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온기 단편소설 모음
Intro
이번 주제가 정해질 때, 글감으로 쓸 수 있는 소재들은 넘치고 념쳐 어느 소재에 집중을 할 지 그저 선택의 문제일 것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제가 실패라니, 태어나서 가장 많이 해본 일이니, 하고 싶은 말도 할 수 있는 일도 많을 거라 생각했지요.
실패를 하고 싶다는 말 자체가 생경할 수 있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제가 오랜 시간동안 바라 왔던 일은, 객관적인 실패로 인한 가장 확실한 불행이었던 것 같아요.
실패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해답이 없는 실패와 비슷한 모양을 한 어떤 것들을 마주할 때, 누군가는 제 실패에 대해 배움을 준 값진 경험 이었을 것이니 너무 낙담하지 말라고 해주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 한대도, 나 하나만은 명확히 알고 있을 제 실책에 대해 쉼의 미학이랄 지, 좋은 경험을 했다랄 지, 그런 말을 붙여 포장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그렇다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을 따라 내 삶을 모양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에게 물어보았지요. 내게 가장 큰 실패는 뭘까? 가장 큰 실패가 무엇인 지 고르는 일은 아마 불가할테지만, 가장 아픈 실패는 인간관계에서의 실패, 그로 인한 인간으로서의 실격이라는 것은 고민도 없이 고를 수 있었어요. 가까운 관계 속에서의 반복된 실패는 그 무엇으로 회복될 여지가 있을까요.
실패.. 실패… 그 말을 계속 되내이다가 클레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하지 않은 일이 최악일까?
1. 죠와 케이의 이야기: 너는 겨우 그 정도 마음이었던 것이고, 나는 그 정도의 마음조차 아까웠던 거야.
이상하리 만치 더욱 어둑한 밤, 한 아파트 단지에서 두 남녀가 문자를 나눈다.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인 케이와 죠는 각자 다른 떨림을 가지고 서로를 향해 점차 가까워졌다.
K: 안녕 죠, 지금 니가 말해준 주소에 방금 도착했어.
J: 금방 내려갈게. 조금만 기다려줘.
죠의 눈 앞에 비상 깜빡이를 킨 채 전면 주차해둔 붉은 색상의 차 한 대가 들어왔다.
J: 혹시 너 비상 깜빡이를 켜두고 있니?
K: 아니, 하지만 시동을 켜두었으니 쉽게 발견할 수 있을거야.
죠는 이리오라는 듯 눈짓을 하는 붉은 색 차를 뒤로 한 채, 한참을 헤매었다.
J: 미안하지만 보이지 않는 걸
K: 앞쪽으로 계속 걸어와
J: 내가 보이는 거야?
K: 앞으로, 맞아 그 방향으로. 잘 하고 있어.
죠는 지켜보고서 자신을 마치 아바타 처럼 조정하는 사내가 이해는 잘 되지 않았다. 죠가 갓길로 들어서자 검은색 니산 차량 한 대가 나타났다.
K: 죠?
J: 케이?
장발의 남자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타라는 듯 손짓을 짓는다.
K: 맞아, 얼른 타.
죠는 조심스레 상체를 기울여 그의 얼굴을 살핀다. 오돌토돌한 피부가 빛에 비춰져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에게선 진한 향수 냄새가 퍼졌다.
K: 내가 늦진 않았지?
J: 아냐, 태우러 와주어 고마워.
K: 괜찮아. 그럼 내가 모셔도 괜찮을까?
J: 하하 모시다니, 그런 말을.
죠는 케이의 말에 어색한 듯 웃어보였다.
케이와 죠는 그렇게 첫 만남에 목적지도 없이 늦은 밤 도로를 여기 저기 배회했다. 그 곳은 텅빈 공터이기도, 길이 더 나있지 않는 숲길의 끝이기도, 버려진 철도길 근처이기도 했다.
어느 인적이 드문 야외 주차장에 다다른 케이는 가장 안쪽까지 달려 조수석이 주차선을 한참 벗어난 채 정차했다. 라디오 볼륨을 줄이던 손은 어느샌가 죠의 손등을 쓸었다.
