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민주주의 속에서 chill해지는 법?
필자는 얼마 전, 정치적 성향이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에서 도망쳐 나왔다. 한 집단의 대표자로서 들어간 곳이었기 때문에 흐린 눈을 하며 일 년정도를 버텼지만, 작년 계엄 선포 직후부터 그 톡방에선 나론선 견디기 힘든 말들이 자주 오갔다. 결국 내가 대표자로 있던 집단의 동의를 구한 후 더는 여기에 속해있지 못하겠다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톡방을 나왔다. 이 공간에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정에서 나오는 말들과, 이를 지적하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조리돌림이 날 분노하기를 넘어 피로하게 만들었다.
사실 이 톡방을 나와야겠다는 마음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결심 이후로도 실제 톡방을 나오기까지 약 두 달을 고민했는데, 이는 혹시 나 역시 훗날 이들과 비슷한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이 톡방에서 나오는 대화들은 확증편향의 결과였다. 이곳에 속한 사람들은 ‘지성인이라면 당연히’ 그들과 같은 의견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그렇기에 거리낌없이 그들의 상식을 공유했다. 그들은 그들의 정치적 입장이 상식이었을 안온한 고립 속에서 살아왔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 톡방은 나와 정치적 성향이 명백하게 다른 사람들이 모여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나는 이 톡방을 나가는 것이 나의 확증편향을 강화시키고 내 세상을 제한하여, 결국 수년이 흐른 후 나 역시 그들과 비슷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여러 선택 중 하나가 되지는 않을까 고민했다. 사실 고민할 여지 없이 이 선택은 바로 그런 선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곳에서 극우 유튜버들의 선동 영상 링크를 공유받고, 거기에 호응하는 메시지들을 봐야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나는 앞으로는 보수 신문들이나 보수 정치인들의 논평도 읽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정도를 다짐하며 톡방을 나왔고, 현재까지는 나름대로 잘 실천하고 있다.
이 고민의 시간동안 필자는 ‘지금의 나도 이러는데, 몇 년이 지나면 더 심하게 다른 의견을 회피하게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같을 것이다. 먹고 살기도 점점 피로해지는 사회에서 결국 우리는 최선을 다해 나와 다른 의견을 회피하며, 양극단을 향해 달려가게 될까? 그렇다면 이 나라에 합치라는 것이 존재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분명히 함께 살아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영원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침묵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가?
이 글은 위와 같은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분명히 밝혀두자면, 나는 이 주제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지 않다. 민주주의의 위기나 극단주의의 성장에 대해서는 수많은 자료와 선행연구가 있으나 나는 그 중 극히 일부만을 그것도 매우 간략하게 참고했으며, 끝내 답을 찾지도 못했다. 여기엔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과정이 일부 적혀있을 뿐이다. 또 나는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오랫동안 면밀한 관심을 가져온 사람도 아니다. 따라서 이 글은 상당히 편협할 것이며, 그로 인해 편향되어 있을 것이다.
한국, 그리고 전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우선, 민주주의의 위기란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이 혹은 정당이 선거에서 이겼다고 그것을 민주주의의 위기라 말할 순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순 있겠지만.
민주주의의 위기란, 쉽게 말해 독재를 향해가는 것이다. ‘정당은 어떻게 몰락하나’의 저자 강원택은 그의 칼럼에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는 (1)명백한 민주주의 체제의 후퇴, (2)포퓰리즘의 부상 그리고 (3)거리 정치의 활성화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포퓰리즘의 부상과 거리 정치의 활성화는 명백한 민주주의 체제 후퇴의 원인이거나 결과다. 이에 여기서는 민주주의 체제의 후퇴에 대해서만 조금 더 설명해보겠다.
