은 V는 동생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동생의 곁에서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생애만 보고서 V가 그림을 계속 그려나간 원동력이 무엇이었을지는 알기 어렵다. 우선 이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밝혀보겠다. 누구의 이야기인지 아마 중간에 짐작한 사람도 있을 것 같다. 3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이 인물의 이름은 빈센트 빌럼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 편의상 이름의 가장 앞 글자를 따 그를 V로 표기하였으며, 이야기 중간에 등장하는 P는 폴 고갱이다.

▲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1889, 오르세 미술관.

 사실 작은 성취나 긍정적인 피드백도 ‘성공’에 포함된다고 범주를 넓힌다면, 앞서 고흐를 ‘성공을 맛보지 못한 이’로 소개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만 팔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유화 작품에만 한정된 이야기이며, 그의 생애 말기에는 작품에 대한 호평을 받으며 차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 고흐가 흔히 비운의 화가로 불리는 이유는,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떨칠 즈음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됨과 동시에 부와 명예를 일구기 전에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인지 타살인지 다소 논란이 있어, 이 부분은 논외로 하겠다.)

사후 1901년, 즉 고흐가 생을 마감한 지 10여 년 만에 그의 작품은 파리 전시회에서 인기를 얻으며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야수파나 표현주의 등 현대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대 기준으로 봤을 때 여전히 젊고 한창 경력을 꽃피워 나갈 37세의 그가 10년만 더 살아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흔히들 성공했다고 표현할 만한 것들, 부와 명예를 모두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비록 고흐가 바라던 것이 부와 명예가 아니라 할지라도, 제 3자의 시선에서 그의 삶은 정점에 이르지 못하고 실패로 끝난 듯 보이기 쉽다. 그의 생애를 다시 살펴보면, 연모하던 이성들이나 우정을 쌓았던 동료 화가와의 관계도 멀어지고 신체적·정신적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가로 활동하는 내내 동생이나 주변 지인들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아 겨우 생계를 꾸려나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고흐는 1881년 12월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890년 7월 29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8년 8개월 동안 879점의 그림을 남겼다. 여기서 다시, 순탄치 않은 삶을 살며 큰 성공을 맛보지 못했던, 실패감을 수없이 겪었을 그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을지 궁금해진다. 고흐가 꾸준히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일이 즐거웠고 적성에 맞았기 때문일까?


 늘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고독했던 고흐는 그의 후원자이자 동반자였던 네 살 터울의 동생 테오와 1872년 8월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650통이 넘고 그 밖에 어머니, 여동생 윌, 동료 화가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일부 남아 있다. 그 편지들의 내용을 보면, 고흐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작업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던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편지의 일부를 발췌하여 여기에 옮긴다.

최근 내 생활이 더 보잘것없어지면서 삶 자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비관적인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너와 함께 보낸 시간 덕분에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유쾌한 기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 살아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 동생 테오에게 쓴 1879년 10월의 편지 中

 이 대목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사랑'이다. 이 단어는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 중에서 종종 등장하는 키워드이다. '사랑'을 주거나 받기 위한 전제 조건은 특정한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고흐는 화가 공동체를 형성하기를 원하는 등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중시했으며, 동료 화가들과 교류하고 대화를 나누기를 좋아했다. 정신 이상 증세로 인해 때로는 사람들과 갈등을 빚거나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흐가 본인의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애정했던 동생이 늘 마음 한구석에서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처음부터 성공할 수는 없겠지. 마우베는 내가 붓을 제대로 쓸 수 있게 되려면 최소한 열 번은 실패해야 할 거라고 말하더구나. 하지만 그런 후에야 더 나은 미래가 있을 테니 실패해도 낙담하지 않으면서 침착하게 작업하고 있다.” - 동생 테오에게 쓴 1882년 1~2월의 편지 中
“난 성공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려 한다. … 우리가 열정을 잃지 않고 계속 노력한다면 네가 더 이상 돈을 보내지 않아도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 동생 테오에게 쓴 1882년 1~2월의 편지 中