K: 여기야 내 비밀 아지트. 꽤나 근사하지?
겸연쩍 스러운 그의 목소리에, 죠는 이게 무슨 비밀 아지트냐며 장난스레 놀려댔다.
K: 왜 비밀 스러운 지 알려줄까?
그는 부르튼 입술에 침을 바르며 죠에게 다가갔다.
J: 잠시만, 이건..
녹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차량에 설치해둔 블랙박스의 여성 안내음이 들리자 죠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K: “걱정마, 차량 외부만 촬영되는 거니까. 이제.. 가만히..”
케이는 조수석 안전벨트를 풀며, 작정을 한 듯 행동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면도되지 않은 케이의 턱선의 까끌함이 기분 나쁘게 죠의 볼에 닿았고, 케이의 메마른 입술이 허락없이 죠의 입술 사이를 파고 들었다.
뒷머리를 잡아채지 죠는 아성이 무너뜨려졌다. 단추가 있는 옷을 입은 죠에 번거롭다는 듯, 한 손으로 단추를 풀어내는 손길이 처음인 듯 보이진 않았다. 다른 한손은 뱀처럼 등 허리를 옭아매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 적절한 타이밍에 흐름을 끊는 블랙박스에 녹음된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녹화가 종료되었습니다.
뒷머리를 잡던 케이의 손길에서 잠시 벗어남과 동시에 죠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K: 뭐야, 여기까지 와서 얌전 떨 거였어?
어안이 벙벙해진 죠는 셔츠만 매만진 채 대답하지 않고 소지품을 챙겼다. 물건들이 부닥치는 소리가 어색한 정적을 채웠다. 죠는 차 문을 열고 빠른 발걸음으로 주차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케이는 서두르지 않고 시동을 걸어 죠의 뒤를 따라 붙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뒤에서 강하게 쏘아져 죠는 정신을 잃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바로 뒤 까지 따라붙은 케이는 창문을 반쯤 열었고 어떤 말을 전하기 위해 브레이크에 발을 얹은 채 어정쩡한 자세로 몸을 반쯤 뺐다.
K: 뭐야.. 시시하게. 설마 너 처음이었던거야?
J: 쓰레기 같은 자식. 넌 최악이야.
죠의 노려보는 눈빛을 신경쓰지 않는 듯 케이는 비식 웃어댔다.
K: 너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마지막 일격을 날린 케이는 속도를 내 조의 바로 옆을 아슬하게 지나쳤다. 그렇게 케이의 차가 먼저 주차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2. 제인과 막시무스의 이야기: 내가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건 당연하잖아.
영화가 시작하기 전 제인은 둥근 소파식 의자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렸다. 바느질 선을 따라 훑으며 기다림이 익숙하다는 듯, 휴대폰을 확인 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당연한 듯 30분은 늦을 것이 분명하였기에.
막시무슨 제인의 손을 덥썩 잡았다. 긴 손가락이 검지를 쓸어내릴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M: 영화 시작 아직 안 했지?
J: 아마 아직 광고 중일 거야.
M: 들어가자.
제인은 영화가 그다지 인상깊지 않았다. 보고서 기억에도 잘 남지 않는 그런 영화였다. 그저 도중 나온 잔인하게 살해되는 장면에 두 눈을 질끈 감았던 기억만 났다.
M: 역시, 전작보단 못 하지만, 쿠에보 감독은 실망시키진 않는다니까?
막시무스는 살해 장면을 따라하는 듯한 모션을 취하며 상영관 밖으로 빠져나갔다. 제인은 평소 건들거리는 그의 걸음거리가 오늘 따라 더 거슬리는 듯 했다.
M: 오늘은 내가 마무리할 일이 좀 있어서, 저녁은 다음에 먹자. 데려다 줄게.
제인은 허기가 졌으나, 바쁘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멀지 않은 곳에 제인의 집이 있었으니 집에 도착해서 간단히 요기를 할 작정이었다.
