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 연푸른
“인생에서 남는 건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71억일 겁니다.”
분명 돈이나 명예보다 가까운 사람과의 소중한 기억이 더 가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구였을 무언가가, 돈에 찌든 현대인의 눈을 만나면 이렇게 읽힌다. 그래, 확실히 그냥 돈보다는 많은 돈이 인생에서 남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71억이라면 그건 충분히 기억에도 남을 법한 돈이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스스로와 밸런스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에게 71억을 주는 대신 나의 모든 기억을 가져갈 것이라고 말한다면? 절대 일어날 일 없는 상황이지만, 나는 INFP 특유의 과몰입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곧 혼자만의 폭풍 같은 고민에 휩싸였다. 71억이 생기면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고 싶은 물건을 사는 거야 당연하고, 건물 하나 사서 월세만 제대로 받으면 원금손실 하나 없이 월 2천 5백만을 벌 수 있다. 물론 실제로 건물을 사서 월세를 돌릴 때 원금 손실이 없는지는 모른다. 난 건물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아무튼 이론상으로는 71억이면 대출 없이도 건물 하나가 뚝딱이고, 난 2천 5백으로 하고 싶은 일은 뭐든 하면 된다는 거다.
이렇게 71억이 의미하는 바는 비교적 명확하다. 명확하지 않은 것은 ‘기억을 지운다’ 쪽이었다. 기억은 어디까지를 의미하는가? 처음 질문을 떠올렸을 때는 기억이 추억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남는 것이 돈도 명예도 아닌 기억이라고 말하는 저 플랜카드 속 ‘기억’은 아마 ‘추억’을 뜻하는 것일 테니까.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활동 중 기억에 의존하지 않은 활동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과서에서 얻은 지식을 기억하지 못할 나는 덧셈 뺄셈은 물론 글자를 읽고 쓰는 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혀를 어떻게 움직여야 ‘엄마’, ‘아빠’를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엄마’와 ‘아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내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성격이 전혀 지금 같지 않을 것임은 당연하다. 심지어 갓 태어난 아기가 밤마다 우는 이유는 몸은 피곤한데 그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잠을 자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잠에 어떻게 들 수 있는지를 몰라서라는데, 그러면 나는 잠조차도 제대로 잘 수 없게 되는 것인가? 기억이 지워진다면 내가 어릴 때부터 훈련하여 몸으로 익힌 것들, 우리가 흔히 ‘근육의 기억’이라고 불리는 것도 같이 지워지게 될까? 프로이트가 말한, 우리의 무의식에 남아 알게 모르게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는 그 기억까지도 함께 지워지는 걸까?
이쯤 문제가 복잡해지자, 아무리 과몰입을 즐기는 나라도 굳이 여기까지 따져야 하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몰입에서 깨어나니, 다른 사람들은 과연 기억과 71억 중 무엇을 선택할까 하는 의문과 함께 다른 사람은 ‘기억’이라는 단어를 볼 때 어디까지를 먼저 생각 할지가 궁금해졌다.
자, 그래서 소개합니다. (급전개)
당신은 기억과 71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실 건가요?
해삼
/ 밤바다를 항해하는 거친 해삼(?)
1. 기억과 71억 중 하나를 택한다면?
71억. 좋았던 기억도, 아팠던 기억도 모두 소중하고 그것도 나니까, 사실 다 잊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힘든 시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기왕 힘든 일이 생겼으니까 그걸 합리화하면서 그 일이 나를 성숙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사실은 없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힘든 일을 다 당하고, 해내면서 살았던 것이 나 스스로도 대단하고 자랑스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냥 철없고, 남들한테 부족하다는 이야기 듣더라도 돈 많고 아무 생각 없이 살 수 있는 게 내 마음은 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되는 거다!
2. 기억을 내 마음대로 세 단계로 나누어 봤다. (1) 주변인과의 추억 (2) 학문적 지식 (3) 일상적인 지식(몸 가누는 법, 언어 등). '모든 기억'을 다 잃게 되더라도 71억을 택할 것인가?