 또 한편으로, 고흐는 생각보다 꽤나 '낙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항상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듯한 말을 자주 편지에 드러내곤 했다. 이는 동생 테오 역시 고흐에게 '형은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거야'라는 기대를 종종 심어주었기에 그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본인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굳은 심지로 일을 꾸준히 밀고 나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미래에 대한 낙관 혹은 희망' 역시 실패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요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 동생 테오에게 쓴 1882년 1월의 편지 中 
“테오야, 나는 미래를 예견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한다는 법칙은 알고 있다. 10년 전을 생각해보자. 그때는 모든 것이 달랐지. 환경, 사람들의 분위기…. 그러니 앞으로 다가올 10년 동안에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의 작품은 남을 것이다. 나는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더 적극적인 사람이 더 나아진다. 게으르게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느니 실패하는 쪽을 택하겠다.” - 1885년 7월의 편지 中

 나아가 단순히 희망찬 미래를 '생각만' 하기보다, 고흐는 그 미래를 향해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다. 수험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똑같은 행동을 매일같이 해나가는 것은 고역이고 반드시 권태로워지는 때가 온다. 그림을 계속해서 그려나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 고흐가 무명 시절 동안 수시로 겪었을 슬픔과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이러한 절망의 굴레 속에서도 그는 '행동'했다. 행동을 하는 것의 이점은, 행동을 통해 때로 '성취'를 맛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흐도 본인의 실력에 발전이 있음을 발견했을 때 기쁨을 느꼈으리라는 것을 편지의 내용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에 집중하고 행동하기'로 스스로를 단련시키며 '성취감'을 느끼는 것. 이것 또한 고흐의 작품활동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너는 내가 화가가 된 것을 후회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말하겠지.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그런 후회를 하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 충실한 훈련은 게을리한 채 오로지 승리자가 되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왔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오직 그 하루만 사는 사람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지루하게 생각하는 해부학, 원근과 비례 등에 대한 공부를 즐겁게 할 정도로 그림에 신념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면 계속 노력할 것이고, 느리지만 확실하게 자기 세계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 동생 테오에게 쓴 1882년 3월의 편지 中

 그의 삶의 흔적이 남기고 간 것은 비단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멋진 예술 작품들만이 아니다. 그의 편지 내용에서, 그의 생활방식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을 헤아려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인생은 꽤나 살 만하다는 것, 미래에 대한 낙관과 기대와 희망은 사람이 끈질기게 신념을 밀고 나가는 데에 필요하다는 것을 배울 지도 모른다. 혹은 그가 오히려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자유로이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었다거나, 성공하려면 실패를 겪더라도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것이거나, 건강이 최고라는 것 등 해석은 다양할 것이다. 느낀 바는 각자의 자유에 맡기겠다.

 다만, 나는 이 글이 아직 실패의 과정을 여전히 지나고 있는 사람에게 가 닿기를 바란다. 이 글이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혹여나 고흐의 삶이 당신에게 변화를, 용기를 줄 지도 모르니 그 가능성에 기대고 싶은 것이다.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적합한 방법은 각기 다를 테니 당신이 현재 겪고 있는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일반화된 행동지침을 제시하진 못해도, 고흐의 삶에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어간다면 그것으로 내가 글을 쓴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그리고 동생 테오라도 있었던 고흐와 다르게 설령 본인의 마음을 알아주는 다른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본인 스스로를 믿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흐가 말한 '사랑'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부디, 먼 훗날 지금의 실패를 바라보았을 때 그것이 성장의 발판이 되었다며 웃어넘길 수 있을 날이 찾아오기를. 그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천천히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끝 모를 고통에 지치기 마련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여년 간 정진해 나간 고흐처럼.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 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하게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 동생 테오에게 쓴 1884년 10월의 편지 中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 까마귀가 나는 밀밭, 50x103cm, 캔버스에 유채, 1890, 암스테르담 반 고흐 뮤지엄 소장.

 

- 이 글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주로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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