차가 밀리지 않아 제인의 집에 금세 도착했다. 막시무스는 제인의 안전벨트를 손수 풀어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늘따라 왜이리 더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제인은 특유의 비릿한 체향이 섞이는 입맞춤을 의무감에 행했다. 늘 상 그랬다. 담배냄새인 지 가글 냄새인 지 알 수 없는 묘한 냄새가 섞여 심할 때는 구토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한바탕 파도가 지나간 후에야, 제인은 집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왜인지 힘이 빠지는 하루를 보낸 제인은 쓰러지 듯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울리는 휴대폰 알림음에 급히 탁상에 손을 뻗었다.
M: 난 잘 들어왔어.
J: 나도 지금 연락하려고 했는데, 잘 들어 왔다니 다행이다.
M: 후.. 피곤하네. 일이 많아서 요샌 계속 피곤한 것 같아.
J: 잘 쉬어야겠다. 다음주도 많이 바빠?
M: 알다시피, 나는 CEO로서 한 업장을 운영하고 있는 몸 이다보니..
J: 많이 바쁘겠네.. 나는 월요일이랑 화요일만 지나면, 퇴근 후에는 시간이 날 것 같아.
M: 흠.. 그래?
J: 응.. 자긴 다음주에 스케줄은 어떻게 돼?
M: 음.. 내가 시간을 내어, 너와 함께 해주기를 바라니?
제인은 그저 말을 아꼈다. 채팅에서의 간단한 말 한마디에서도 비소가 느껴지는 듯 했기 때문에.
그는 그저 확인 받고 싶었던 걸까?
M: 제인, 내가 지금 니 대답을 기다리고 있잖아.
M: … 제인?
M: ????
J : 미안, 뭘 좀 정리하느라고.
M: 그래, 다음부터 주의하도록 해.
그의 가볍게 던진 말 한마디에 느껴지는 사사로움, 힘주어 내뱉는 말 들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권위적임에, 틈을 주지 않고 몰아세우는 화법에 제인은 어떻게 대화를 진전해야할 지 가늠 조차 어려워보였다.
그의 사랑이,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든 상대를 향한 것이든, 그 형태의 사랑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있었다.
J: 미안하지만, 우린 대화를 그만하는 게 좋겠어.
M: 그게 무슨 말이야. 이게 무슨.. 난데없는..
J: 니 잘못이 아니야. 그냥 내가.. 느끼기에 우린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없어보여.
M: 그건, 너 자신에 대해 잘 몰라서 하는 말일 지도 몰라. 지금껏 난 만족시키지 못 한 적이 없다고.
제인은 어느새 얼굴 표정이 변해있었다. 침대에 반쯤 기댔던 몸을 일으켜 바로 고쳐 앉앗다.
J: 나에 대해 내가 완벽히 모를 수 있겠지. 하지만 나와 만난 지 이틀 된 니 말에 흔들릴 정도로 모르진 않아.
막시무스는 흥미롭다는 듯 제인에게서 온 메시지를 한참을 쳐다봤다. 감히 라고 생각했겠지.
M: 너, 실격이야.
둘의 대화창은 그렇게 사라졌다. 대화창이 없어지고 곧 바로 타이머를 설정해둔 전등이 계산된 듯 번뜩 꺼졌다. 얼마간 함께 했던 시간들도 그저 하룻밤 꿈 같았다. 제인은 눈에 아직 아른거리는 것들을 애써 제쳐둔 채 눈을 감았다.
.
.
.
3. 죠던과 행크의 이야기: 애초에 열렬히 사랑하지 않았으니, 권태로울 것도 없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 사이로 잔잔하게 흐르는 피아노 소리에 따라 권태로워 보이는 한 여성이 누군가를 기다린다.
점점 거칠어지는 비를 뚫고 한 남성이 들어온다. 그의 곰보피부 사이로는 땀과 비가 뒤섞여 송글송글 맺혀있고, 땀에 젖은 앞머리가 눈을 찌르자 대강 옆으로 넘긴다.
H: 자기 많이 기다렸어?
J: 아냐, 나도 조금 전에 왔는 걸. 밖에 비가 꽤 오나보다.