기억을 다 잃는다는 게 말도 못 하는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는 거라면 사실 71억이 생겨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주변에서 뺏어갈 수도 있고. 그런데 미디어에서 나오는 기억상실증처럼, 말은 할 수 있는데 주변 사람만 못 알아보는. 그런 정도면 71억을 택할 것 같다. 주변에서 알려주지 않을까? 너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3. 주변인과의 추억이나 지식은 잊어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게 단정지어 말하려던 건 아닌데……. 소중한 추억,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 다 많다. 하지만 힘들었던 기억도 많았다. 친구, 가족과의 기억도 행복한 기억보단 힘든 와중에 내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웠다는 기억이 많다. 지금은 추억을 잊고 싶지 않은 마음보다는 힘들었던 시간을 지우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지식의 경우에는, 나는 지금 교육 전문가로서 성장하고 있어서 지식이 소중하기는 하다. 하지만 71억이 있으면 다시 배우면 되니까. 일단 71억을 받을 것이 확실히 된 후에 공부하면 되는 것 아닌가? 71억이 있으면 비싼 개인과외를 붙이든 뭐든 가능하니까!
4. 그런 기억을 지우면 본인은 어떤 사람이 될 것 같나?
음.. 배부른 돼지? 성격은 소심해질 것 같다. 지금은 활발하고, 당당하지만 어릴 때는 되게 소심했다. 아기일 때는 소심해서 말도 없고, 울지도 않고, 그냥 늘 조용히 가만히 있는 아기였다.
5. 성격이 바뀌게 된 계기가 기억나는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소심한 와중에도 그와 반대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갑자기 반장 선거를 나간다거나, 무대만 가면 눈을 반짝이면서 되게 열심히 하고. 외부에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내가 뭔가를 도전해보고, 그런 경험이 쌓이면서 지금 같은 성격이 된 것 같다. 아, 그럼 결국 기억을 지워도 다시 이렇게 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71억이 생긴다면 좀 더 오만방자한 성격이 될 수도?
6. 기억을 지우겠다고 한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지우기 싫은 기억에 관해 물어보고 있다. 지우기 싫은 기억, 본인의 근간이 된 기억이 있는지?
나에겐 주변인과 관련된 기억보다는 내 꿈이나 목적과 연관된 기억이 중요하다.
세 가지 정도의 기억이 있는데, 첫 기억은 중학교 1학년 일 때. 학교에서 창작무용 수업을 들었다. 그때 내가 춤을 잘 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현대무용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한 동작을 배우다가 세포 하나하나에서 막 가슴이 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전까지는 느껴본 적 없는 설렘, 감동. 그런 느낌? 이후로 춤추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무용과에 가려고 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체육 교육과를 희망하게 됐다.
다음은 고등학생 때. 시 주체의 발표 대회에 휠체어 이용자인 친구와 함께 참여했다. 나는 내가 장애인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친구와 함께 다니다 보니 그 전엔 전혀 몰랐던 문제들이 보이더라. 자연스럽게 장애인 문제를 내 진로와 연결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왜 장애인은 체육 교육에서 소외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고, 장애인 체육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때 느낀 학교 체육 교육에 대한 비판 의식이 지금까지도 나의 근간이 되고 있다.
세 번째로는 대학생일 때, 무용 동아리에서 Lorde의 Liability라는 곡으로 안무를 창작해 무대에 올렸다. 나는 성적으로 피해를 본 일이나, 실연, 왕따, 어린 시절의 입원 등 삶에 나름대로 굴곡이 있었던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때 안무를 짜고,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추면서 감정적인 응어리가 많이 해소됐다.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나를 그 작품으로 나름 완성한 것 같다.
7. 71억이 생기면 무슨 일을 하고 싶나?
모순일 수 있지만, 우선 그 돈으로 기억부터 찾으려고 할 것 같다. 어렵기는 하겠지만, 주변 사람들을 만나서 물어보는 식으로. 또 춤이든 체육이든, 지금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은 계속할 것 같다.
8. 하지만 춤을 췄던 과거의 기억은 이미 지워졌을 텐데?
음... 그렇긴 하다. 정말 현실적으로는 (그 정도의 지식이 남아있는 상태라면) 그 돈으로 부동산부터 만들지 않을까 싶고. 또 모른다. 진짜로 기억을 잃으면 내 꿈은 과학자라고 하면서 과학을 공부하게 될 수도 있다. 근간을 이루는 기억이란 게 참 중요한 것 같다.
