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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에 관한 가장 유명한 명언이 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발명왕 에디슨이 한 말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는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실험 실패를 경험했다고 해요. 그는 많은 가설을 세웠고 전부 하나 하나 실험하고 도전했으나 다 실패했던 거죠. 그러나 왜 실패했는지를 스스로 의문을 갖고 생각하며 가설을 수정했고 ‘전구 발명’이라는 성공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그에게 실패는 성공으로 도달하는 과정이었던 겁니다.
▲국립중앙과학관 영상 ‘에디슨 하우스의 비밀’ 속 에디슨.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해 제작된 해당 영상 속에서의 에디슨은 자유롭게 움직이며 우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패를 통해 성공한 사례는 이외에도 많습니다. 접착력 좋은 발명품을 만들다가 실패했는데 그게 ‘포스트 잇’이 되어 뗐다 붙였다 하며 재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발명품이 되었다거나 하는 일화들 말이죠. 하지만 전구도 그렇고 포스트잇도 그렇고, 결국에는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전까지 실패했던 과정들이 아름답게 포장되는 것이 아닐까요?
실패 자체에 대한 보상은 없습니다. 실패는 진짜 성공을 위한 디딤돌, 일종의 수단에 불과하죠. 그렇지만 어쨌든 과정으로서의 실패도, 해피엔딩으로서의 성공도, 두 가지 결말 중 하나라도 보기 위한 전제 조건은 도전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어떤가요?
2024년 11월, 따끈따끈한 인터뷰를 하나 같이 보겠습니다. 인터뷰 대상은 실패연구소장 조성호 씨입니다.
▲경향신문 기사 “효율성만 쫓는 사회가 실패를 두려워하게 만들어(기자 이종섭)” 속 실패연구소장 조성호 씨의 모습. 학내에서 열리고 있는 ‘제2회 실패학회’ 행사장에서 전시물을 소개하고 있다.
일단 그전에, 실패연구소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지 않나요? 실패연구소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고 무엇을 연구하고자 하는 걸까요?
실패연구소는 2021년 6월, 카이스트 산하 기구로 설립되었습니다. 카이스트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는 과감한 도전정신 함양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이 목표를 위해 세 가지 미션을 내걸고 있습니다.
💁하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실패 사례를 발굴하고, 경험을 수집하여 분석을 통해 시사점을 도출합니다.
💁둘, 실패현상에 대한 체계적 이해의 틀 마련을 위해 학제간 논의를 촉진하고 의제를 생산합니다. 실패지식을 활용하고 자산화하기 위해서 DBdata base를 구축하기도 하죠.
💁셋, 실패지식에 기반하여 조직문화, 정책 및 사회적 문제 해결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 합니다. 실패지식을 공유하고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콘텐츠도 기획하고 있구요.
콘텐츠의 일환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2023년에 진행한 2주간의 실패주간입니다. 일상에서 포착한 실패의 순간들을 사진으로 찍어 전시하기도 하고, 망한 과제 자랑대회를 열기도 하고, 연사를 초청해 실패를 성공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주제로 실패세미나를 운영하기도 했지요. 특히 망한 과제 자랑대회 중에는 ‘암 연구하다 암 환자 됐지만’ 이라거나 ‘티코 타고 유라시아 질주 꿈꿨지만 망했다’는 캐치프라이즈들이 눈에 띄었구요.
자,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 사회는 어떤가요? 대학생의 실패는 아직까지는 귀여운 수준일지도 모릅니다. 조성호 실패연구소 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해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실패하면 안되는 것처럼 배운다. 연구도 마찬가지고 결과물은 다 성공한 것만 세상에 나온다.”, “연구를 하다보면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인데 밖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과정이 왜곡되고 실패하면 큰 일 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카이스트 학생 상당수는 주변의 큰 기대를 받고 자라다보니 뭔가를 실패했다는 애기를 꺼내기가 더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말이죠.