행크는 겉옷에 비를 털며 자연스레 앞자리에 있던 의자를 끌고 와 조던의 곁에 앉았다. 조던은 옅은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며 행크가 눈치 채지 못 할 정도로 아주 조금 벽쪽으로 몸을 기댔다.
J: 밥은 먹었고?
H: 나는 사교 모임이 끝나는 대로 사람들과 같이 먹었지. 자기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J: 그러게, 몸이 좀 안 좋아서.. 아쉽게 됐네..
H: 괜찮아, 다음엔 꼭 같이 가자, 나도 주문 좀 하고 올게?
J: 응..
H: 종일 뭐하고 지냈어?
J: 그냥 서점에 좀 들렀다가 오전엔 날이 좋길래 밖에 나가 산 책을 바로 조금 읽었어. 그리고는..
행크는 어느새 대화는 잊은 채 아이스크림에 몰두했다. 아이스크림의 원형을 거침없이 부숴가며 몰두하는 모습에 조던은 어느새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 주간 뭐했냐는 죠던의 질문에 행크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시작했다. 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는 행크의 모습이 죠던의 눈에는 마치 콧김을 내뿜는 경주마 같았다.
H: 그래서 말이야, 그 개자식이 으스대길래, 사장님 보고에 들어가서는 내가 아주 한 방 먹여줘버렸지.
J: 그런 일이 있었구나…
H: 그 후에는 말야..
죠던의 무채색 표정과 지쳐보이는 반응을 전혀 눈치 채지 못 하는 행크는 계속 해서 상대를 비아냥 대는 말을 해댔다.
지겨워..
한참을 말을 이어가던 휴스턴은 거친 욕설을 주변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내뱉고서야 만족스러운 듯 다시 스푼을 들었다.
J: 먹으면서 들어. 나 꼭 해야할 말이 있어.
H: 무슨 말인데 그래, 중요한 말이야?
J: 중요한.. 이야기야.. 반대편에 앉아. 마주보고 이야기 하자.
휴스턴은 엉거주춤 일어나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지금껏 한번도 얼굴을 이렇게나 일그린 채 심각한 분위기를 잡던 법이 없던 죠던이었기 때문이다.
J: 우리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H: 뭐라고?
휴스턴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숨길 수 없다는 듯 황당해했다. 어느새 아이스크림을 한 쪽에 밀어둔 채, 죠던의 손을 끌어잡았다.
이제는 손 끝에 감각이 둔해..
J: 미안해..
H: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J는 한 순간에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몇 초를 가만히 녹아가는 아이스크림만 쳐다보았다.
J: 정말 미안하지만.. 오빠를 사랑한 적은 없는 것 같아.
사랑한 적이 없다니, 그보다 잔인한 이별의 통보는 없었다. 차라리 이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저를 잊어달라는 말이 나을 듯 했다. 휴스턴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갔다.
J: 나도 많이 고민했고, 괴로웠어 많이..
H: 너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 괴롭다니.. 너는 조금도 노력하지 않았어.
H: 이건 명백히.. 명백한 배신이야.
죠던은 그의 말에 반박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은 듯 해보였다. 그저 조용히 시선을 땅으로 옮겼다. 휴스턴은 서슬퍼런 눈으로 조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두 뺨으로 눈물이 흘러 고개를 들기조차 힘들었다. 몇 분간의 회피가 이어지고, 휴스턴은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죠던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뒤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저 앉은 자리에서 빈 자리만 쳐다보았다. 죠던은 눈물들 사이로 옛날 옛적 양육자로부터 들었던 말이 들려왔다.
너는 감사할 줄을 몰라. 받은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 받을 자격이 없지.
얘야 너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아이라는 뜻이란다.
.
.
.
다시금 벨이 울렸고, 멍하니 있던 죠던의 곁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휴스턴이었다. 차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돌아온 듯 해보였다. 그는 길게 늘어진 목걸이에서 다정히 나눠가졌던 반지를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H: 너도 언젠간 같은 일을 겪게 되겠지. 너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사람이 나타나길 바랄게.