민주주의 체제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정치적 자유의 보장, 제한받는 권력, 정권교체의 가능성, 법의 지배 등을 기본 원칙으로 한다. 그런데 선거의 절차나 과정이 공정하지 못하거나, 정치적 의사 표현에 대한 자유가 제한되거나, 삼권의 분립과 그들간의 견제, 혹은 여러 정치적 이해집단 사이의 경쟁과 견제를 통한 권력의 제한이 사라지거나, 특정 정권이 그들의 적을 정치적으로 몰살해버린다면,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다원적 가치가 붕괴되고 국민의 의견이 정당하게 대변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를 민주주의의 위기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이 글에서는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랙의 두 저서 『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와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를 다수 참고했다. 첫번째 책은 2017년 트럼프 첫번째 당선 이후 집필된 책이며, 두번째 책은 2021년 트럼프 지지자들의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 이후 집필된 책이다. 트럼프가 다시 당선된 지금, 이들이 또 어떤 책을 새로 쓰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나, 아무튼 첫 책에서 두 저자는 현대 사회의 민주주의는 과거처럼 바로 감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군사 쿠데타와 같은 폭력적인 형태의 권력장악은 더 이상 보기 힘들며 (이것이 앞서 두 책의 집필년도를 언급한 이유다. 분명 그 책이 나왔을 당시에는 꽤나 유효했을텐데), 대신 합법의 틀 안에서 민주주의의 ‘암살’이 이루어진다. 독재는 의회의 승인과 대법원의 합법 판결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안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죽는다. 이들은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여전히 선거는 실행되지만 정치인들은 경쟁자에게 반국가세력이라는 낙인을 찍고, 대통령은 의회를 우회해 시행령을 남발하고, 정부는 여당 인사로 국가 기관 곳곳을 채우고, 비판적인 언론은 회유나 협박을 당하며, 의회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탄핵을 추진하며 행정부를 혼란에 빠뜨린다. 하지만 이 과정은 부패와의 전쟁, 부정선거방지법, 민주주의 의식 개선, 국가 안보 강화 같은 이름으로 불리며 심지어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노력으로 비춰진다.
첫 시작점은 보통 전제적인 성향을 가진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등장이다. 저자는 잠재적으로 독재를 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정치인을 식별하는 네 가지 신호를 제시한다. 이는 (1)민주주의 규범에 대한 거부, (2)정치 경쟁자에 대한 부정, (3)폭력에 대한 조장이나 묵인 그리고 (3)언론 및 정치 경쟁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성향이다. 저자들은 각 신호들마다 정치인을 판단할 수 있는 더 구체적인 항목들을 제시하는데, 여기까지 살펴보면 현재 한국의 상황과 아주 비슷해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1)민주주의 규범에 대한 거부에는 선거 불복 등 선거제도의 정당성을 부정하거나, 권력을 잡기 위해 군사 쿠데타나 폭동, 집단 저항 등 헌법을 넘어선 방법을 시도하거나 지지하는 행동이 포함될 수 있으며, (2)정치 경쟁자에 대한 부정에는 정치 경쟁자를 전복 세력이나 헌법 질서의 파괴자라고, 혹은 이들이 국가 안보나 국민의 삶에 위협을 주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이들이 외국 정부와 손잡고 은밀히 활동하는 스파이라고 근거 없이 주장하는 것이 포함된다. (3)폭력에 대한 조장이나 묵인에는 폭력에 대한 비난이나 처벌을 부인함으로써 지지자들의 폭력 행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거나, 개인적으로 혹은 정당을 통해 정적에 대한 폭력 행사를 지원하는 행동이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4)언론 및 정치 경쟁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성향에는 상대 정당, 시민 단체, 언론에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협박하거나 명예훼손과 비방 및 집회 금지, 혹은 시민의 자유권을 억압하는 법률이나 정책에 대한 지지가 포함된다.