실패연구소는 올해(2024년 기준) 행사에는 앞서 실패에 관한 대국민 인식조사도 진행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실패를 성장과 학습의 기회로 여기기보다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고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고 해요. 젊은 세대일수록 ‘실패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두려워하고, 스스로 ‘도전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비율도 높았습니다. 기성세대가 성공에 필요한 요소로 노력이나 도전 정신을 중시하는 반면 젊은 세대는 타고난 재능이나 배경 등 외적 요소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라고 하죠. 이에 대해 조성호 소장을 덧붙입니다.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성공 신화를 갖고 있어요. 단기간의 고속성장은 효율성에 기반하고, 효율성을 추구하려면 시행착오나 실패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그런 성공 방식과 문화에 익숙한 기성세대는 익숙한 방식으로 젊은 세대를 교육하죠. 경제적 효율성만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인문사회학적 관점이나 정신 역량을 키우기 어렵고,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인재도 나오기 어려운 법입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실패연구소는 많은 실패 사례를 공유하려고 하고, 그래서 오늘 이 글에서도 실패 사례를 하나 살펴볼까 합니다. 이미 수많은 실패 사례들이 성공 신화의 디딤돌로 나와 있지만 좀 더 시의성에 걸맞은 걸로요.(아마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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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성에 걸맞은 거라니, 어떤 걸 들고 올지 궁금하신가요? 이 글을 구성하는 동안 옆에서 친구는 이런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모 대통령이 계엄을 실패한 사례로 써봐.” ㅡ.ㅡ;; 그렇지만 실패는 성공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고 했잖아요? 실패한 계엄이… 무언가의 밑거름이 될 순 없다고 생각하기에 웃고 넘어가기만 했습니다. 계엄이 실패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다룬다면 썩 괜찮은 주제의 새로운 글이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각설하고, 실패의 반대말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답은 성공이죠. 둘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도 계속 언급했으니까요. 그럼 시의성과 성공을 합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가장 성공적인 사례를 떠올려 봅시다. 아마 계엄 사태가 아니었다면 이 사건이 지금도 계속 더 화자되었을 거에요.
각자 다른 성공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에디터는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떠올라요.
한강 작가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질문하면 성공의 의미에 명예가 포함되느냐, 명예만이 기준이 되느냐 등으로 철학적 물음이 뒤따르기 때문에 실패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하자구요. 노벨상은 인류에게 있어 당해에 강한 울림을 준 이들에게 주는 상입니다. 울림을 주고 인류의 삶에 변화를 주었다는 점에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여담이지만 밍기적의 거시적 주제의식도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밍기적의 글은, 여러분을 변화시켰다면 성공한 글입니다.) 그렇다면 인류 삶에 변화를 주지 못한, 즉 실패한 결과에는 노벨상이 주어질 수 없겠지요? 여기에서의 실패의 의미에는 단순한 실험 실패도 포함될 겁니다. 에디슨은 결국 전구를 발명했어요. 그가 발명한 전구에 대해서는 노벨상을 줄 수 있지만, 그거 전구를 발명하기에 앞서 실패한 결과물, 예를 들자면 너무 얇게 만들어서 다 타버린 필라멘트 전구에는 노벨상을 줄 수 없겠죠.
하지만 실패한 실험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실패가 뒤이어진 성공의 뒷받침이 되지 못했음에도 노벨상을 받은 사례를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이 글의 주인공은 실패한 실험을 설계한 과학자 마이컬슨과 몰리입니다. 결국에는 실패의 다양한 사례 중 하나를 소개하는 것이지만, 더불어 여러분에게 과학 지식을 쌓아주고픈 에디터의 작은 욕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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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마이컬슨과 몰리가 살았던 시대는 19세기 후반, 당대 물리학자들은 빛을 파동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파동이란 에너지가 공간이나 매질媒質을 통해 전달되는 방식인데요, 즉 물질 자체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지닌 에너지만 이동하는 현상이에요. 소리는 파동의 한 종류인데,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 우리에게 도달하는 경로는 다음으로 표현할 수 있죠.