휴스턴은 금새 사라졌고, 죠던은 자신의 반지도 꺼내어 탁자에 두었다. 그녀는 더는 눈물이 나지 않는 듯 했다.
모든 관계가 죠던에게는 이제 그저 부질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너무 지쳐버렸어.
.
.
.
4. 제이미와 마이클의 이야기: 응어리진 마음을 이야기조차 해주지 않는 니가 숨막힌다는 거야
원형의 테이블에 네 명의 여성이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는 듯 해보였다. 그 중 한명은 노란끼가 도는 염색을 했고, 다른 한명은 도수가 높은 안경을 껴 상안부가 왜곡이 나있어보였으다. 넷은 비슷한 또래의 가까운 사이로 보였다.
A: 다들 잘 지냈어? 제이미 넌 지난 번엔 왜 안왔어. 얼굴 까먹겠다.
J: 미안해.. 급한 일이 생겨서..
A: 다들 별 일들은 없고? 베키 넌 카일이랑 연애 전선에 이상은 없고?
B: 너 잘 이야기 했다. 한숨만 나오지. 가끔은 배 나온 아저씨인 직장 상사인 토미가 카일보다 더 말이 잘 통할 때가 있기도 하다니깐.
B의 거침없는 화법에 나머지 셋은 웃음을 터트렸다. 토미는 B가 대화 중 여러번 거론하여 셋도 익히 들은 이름이었다. 그는 회사에서 퇴임을 앞 둔 연장자 중 연장자인 현장 근로자였다. 무려 결혼을 4번이나 했고.
B: 토미보다 내 마음을 더 모를 때가 있어서 가끔 정말 답답하긴 한데, 그래도 나한테 카일만한 사람은 없으니까, 결혼해야지.
C: 부럽다. 나는 있지 프렌즈에 나오는 레이첼 있지. 걔 인생이 내 인생이랑 거의 같다고 보면 돼
B: 그건 또 무슨 말이야?
C: 너네들.. 그 명장면을 모른단 말이야? 레이첼이 모니카에게 요새 만나는 상대가 있는 지 서로 얘기해주자며 얘기를 꺼내고, 모니카가 너 먼저 얘기해보라고 하자마자, 명랑하게 난 그런 건 없어! 라고 외치는 그.. 그.... 희대의 명장면을 정녕 모른단 말이야..?
C의 격양된 말투와 찰떡같은 재연에 또 한바탕 웃음 바다가 된다.
A: 그만, 그만 너 때문에 배꼽빠지겠다.
B: 제이미, 넌 해줄 이야기 없어? 너도 레이첼이야?
J: 난 말이지, 너희도 알다시피 지금껏 성숙한 연애를 전혀 하지 못 했잖아?
B: 알고는 있다니 다행이야..!
B의 짖궃은 장난에도 희미하게 웃음만 짓는 제이미였다, 분위기는 금세 심상치 않아졌다.
A: 너.. 무슨 일 있구나?
J: 나도 확신을 주는 상대를 만날 수 있을까? 내가 그 사람의 확신에 불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친구들도 처음보는 제이미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금새 흐려졌다.
.
.
.
내가 하나 말해줘도 될까? 너는 지금 니가 하고 있는 말 조차도 일말의 확신이 없어.
#. 제이미 이야기
M: 하지만 가족의 일인 걸, 자기가 이해 못 해주겠다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
다시금 들려오는 마이클의 볼멘소리에 제이미의 얼굴은 점차 수척해져갔다.
자기, 지금 본인한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나를 희생양으로 삼는 다는 생각은 안들어?
내가 그간에 느낄 불편과 불행은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나를 생각하긴 하는 거야?
제이미는 입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내뱉지는 못 한다. 크게 싸우고 싶지 않았다.
J: 그래 자기 가족들 일이라 중요한 거 이해해. 그런데, 나한테도 중요한 일이야.
M: 그냥 자기 친구들이잖아. 대충 둘러댈 수 있는 모임아냐?
J: 꼭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해야해?
M: 나도 갑작스럽게 말 하는 건 아니잖아. 넌 늘 그런식으로 둘러대는 거 알아?