이런 극단주의 포퓰리스트 정치인은 처음에는 정치계의 아웃사이더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기존의 정당 혹은 정치인이 이들을 거르지 못하거나 혹은 이들에게 협조하면서 이들은 정치계에서 저변을 넓혀간다. 이에 대해 두 저자는 민주주의를 실제로 위기에 처하도록 만드는 것은 포퓰리즘 선동가나 그들의 지지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은근히 지지하고 이용하려고 하는 주류의 정치인이라 지적한다. 정당이 위기 상황, 즉 다음 총선에서 질 것 같거나, 다음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할 것 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 정당의 주류 정치인들은 극단적이지만 인기있는 포퓰리스트 정치인을 영입해 그들의 지지세력을 당의 지지세력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유혹에 휩싸인다. 두 저자는 민주주의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은근하게 반민주주의 세력과 협력하는 이들을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semi-loyal democrat)’라 칭한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폭력이나 반민주주의적 행태에 대해 모호하게 반응하며 사실상 이를 용인한다.
두 저자는 이런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기존 정당 및 정치인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한다. 정당은 극단주의적 정치인의 탄생을 막기 위해 이념적으로는 멀리 있을지라도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정치적 경쟁자와 협력하는 등 문지기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정치적 성공을 위해 반민주주의적인 행태를 용인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의 자세를 강조하는데, 상호 관용은 정치적 경쟁자를 정당한 존재라고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경쟁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거나, 이들을 싫어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그들 역시 반역이나 전복을 꿈꾸는 존재가 아닌 나라를 걱정하고 헌법을 존중하는 시민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는 당연해보이는 말이지만, 상호 관용이 무너질 때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한다. 한 정당이 다른 정당을 위협적인 적으로 인식하면, 이 정당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전제적인 방안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 있으며 패배 후 선거의 결과에 불복하거나, 승리 후 다른 정당에 대한 탄압을 시도할 수 있다.
제도적 자제는 비록 그것이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라 할 지라도, 기존 체제를 위태롭게 만들거나 입법의 정신에 위배되는 행동은 자제하는 것을 뜻한다. 이에 반대되는 태도는 ‘헌법적 강경 태도’라 불리는데, 이는 규칙의 범위 내에서 최대한 거칠게 밀어붙여 영원히 승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태도다. 즉, 대통령은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자격과 권리가 있으나, 이를 국회의 입법권을 무시할 정도로 남발하지 않는 것이 제도적 자제의 태도이다. 국회 역시 행정부 인사에 대한 탄핵의 권리를 가지고 있으나 이것이 무분별하고 모호한 근거로 남발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저자들도 언급하듯이 이런 해결방법은 양극화된 정당 체제 안에서는 작동하기 어렵다. 이 책이 처음 나온 2017년에는 어땠을 지 모르겠으나 2025년에 읽은 『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는 너무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이미 한국의 정치계가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의 태도를 잃었기 때문이다. 총선에서 졌을 때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를 고민하며, 다시 유권자의 선택을 받기위해 반성하고 내부를 쇄신하는 것이 민주적 태도라면 이를 부정투표의 결과라 주장하는 것은 비민주적이다.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후보자 임명을 막거나,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문제를 제기하여 재판을 미루는 것은 헌법적 강경태도이며 이런 정치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재판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정치의 사법화는 정치계의 자정능력을 훼손한다.
게다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정당의 지지자들 또한 점차 양극화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정당이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의 태도를 가진다한들 이를 지지자들이 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일례로 이재명 대표의 강성 지지층은 이대표 일극 체제를 비판하고 당내 화합을 주장하는 당원 및 정치인들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비명계 인사 사무실 앞에서 트럭 시위를 하기도 했다. 보수측 지지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윤대통령 탄핵안에 찬성한 의원들에게 배신자 낙인을 찍고 이들을 징계하거나 당에서 내보내야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는 극단적인 지지층 혹은 강성 지지층이 눈에 더 잘 보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환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단화된 지지층과 그들을 이용하며 극단화된 정당, 그에 허락이라도 받은 듯 더 극단화되는 지지층의 연쇄로 정당 역시 눈에 띄게 극단화되고 있다.