물체가 진동 → 공기를 압축하거나 팽창 → 공기 분자가 밀리거나 당겨지면서 압축과 팽창의 반복(파동) 발생 이 에너지가 주변으로 전달되어 귀에까지 도달 |
그리고 파동을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면 아래와 같구요.
지진도 파동이라서 땅이라는 매질을 통해 에너지를 전달하죠. 파도도 파동이라서 물이라는 매질을 통해 파도가 일어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파동의 특성이, ‘물체는 움직이지 않고 에너지만 전달된다’는 점이에요. 빛을 두고서 다양한 의견이 분분했는데, 그중 하나가 빛을 파동이 아닌 입자로 보는 거거든요. 그러나 입자는 파동과 달리 ‘물체가 움직여서 에너지를 전달한다’ 입니다. 예를 들어, 볼링공은 물체이고 입자입니다. 볼링공을 굴리면 볼링공이라는 물체는 직접 움직이죠. 그리고 사람이 미는 힘을 받았기 때문에 운동 에너지를 가져요. 이 운동 에너지는 멀쩡하게 잘 서 있던 볼링핀과 부딪히며 운동 에너지가 힘 에너지로 전환되고, 그 힘으로 볼링핀을 쓰러뜨리는 겁니다. 에너지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물체가 직접 움직였죠. 그럼 빛은 파동일까요 입자일까요?
앞서 말했듯 19세기 후반 물리학자들은 빛을 파동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어떻게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던 걸까요? 파동의 대표 사례인 소리, 지진, 파도는 모두 그 에너지의 흐름이 보이는데, 그리고 입자의 대표 사례인 볼링공도 물체가 움직이는 게 보이는데, 그냥 한 줄기로 쭉 직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빛은 그게 파동처럼 움직이는지, 작은 입자 알갱이들이 움직이는지, 어떻게 안답니까?
19세기 초반, 토마스 영Thomas Young이 이중슬릿 실험이라는 걸 합니다. 두 개의 좁은 틈(슬릿)을 통해 빛을 통과시켜보죠. 그러자 한 줄기였던 빛이 슬릿을 통해 벽에 가 부딪히니 벽 표면에는 하나의 밝기로만 빛나는 빛 한 줄기가 아니라 밝고 어두운 줄무늬, 즉 음영이 생기는 게 아니겠습니까? 한 줄기로 들어왔던 빛이 두 군데의 슬릿으로 분리되면서 빛이 나뉘었다는 뜻이거든요. 나뉜 빛은 벽으로 도달하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히죠. 이걸 간섭 현상이라고 하는데 간섭 현상을 통해 보이는 음영 차이, 즉 물결 무늬는 빛이 파도와 같은 파동이라는 걸 증명하는 중요한 실험이었습니다.
▲빛이 입자라면 왼쪽 그림처럼 실험 결과가 나왔겠지만, 파동이라서 오른쪽 그림처럼 실험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19세기 후반, 물리학자들은 빛이 파동의 성질을 지녔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렇지만 파동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이동하는 데 필요한 매질이 있어야 합니다. 소리는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 에너지를 전하고, 지진은 땅이라는 매질을 통해, 파도는 물이라는 매질을 타죠. ‘그럼 빛도 공기를 타고 우리에게 전달되는 거 아냐?’ 하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문제는 빛 자체가 저 멀리 우주에 있는 태양빛을 통해 온단 말이죠. 그리고 그 우주에는 공기가 없다는 겁니다. 그 당대 과학자들이 어떻게 우주에는 공기가 없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래서 우주에서 파동을 전하는 물질로서 ‘에테르’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마이컬슨과 몰리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물리학자들은 에테르는 우주 전역에 퍼져 있으며, 빛이 이 에테르를 통해 전파된다고 가정했습니다. 또한, 에테르는 정지한 상태로 존재하고 지구가 에테르를 통과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지구의 운동에 따라 빛의 속도가 에테르에 대해 상대적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죠. 마이컬슨과 몰리는 지구가 에테르를 통과할 때 빛의 속도가 달라질 것인지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 에테르의 존재를 검증하려는 것이 실험의 주된 목표였구요.