사나흘 여유도 주지 않았으며 갑작스럽지 않다니.. 당황스러웠지만 쏘아붙이는 말에 제이미는 점차 공허해진 눈으로 마이클을 바라봤다.
J: 그래, 미안해.
M: 이젠 나랑 싸우지도 않겠다는 거야?
J: …
제이미의 묵묵부답에 마이클은 생각을 정리한 듯 말을 꺼냈다.
M: 니 뜻이 정 그렇다면.. 그래 그만 하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보아도, 누군가에게 냉담한 거절을 당하는 일은 매번 겪을 때마다, 태어나 처음 거절을 당해본 사람의 표정이 돼.
아아- 나는 실패했습니다. 나는 시도한 모든 관계에 있어 실패했습니다.
.
.
.
5. 쥰과 낯선 커플, 낯선 동침 : 나는 처음부터 진심이었어.
초 저녁부터 모여든 사람들로 클럽 내부는 벌써부터 들썩였다.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백색 차림의 사람들을 기분나쁘게 내리쬐었다. 간혹 잘못 굴절된 빛이 눈에라도 쏘이는 날에는 쥰은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웠던 신경이 한껏 더 곤두섰다.
쥰은 경직된 얼굴로 그저 양 옆의 리듬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상체만 들썩였다. 경계심이 가득해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춤을 추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표정과는 상반되어보였다.
그 와중에 누군가를 찾는 눈치로 시선을 입구 쪽에서 떼지는 않았다. 긴장이 되는 지, 위스키가 든 언더락 잔을 쉴 새 없이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손바닥으로 붉어진 얼굴을 식히려 노력했다.
기다림에 지친 쥰은 몇 곡의 노래가 흘러나온 뒤에야,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테이블 석 끝에 놓아둔 검은 색 재킷에 손을 뻗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최대 밝기로 되어있던 휴대폰의 불빛이 다시 한번 쥰의 눈을 쏘아댔고, 쥰은 얼굴을 찌푸린 채, 밝기를 최대로 내린 뒤, 조심스레 메신저 앱으로 들어간다.
J: 어디야?
읽음 표시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입력 중임을 알려주는 점 세개만 한참을 아른거리더니, 끝내 답은 없었다. 쥰은 머쓱한 듯 입술을 포개며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A: 짠, 나 많이 기다렸어?
알렉스는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모습을 들어냈다. 쥰은 익숙한 알렉스의 얼굴을 보자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 듯 경직된 얼굴이 풀어진다.
스테이지에는 여전히 춤을 추고 있는 무리들이 가득했다. 쥰의 시야에는 마치 원시 시대의 짝짓기 의식이라도 보는 듯 눈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이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쥰은 알렉스가 온 것이 마냥 기뻤다.
쥰은 알렉스의 손에 이끌려 스테이지로 끌려 들어갔다. 알렉스가 끌어당기자 묘한 떨림을 느낀 쥰은 그곳에 알 수 없는 사내들과 알렉스는 반가운 듯 인사를 나누었다. 쥰은 굳은 표정을 애써 풀어보려, 술잔을 계속해서 홀짝였다.
A: 쥰, 내 남자친구가 니가 마음에 든대, 너만 괜찮다면 밖으로 나가서 우리끼리 은밀한 시간을 가져볼까?
이게 무슨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인가. 거절의 의사를 표할 틈도 없이 쥰 앞에 덩치의 사내가 나타났다.
B: 안녕 난 밥이라고 하고 알렉스 남자친구. 넌?
J: 난.. 알렉스 친구..
A: 에이 우리 고작 친구는 아니잖아.
알렉스는 섭섭하단 듯 쥰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여유만만한 알렉스와 밥에 반해 쥰은 여전히 경직되어보였다.
B: 우리가 한 잔 사도 괜찮을까? 너만 괜찮다면 말이야!
사내의 짙은 음성이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뚫고 난사된다.