이미 이 두 가지 흐름 안에 들어와버린 이상, 연쇄를 깨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 연쇄를 깨려는 시도는 지지자들의 무수한 반대를 마주할 것이며, 그 결과로 해당 정치인의 이후 한국 정치계 내에서의 입지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실제로 지금도 두 정당 내부에서 자정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이것이 정당의 전체적인 기조를 변화시키지는 못하는 것 같아 보인다.
한편 중도층에 대해서라면, 두 양당을 견제할만큼 힘 있는 제 3당의 부재로, 국민들은 여러 갈등 속에서 단 두 개의 선택지만을 고르도록 강요받고 있는 듯하다. 지난 대선을 생각해보면 이를 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양당의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들은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기보다는 자신이 싫어하는 후보가 뽑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표를 던졌다. 제 3당이었던 정의당에는 12억원의 후원금이 쏟아졌고, 이는 싫어하는 후보를 막기 위해 소신 투표를 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후원금의 형태로 보내진 것으로 해석되었다.
근래 한국의 정치 리더들은 다수의 지지로 뽑히지 않는다. 조기 대선 정국으로 향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는 정당이나 출마예정자는 없는 상태로 국민 대다수가 국민의힘이 되면 안되니까 민주당 후보를, 민주당이 되면 안되니까 국민의힘 후보를 지지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정당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지도자가 큰 리스크를 가지고 있더라도 다른 지도자를 찾지 않는다. 이미 정치적 생명력이 끝난 것으로 보이는 대통령과 그의 극단적인 지지층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도, 결국은 경상권을 기반으로 한 지지세력이 민주당이 아닌 국민의힘을 지지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국민적 비호감이 높은 당대표를 계속 붙잡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양극화된 정치체계 안에서는 최선을 찾을 필요가 없다. 최악만 피하면 적의 적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 믿는거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솔직히 말해, 이렇게 두 정당이 양립이 불가능하다 싶은 수준으로 갈등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어떤 해결책이든 모호해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기대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게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라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속 두 저자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듯 하다. 그들은 불분명한 시스템에도 민주주의를 유지해온 것은 그 속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두번째 책인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에서는 그들 역시 여러 제도적 개혁을 제안한다. (1)투표권 확립, (2)선거 결과가 다수의 선택을 반영하도록 제도 수정, 그리고 (3)반다수결주의적 의회와 사법제도를 약화 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책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그 제안이 한국와 완전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일례로 한국은 미국과 달리 선거인단 제도가 없으니, 다수가 투표한 대통령이 최종적인 결과에서 지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거 결과가 다수의 선택을 적절히 잘 반영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 지금 유권자는 두 개의 선택지 안에서 차악을 고르도록 강요받고 있으니 말이다. 이에 한국에서도, 특히 총선에서, 거대양당 체제를 약화시키고 실제 국민의 지지를 더 잘 담아낼 수 있는 형태로 선거제도를 개편해야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현행 소선거구제도에서는 한 선거구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한 후보만 당선되고 나머지는 득표율과 상관없이 낙선된다. 이에 다량의 사표가 발생하며, 유권자 역시 소신보다는 최악을 막기 위한 전략적 투표를 하면서 실제 국민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또한 분명 전체적으로는 상당한 득표율을 얻는 정당도 그에 상응하는 의석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이에 한 선거구에서 두 명 이상이 당선되는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고, 국회의원 의석 확대와 함께 비례대표 의원 정수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렇게 되면 두 양당 이외에도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가 국회에 들어오게 되면서 국회 내 양극화를 중화하고 국민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보장하여 이들의 세밀한 의견을 더 잘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도가 이전까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부분의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2022년에는 6월 지방선거에서 시범지역 30곳에 한해 지방의회 중대선거구제가 시행됐다. 그러나 소수 정당이 당선괸 곳은 그 중 네 곳에 불과했는데, 이는 거대 양당에서 여러 명의 후보를 공천하며 결국 그 안에서 당선인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공천 후보수 제한 등 관련된 규칙이 더 세밀하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비례대표제 강화와 관련해서는, 2020년 총선에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정당득표율과 지역구 의석수를 따져보아 지역구에서 덜 얻게 된 의석을 정당 득표율 기준으로 채워주는 제도다. 즉 10%의 지지율을 얻은 정당이 전체 300개의 의석 중 지역구에서 30석 이하의 의석을 얻게 되면, 남은 의석을 비례의석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이를 100% 채워주는 것이 연동형 비례대표제인데, 현재 한국은 연동률이 50%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사용하고 있다. 이 제도는 비례성을 높이고, 소수 정당의 국회 진입을 용이하게 만드는 제도로 평가된다. 그러나 2020년, 그리고 같은 방식이 그대로 시행된 2024년 총선 모두에서 거대양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어 비례대표 의석 역시 다수를 가져가면서 제도 시행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는 못했다.