마이컬슨과 몰리는 빛이 두 개의 빛으로 분리될 수 있도록 반투명 거울을 비스듬히 세웠습니다.
▲『빛의 물리학』, EBS 다큐프라임 「빛의 물리학」 제작팀 저술. pp.44-45 중 마이컬슨-몰리 실험 설계를 설명하는 이미지.
빛이 반투명 거울을 통과하면 직진하는 빛과 직각으로 반사되는 빛으로 나뉘어지겠죠. 그리고 두 과학자는 광원과 반투명 거울과 일직선이 되는 쪽에 거울 한 개, 광원과 반투명 거울과 직각을 이루는 쪽에 거울 한 개를 놓았습니다. 만약 에테르가 있다면 둘 중의 하나의 빛은 에테르 바람(?)에 맞아 늦게 도달할 거라고 예측한 겁니다.
그러나 결과는 웬걸, 언제 빛을 쏘더라도 두 빛은 항상 함께 도달했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지구의 공전 속도가 바귀어도 결과는 같았습니다. 즉, 두 사람의 실험은 에테르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실패한 실험이었죠. 그러나 증명에 실패한 이 실험은 새로운 사실을 끌어냅니다. 빛은 어떤 운동 상태에서 관찰하든 늘 그 속도가 같다는 사실이죠. A에도 B에도 빛은 똑같이 도달했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속도가 절대적으로 같을 수는 없었습니다. 속도는 상대적인 것이었거든요. 왜냐구요?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있어 빨리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에게 있어 자동차의 속도는 다릅니다. 속도는 상대적이에요. 그런데 마이컬슨과 몰리가 에테르를 증명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 실험을 통해 빛의 속도는 절대적이라는 게 밝혀졌죠. 이제 바톤은 아인슈타인에게 넘어갑니다.
상대적인 줄 알았던 속도가 빛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이다! 이 아이러니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이제 모든 당연했던 것들을 의심하게 됩니다. 절대적인 줄 알았던 것이 알고보니 상대적 일수도 있는 걸까? 아인슈타인은 시간에 주목합니다. 그때도 충분히 시간은 상대적으로 느껴졌거든요. 지구 이쪽의 시계는 12시를 가리키는데, 어딘가는 오후 3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시간 또한 상대적일수도 있겠다는 의심을 품고 사고실험을 한 결과 특수 상대성이론, 즉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과학 논리를 발표합니다.
이건 단지 철학적 사고 실험 결과가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충분히 증명 가능한 이론이었어요. 빛의 속도는 절대적이니, 변하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시간을 측정해 봅시다. 아인슈타인은 광자 시계라는 개념을 떠올립니다. 광자 시계란 위 아래가 거울로 되어 있어 빛을 쏘면 빛이 무한으로 위 아래 위 위 아래로 춤을 추는 시계입니다. 광자 시계의 거울은 서로 1m 떨어져 있고, 빛이 위쪽 거울에서 아랫쪽 거울, 즉 1m를 가는 동안을 1초라고 설정해 봅시다. 가만히 서 있는 우리는 빛이 위 아래 위 아래 위 5번 왔다 갔다 하면 5m, 즉 5초가 지납니다. 그럼 움직이는 우주선 안에서의 광자 시계는 어떨까요? 우주선 안의 탐사자 입장에서는 빛이 위 아래 위 아래 위 5번 왔다 갔다 하는 동안 5m, 즉 5초가 흐른 것으로 보이죠. (관련 이미지 ▼)
그렇다면 지구에서 우주선을 바라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우주선이 이동하는 만큼 빛도 이동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광자 시계 속 빛이 위 아래 수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대각선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죠. 그럼 우주선 안의 사람이 .oO(광자 시계 속 빛이 5m를 움직였군) 하고 생각할 때 지구에서 봤을 때는 .oO(우주선 안의 광자 시계가 5m보다는 더 움직였는데?)하고 보이는 겁니다. (관련 이미지 ▼)
우주선 안의 시간 5초가 지구에서는 5초 그 이상일 수도 있는 거고, 그래서 수많은 공상과학 영화에서 우주 탐사자와 지구에서 그를 기다리던 가족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으로 연출되는 것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 아버지가 우주 탐사를 나가기 전 딸은 어린 아이였지만(좌) 아버지가 우주 탐사를 다녀온 사이 아버지는 나이를 먹지 않았고 딸만 호호 할머니가 되었다(우). 시간이 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우측의 아버지가 회춘한 것 같아 보이는 건 조명 탓이다.)