A: 맨해튼 맞지? 내가 가져올게
쥰은 턱 끝까지 다가오는 밥에게 기세가 밀려, 구두 뒷춤을 밟으며 천천히 물러섰다. 쥰은 뒤로 뻗은 손이 테이블 끝에 닿는 것이 느껴졌고, 쥰의 당황한 표정을 보자 밥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밥의 꺼끌한 손이 블라우스 뒷쪽으로 과격히 들어와 쥰의 얼굴은 아연실색이 된다. 기어코 후크를 풀어내는 밥을 제지하지도 못 한 채, 법썩스러운 그 곳에서 정신이 아찔해진다. 무력으로 얼굴을 파묻는 밥이 쇄골 맡에 야살스럽게 핥아대는 동안에도 쥰은 그를 밀어내진 못 한 채 시선을 돌렸다.
천장에서 반사된 빛이 무질서하게 쏘아져 내려와 눈이 따가웠다. 알렉스가 쥰의 시야에 들어왔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했다. 빛이 투영되어 다가오는 알렉스의 표정이 어떤 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한 순간 빛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었고, 쥰은 활짝 웃고 있는 알렉스의 표정을 확인했다.
쥰은 그 어떤 도움조차 구할 수 없었다.
예쁘네...
.
.
.
B: 예쁜이, 여기.. 가 불편하구나? 같이 나갈까?
그가 힘주어 말한 음성 사이로 왜인지 모를 조롱이 느껴졌다. 알렉스가 그에게 칵테일을 내밀었고, 둘은 비죽 웃어댔다.
B: 이건 니꺼. 마셔둬.
쥰은 칵테일 잔을 꽉 쥐어주는 통에 얼떨결에 잔을 받아들고선 몇 모금을 홀짝였다. 그 순간 머리가 번뜩였고, 테이블에 잔을 내려 놓으려다 일부러 놓친다. 그녀가 발휘할 수 있는 마지막 기지 같았기에.
마치 총성 소리와 같았던 굉음에 주변에 있던 모두가 놀라며, 분위기는 금새 어수선해졌다.
내용물이 완전히 쏟아져 바닥을 흥건히 만들었다. 바닥에 쏟아진 음료에 그제서야 당황한 밥과 알렉스의 표정이 비쳤다.
쥰은 혼란을 틈타 뒷문으로 빠져나갔고 클럽 외부의 거대한 덤프 쓰레기통 옆에 몸을 숨겼다. 눈물은 나진 않았다. 그저 지쳐 몽롱했을 뿐.
‘좀 자야되겠어..’
점점 바닥이 울렁이기 시작한 쥰은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할 것 같았지만, 다급히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나 좀 데려와 줘]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분명히 수키였다. 내 기억엔 분명히, 문자를 보낸 것은 내 룸메이트 수키였다.
쓰레기통 옆에 미상의 한 여성이 쓰러져 있단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출동했다. 알렉스와 밥은 냄새를 맡은 것인지 현장을 이미 벗어난 후였다.
119 구급대원과 경찰차가 한 번에 도착하여 주변이 온통 소란스러웠다. 쓰러져있는 쥰을 향해 모두가 다급히 뛰어온다. 사이렌이 내뿜는 형형색색의 빛이 쥰의 하얀 드레스에 반사되었다. 그녀는 화려한 피날레에 어울리는 의상을 갖춘 주인공으로 보였다. 참으로 화려한 막이 내렸다.
.
.
.
너는 이대로 실격인거야. 너는 그렇게 너에게 주어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버리기로 한 것이야.
의도적이었던 건 아니었다는 말 같은 건 하지마. 어쩔 수 없었다는 같잖은 변명이 통하는 문제가 아니니까.
.
.
.
6. 레퀴엠 마지막 악장 : 꽃 본 나비 담 넘어가랴
피날레가 끝나고 정신을 차려보았을 때, 세상은 온통 새하얫다. 가슴팍에 울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 외부에서의 두드림인 지, 심장이 보다 빠르게 뛰는 소리인 지 알 수가 없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서야, 나는 그게 누군가의 둔탁한 구둣발 소리 인지를 알 수 있었고, 나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만 옮겨 진위를 확인하려 했다.
