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날의 기억
에디터 / 망
가장 인상 깊은 기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한민국 고교생이라면 수능을 필연적으로 겪게되니, 공감대 형성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수능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그때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여전히 아이러니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으로나마 다른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끼리 대학에서 만나 대화를 할 화제들이 있다거나, 입시 경험을 바탕으로 말문이 트일 수 있다든가, 하는 그런 것들. 이 지면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므로 순전히 내 생각만을 읊어보자면 나는 수능 반대론자다. 아무리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한들 그러한 효과 때문에 수능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고 여기진 않는다. 다만 아직까지도 수능이라는 제도 아래에서 우리의 교육과정과 청소년 시기의 시절이 지나간다는 것은, 수능을 대체할 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현실이 그렇다. 수능 국어 영역의 시작 시간에 맞추어 모든 학제과정의 학교 일과가 시작된다. 수능 국어 영역의 시작시간이 결국 얼마나 성실하게 기상하느냐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평균 수면 시간 7~8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잠을 자야하는 시간도 수능 국어 영역에 맞추어졌다. 성실함의 기준이 사회적 약속의 하위 체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수능에 대해 못마땅함을 갖고 있으니, 그건 비단 수능 체제 자체에 대한 불만만은 아닐 것이다. 기억이란 것은 형성된 이후로 그 사람의 앞으로에 영향을 주는 것이므로, 아마 수능에 대한 내 기억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능을 치른 사람이라면 다들 그렇지 않을까? 그 결과가 좋았건 나쁘건 간에 상관없이. 우리에겐 그 과정이 아름답게 포장되기에는, 지나치게 혹독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전부 알 수 있는 전지전능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나보다 힘들었던 사람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남들에 비해 더 힘들었다고 울 생각은 없다. 다만, 이 글을 쓰는 데에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했으니, 스스로 회고하건데 못되어 먹었던 과거에 대해 고백하는 순간이 될지도 모르므로.
고등학교 3학년의 나는 학급의 회장이었다. 수험생으로서 내 학업을 제대로 챙겨야 한다는 부담감 외에도 학급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두 가지 다 제대로 잡지 못한 거 같아 후회가 크다. 후회만으로 세상이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후회는 그 순간의 부정적인 감정일 뿐이다. 후회는 담고 있어 봤자 스스로 갉아 먹는 행위이므로 그 이상의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나는, 종종 학급을 꾸려야 한다는 의무도 내팽개치고서 점심시간만 되면 도서실로 도망을 갔다. 친구와 갈등이 생겼을 때에도 유연성있게 대처하질 못하고서 히스테리를 부려댔다. 지금은 교우 관계가 꼬여도 각자 다른 생각을 갖고 있어서 그러겠거니 하고 이해하며 넘어갈 수 있지만 당시의 나는 내 모든 상황을 설득시키고 싶어 했다. 이런 문제는 고등학교 3학년생이기 때문에 찾아온 문제가 아니다. 생을 살아가면 어느 순간에라도 부딪힐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우연히 모든 난제가 겹쳤기에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수험생들보다 월등하게 힘들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모두가 다 똑같이 힘들어했고 인내해왔다. 좋아하는 것들을 수능 끝날 날까지 참아야 했다. 다만 나는 그때 당시에 내가 힘든 줄도 몰랐다.
그렇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수험생이라는 신분을 벼슬로 부리며 부모님에게도 제 상황을 좀 이해해 달라 하는 철딱서니였다. 당시 내가 뱉어냈던 나쁘고 부정적인 표현들은 바깥으로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 내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우울이었을 지도 모른다. 우울이 모든 일에서의 만능 변명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우울들은 종종 그 원인이 제거되면 해결되는 경우들이 있다. 나에겐 수능 때문에 생긴 우울이었으므로, 그 원인은 수능밖에 없었다.
그걸 알게 된 날은 수능 날이었고, 그것이 내 기억에서 강렬하게 자리 잡아, 이후의 입시에도 영향을 미쳤다. 거대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그냥 그날 수능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수능이 끝났을 순간까지도 그걸 몰랐다. 수능 직후 폰을 돌려받고서, 보호자와 연락을 했다. 수험장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에 내 보호자는 어디에 있나, 두리번 두리번 하는 찰나였다. 각자의 수험생 자녀를 기다리는 수많은 보호자들 속에서 내 보호자를 귀신같이 찾을 수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헤맬 수도 있었을 텐데. 나와 눈이 마주치고 웃어주는 보호자의 얼굴에 나는 그때서야 내가 수험생활을 참 지독하게 앓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의 기억은, 사실 앨범에 있는 사진처럼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로 기억에 남아있다. 내 속에 있는 독소 같은 게 싸하게 빠져나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수험생이란는 핑계로 건방지게 굴며 교우 관계도 엉망진창으로 꼬아보기도 했던 것들이 다 내가 잘못한 것이라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보호자의 손을 잡고 귀가하며 나는 시험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사람을 망칠 수 있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앞으로 겪을 시험으로부터 받을 스트레스에 대한 방어 기제를 세울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기도 했다.
별것 아닌 기억이고 단지 보호자의 얼굴을 봤을 뿐이지만, 어쩌면 그게 그렇게 안심이 되었던지. 모든 게 다 끝났으니 이제 혼자서도 스스로를 채찍질 할 일이 없을 거라는 감각에, 나는 그냥 어렴풋이 몇 가지를 깨달았을 뿐이었다. 이때의 경험은 정말로 이후 내 또 다른 수험생활에 있어서도 스트레스를 조절할 수 있는 기제가 되어주었다. (취업 문제라든가!) 그러니 내 인생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을 기억은 수능날의 기억일 거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기억이 없으면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으로 자랐을 것이므로, 기억이라는 건 이렇게 시시하면서도 동시에 사람을 온통 지배해 버린다.
4월에는 또 다른 많은 기억들이 있다. 수능 말고도, 전국민이 공감하고 기억하는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기억들이 우릴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지, 우리는 그 기억에 대해 어떤 생각을 끌어안고 지내오는지. 그 기억을 지니고 있는 우리 스스로를 존중하여 함께 연대할 수 있는지. 반면에 그 기억을 외면함으로써 스스로의 인격을, 수험생일 적의 나처럼, 후회 가득한 독소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기억이 많은 4월이라,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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