즉, 시간은 상대적입니다. 그것이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입니다.
인류 가장 위대한 이론 중 하나라는 특수 상대성이론의 영광을 마이컬슨과 몰리에게! 그래서 두 과학자는 실패한 실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최초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에디터가 ‘하지만 실패한 실험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실패가 뒤이어진 성공의 뒷받침이 되지 못했음에도 노벨상을 받은 사례를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 반박의 의견도 있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이컬슨과 몰리의 실패는 특수 상대성이론의 발견으로 이어졌고, 성공의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에디터는 또 이런 말도 했어요. ‘에디슨은 결국 전구를 발명했어요. 그가 발명한 전구에 대해서는 노벨상을 줄 수 있지만, 그거 전구를 발명하기에 앞서 실패한 결과물, 예를 들자면 너무 얇게 만들어서 다 타버린 필라멘트 전구에는 노벨상을 줄 수 없겠죠.’ 라고 말입니다. 즉, 노벨상을 받는다면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만 수상했어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다 타버린 전구, 즉 마이컬슨과 몰리에게도 노벨상을 시상했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있지 않을까요?
제목을 ‘가장 위대한 실패’라고 했으니 지나친 비약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마이컬슨-몰리의 실험에 붙은 이 수식어는 에디터가 임의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물리학계에서 둘의 실험은 가장 위대한 실패로 불리고, 노벨상 수상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실패에 대한 소개와 앎이, 여러분이 세상을 바라보는 지평선을 넓혀 21세기인 지금도 성공에 기여하는 가장 위대한 실패이길 바라봅니다.
별개의 논의로, 과학사에는 마이컬슨과 몰리의 실패보다도 더 확실한 실패가 있긴 하죠. 성공에 디딤돌조차도 되지 못했고,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조차도 몇번이나 과학 발전사의 암흑기라고 표현했던 천동설 말이에요. 천동설이 있었기 때문에 지동설을 알게 된 것도 아니고, 천동설은 오히려 지동설이라는 진리가 알려지는 걸 방해하기까지 했죠. (엄밀하게 말하면 당대 종교와 사회가 방해한 것이니 천동설은 억울하기만 하겠지만요..) 그래서 토머스 쿤Thomas Kuhn도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과학 발전은 누적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어요.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등장했다고 기존의 천동설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서 과학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쿤의 이론에 따르면, 이전의 과학이 단순히 틀렸다고 보기보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 체계 내에서 유용하게 기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일어났다고 해서 이전의 천문학적 발견이 전적으로 실패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관점이 가능하죠.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과학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 역시 과학 이론은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을 전제로 하며, 과거의 이론이 완전히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이론으로 대체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 글의 앞서 있던 실패연구소의 취지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사회가 바라보는 실패의 의의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볼 타이밍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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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에디터도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실패했습니다. 처음에는 실패라는 주제로 우리 사회 교육 정책의 실패에 대해 써보려고 했었죠. 중학교 자유학년제가 성공할 줄 알고 외국 사례를 도입했으나 우리나라 실정에는 맞지 않아 2025년부터는 모든 학교가 자유학기제로 의무 전환합니다. 정책이 축소된 거에요. 그런데도 고등학교에서는 2025년부터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됩니다. 실패하는데도 왜 자꾸 외국의 교육 정책 사례를 가져오는 걸까요? 이에 대해 써보려고 했으나, 레퍼런스를 찾기 어려워 기획 단계에서 그쳤습니다.