“죠, 괜찮아..?”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남성이었다가 여성이었다가, 백발의 늙은 어르신이었다가 제 나이보다 앳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었다가 하는 피사체가 아른거렸다. 그게 사람의 형상인 지 아닌 지는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걱정했잖아..”
미상의 존재가 축축해진 음성으로 내뱉는 따뜻한 한 마디에 코가 시큰거렸다.
“죠,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어? 많은 일들이 있었잖아.. 이제는 조금 알겠는거야?”
나는 무슨 대답이라도 하고 싶어 한 마디 입을 떼려하였지만, 목이 너무나 메말라 음성이 나오질 않았다.
다정한 침묵이 자연스러운 사람, 노력하지 않아도 나를 자연스레 이해하는 사람, 나의 과민함에 대해 의아해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이해하길 바라고 있다는 마음의 부채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 사람 ..
“죠,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흐르는 강물처럼 이란 영화가 있다? 별로 인상깊진 않았는데, 그 영화 마지막 즈음에 나오는 대사가 잊히지가 않아. 너도 들어볼래?”
우리가 어느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죠..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면 서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
자꾸만 눈물이 흘러 하고 싶은 말은 입가에만 맴돌았다. 눈물이 도저히 멈추질 않았다.
“죠 무슨 말이라도 해봐, 아직도 알아내지 못 한 거야? 조금도 알 지 못 하겠어?”
“제발 부탁이야.. 무슨 말이라도 해줘..”
자신이 아는 것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 겸허한 사람.. 제가 아는 것을 상대에게 반드시 확인하고자 하지 않는 배려를 지닌 사람… 곁에 있을 때 마음이 공허해지지 않는 사람…
.
.
.
“그만, 지금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야??”
쇠창살 밖으로 사내가 큰 언성을 내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죠와 함께 안쪽 책상에 앉아있던 양복 차림의 상담사가 의료 차트를 책상에 내리치며 소리를 높여 말했다.
“끝내 투약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굴어서는 치료소로 갈 수도 없어요.”
‘나는 해냈어요.. 이제.. 가장 객관적인 실패로 인한 확실한 불행을..’
상담사는 죠의 말에 내리치던 상담 일지를 이번엔 옆구리에 낀 채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밖으로 나오기 위해 수신호를 보냈고,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녹슨 문을 열어주었다. 상담사는 별 하나가 박힌 단촐한 모자를 쓴 소장에게 간단히 목례를 하곤 보고서를 내밀었다.
“틀렸습니다. 실격이에요 저 친구는.”
소장은 보고서만 받아든 채 말을 아꼈다.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부사수를 불렀다. 조용한 음성으로 몇 마디를 건네더니 턱짓을 했고, 소장과 상담사는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들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명령을 받은 부사수는 무리를 이끌고 철창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그만해! 정신 차려, 취조는 끝났어 이제.”
사내가 경고등 빛을 죠의 얼굴 앞에 쏘아대자, 그제야 정신이 든 것인 지, 먼지 낀 바닥으로 죠가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간수들이 그녀의 목을 거칠게 비틀어 질식하지 못 하게 한다. 뺨을 여러차례 때리자, 백발이었다가 사내였다가 학생이었던 존재는 흐릿한 실루엣만 남다가 끝끝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대체 왜..’
죠의 반즈음 감긴 눈 사이로는 하얀 나비떼들이 날아간다. 나비 떼들이 일제히 움직이는 게 한 줄기의 빛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죠는 한낮에 꾼 꿈같은 그 광경에, 나비들이 날아가는 그 곳이 넓디 넓은 자유의 들판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Magazine_2025 > 27호_실패' 카테고리의 다른 글
27호_가장 위대한 실패 / 망 (3) | 2025.03.04 |
---|---|
27호_무너지는 민주주의 속에서 chill해지는 법? / 연푸른 (2) | 2025.03.04 |
27호_37년의 삶이 남기고 간 것 / 또바기 (3) | 2025.03.02 |
27호_우리는 실패에서 어떤 방식으로 벗어나는가 / 래곤 (1) | 2025.03.01 |
27호_실패 / 편집장의 인사 (3) | 2025.02.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