선거제도는 개헌 없이 법률 수정을 통해 변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면, 전면적인 개헌을 해야한다는 목소리도 항상 있어왔다. 한국의 대통령제는 ‘제왕적 대통령제’이며, 대통령에게 집중된 과도한 권력을 분배해야한다는 것이다.
사실 대통령제에 관련된 개헌 논의는 거의 매 정부마다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 시기에는 내각제 개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나 무산됐고, 이는 김대중 대통령 당시 다시 언급되었지만 IMF와 함께 유보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4년 연임제로의 개헌 제안했지만 야당이 크게 반대해 무산되었고, 이명박 정부에서도 개헌논의를 시행했으나 친박근혜계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도 대선 당시 중임제 개헌을 약속했지만, 당선 후 ‘개헌은 국정 블랙홀’이라는 발언과 함께 이를 유보했다. 임기 후반기에 다시 개헌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탄핵정국으로 무산되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4년 연임 개헌안 발의했으나 야당의 반대와 표결 불참으로 투표 불성립 처리되었다. 이렇듯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다수가 동의하는 듯하지만, 결국 차기 대선에 유리한 정당 혹은 후보자가 이를 반대하거나, 논의를 소극화하면서 실제로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지금도 차기 대선의 유력 대권주자들 사이에서 대통령제 개혁에 대한 코멘트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지만 과거와 같이 유야무야될 가능성도 늘 존재한다. 다만 ‘계엄’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난 후인만큼 이번에는 다르리라 기대할 뿐이다.
사실 이 글을 처음 쓸 때는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은 어떤 시도를 할 수 있을까하는 내용을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고 싶었다. 시위를 적극적으로 나가고, 희망을 잃지 않고… 같은 말들이 아니라, 우리가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덜 멀어질 수 있을까, 혹은 미워하면서도 함께 갈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이미 일상의 스트레스 레벨이 높은 상태의 시민들에게 직접 신경써서 편향되지 않게 친구를 사귀고, 뉴스를 소비하고, 모든 의견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나와 다른 의견도 읽고 생각해보라고 하는게 얼마나 유의미한 조언이 될까? 심지어 나도 그러지 못했는데. 나는 시민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빡빡하다고 생각한다. 사유에 쓸 에너지를 남겨두지 않는 세상이 아닌가?
다만 약간의 희망은 이정도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음을 계속 의식하고, 적어도 눈치를 보는 것.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 손자, 손녀 혹은 친구, 친한 선후배 등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서 나와 다른 의견을 마주했을 때는 인터넷에서 다른 의견을 마주했을 때와는 다를테니까, 그때 그 사람의 말을 조용히 한 번은 들어보려고 하는 것. 동시에 상대방에게 말할 때는 피로하지 않을 정도의 Chill함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그래서 우리가 사실은 말이 안통하는 개꼴통보수 혹은 종북좌파가 아니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상대임을 확인하는 것. 그정도를 기대할 수 있겠다. 비슷한 맥락에서 밍기적 에디터들 사이에서는 ‘사상검증구역’처럼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주제에 토론하는 예능 혹은 교양프로그램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렇게 글을 마무리한다.
나는 무너지는 민주주의에서 chill해지는 법을 찾는데 실패했다.
이에 제목 뒤에 물음표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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