그 다음은 여전히 교육 현장에 머물러, 왜 아이들은 질문하기를 실패할까? 라는 의문으로 글을 써보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주제 또한, 결국에 완성되고 만 이 글과 마찬가지로 이미 많은 사유가 나온 주제입니다. 사회 분위기라든가, 뭐 그런 원인들 말이죠. 그래서 에디터는 아동발달과 심라학의 측면에서 접근하고 싶었어요. 우리는 성장하는 단계 중 어디 즘에서 질문하기를 멈추는지, 질문을 해야할 때나 질문을 받아 대답해야 할 때 우리는 왜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긴장되어, 머릿속에 있는 말도 잘 하지 못하는 생체 반응이 일어나는지, 뭐 그런 것들 말이죠. 이번 글은 다 써놓고도 에세이 같아 다 구겨 버렸습니다.
두 번의 실패를 겪었죠. 그래서 한 숨 돌리고자 한 주를 쉬었습니다. 마감 기한은 다가오니 초조하긴 했어요. 그때 제가 빠져 있던 책이 『빛의 물리학』이었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나를 구성하는 물리적 세계가 궁금해서 과학 교양을 쌓고자 읽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나름 의미 있는 실패, 마이컬슨과 몰리의 실험 현장을 만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사실 이 글의 출발점은 마이컬슨과 몰리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글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어? 두 사람이 이걸로 노벨상을 받았다고?' '실패한 실험으로 노벨상을 받은 거야 말로 성공의 객관적 지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노벨상 하면 최근에 한강 작가도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그럼 한강도 성공한 작가인 거겠지?' '그렇지만 상을 안받았다고 다 실패한 작가인 것도 아니잖아?' '우리가 너무 경쟁 사회에서 수상을 해야지만 성공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해주는 태도가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의 실패와 도전을 위축되게 만드는 거 아닐까?' '이런 실패를 인정해주는 글은 어떨까?' 예, 그 과정에서 서점을 뒤적이다가 『우리의 실패가 쌓여 우주가 된다』는 책도 만나게 됩니다. 수많은 실패담이 쌓여 있더라구요. 실패담들을 읽으면 나의 실패에 대해서도 어떤 배울 점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실패라는 건 조성호 실패연구소 소장도 말했다시피 드러나지 않을 뿐 성공 확률보다도 더 많이 존재하는 거라서 계속해서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참, 이 책의 마지막에 실패연구소 소장 인터뷰도 실려 있습니다. 그래서 덕분에 실패연구소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 글을 실패연구소의 이야기로 처음 시작할 수 있었어요.
▲『빛의 물리학』, EBS 다큐프라임 「빛의 물리학」 제작팀 저술.
수많은 과학 교양 서적 중에서 EBS야말로 가장 친숙한 대상이었다.

▲『우리의 실패가 쌓여 우주가 된다』, 기자 김지은 씨의 인터뷰집.
성매매 경험 당사자, 중독재활치료자, 전세사기 피해자의 이야기 등을 공유할 수 있다.
글을 쓰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도달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다니 아이러니하면서도 재미있죠? 실패가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면, 이번 글은 에디터 또한 글 쓰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주제 잡는 데에도 실패하기도 하고, 나만의 출구를 향해 나아가는 좌충우돌 과정으로요. 그렇게 나온 글은 그럼 성공한 걸까요? 아닐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글의 목적은 실패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 과학 지식 채널이 되어 있죠. 그 비난을 피하기 위해 곳곳에 쿠션을 넣어두긴 했습니다. ‘결국에는 실패의 다양한 사례 중 하나를 소개하는 것이지만, 더불어 여러분에게 과학 지식을 쌓아주고픈 에디터의 작은 욕심입니다.’라고요. 실패를 주제로 하여 실패 사례를 하나 더 보여주는 뻔한 글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밍기적에 이과 성향의 글이 가뭄이라는 걸 감안했다며 메타적인 이유로 핑계대고 도망쳐 봅니다. 목적 달성의 측면에서는 실패한 글일지라도, 불완전하기에 에디터는 이번 호의 글도 마음에 듭니다. 중요한 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 아니겠어요? 그리고 계속해서 글을 써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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