9.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릴 때는 놀이터에서 흙 만지고 낙엽 만지는 것을 좋아해서 환경미화원이 되고 싶었다. 자연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 부류의 직업을 가지게 될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성장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다.
교섬
/ 천천히, 어려움을 이겨내고 새로운 길로
1. 기억과 71억 중 하나를 택한다면?
기억. 나는 기억이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기억이 없어진다면 이 세상에 분명한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다. 세계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새로 다 알아가야 하는데 그게 71억이 없는 것보다 더 힘들 것 같다.
2. 71억을 가진 후에 다시 알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게 힘들 것 같다는 뜻이었다. 좋았던 기억에서는 살아갈 힘을 얻고, 나빴던 기억은 반면교사 삼아 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기억이 없어지면 내가 백지가 될 것 같은 느낌?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런데 아직도 나를 제대로 알 수가 없어서 힘들다. 그런데 그 기억까지 지우면 도대체 뭐 어쩌겠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3. 얼마를 주더라도 절대 지우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렇다. 71억이 있으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겠지만, 굳이 그만큼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미 생긴 기억과 앞으로의 노력을 더 해서 하나하나 조금씩 이루어가는 재미. 내가 직접 뭔가를 해나가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4. 기억이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말해주셨다. 본인의 정체성이 된 기억은 어떤 것들이 있었나?
나는 할 일이 없을 때 복기를 많이 한다. 친구들과 함께했던 행복한 기억이나, 흑역사까지. 그런 기억을 되새기다 보면 새로운 기억이 생기고 또 생기면서 기억에 새살이 덧입히게 된다. 그런 과정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다. 친구들과 서로 나눴던 눈빛이나, 함께 먹은 음식이 맛있었던 기억.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준 칭찬이나 따뜻한 말을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좋은 말을 써놓기도 한다. 그런 기억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5. 최근에는 무엇을 복기했나?
최근에 ‘나는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한 적이 있다. 모든 것을 나 혼자 해야 한다고 생각해왔고, 내가 부르면 달려와 줄 것 같은 사람이 있으면서도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왔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다가 친구를 만나게 됐는데,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너 왜 그렇게 생각하냐, 네가 힘든 것 같아 보이면 내가 초코케이크와 딸기 케이크를 사서 집으로 찾아가겠다'며 내 집 주소를 저장하더라. 그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또 그때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너무 행복했다. 이런 기억이 나에겐 정말 소중한 기억이다.
6. 혹시나 71억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고 싶나?
우선 내가 살 조그마한 집을 사고 싶다. 그것만으로도 내 많은 스트레스는 해소될 것 같다. 그리고 나서는, 사실 그중 반은 기부해도 될 것 같다. 인간이 사는데 70억이나 필요한가? 한 10억만 있어도 충분히 잘 살지 않나? 40억 정도는 기부하고, 나머지는 일단 들고 있을 것 같다. 잘 모르겠다. 71억이라는 돈은 너무 황당할 정도로 많아서 감이 잘 안 온다. 뭐 사고 싶은 것이 생기면 마음껏 소비하지 않을까?
7. 요즘 자주 떠올리는 기억이 있다면?
무기력할 때 다시 힘을 내기 위해서 마음을 다잡았던 기억들. 나는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다. 너무 행복했다가도 다시 무기력한 경우가 정말 많은데, 그럴 때마다 '그래도 살아가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해주는 기억이 있다. 이를테면 얼마 전부터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그 식물이 내 눈에서 안 보여도 잘 자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기 싫었는데 물을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일어났다. 같이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있다는 기억이 좋다.
김선우
/ 여러분이 이거 읽으실 때는 다른 사람
1. 기억과 71억 중 하나를 택한다면?
71억은 못 참지. 71억이면 잘못해서 십몇억쯤 날린다고 하더라도 평생 적당히 먹고살 수 있는 돈이다. 기억을 안 지우겠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큰 돈이었다.
몇 년 전에, 한 학기 내내 친구들과 술을 딱 세 번 마셨다. 왜냐하면 돈이 없어서. 돈은 결국 시간도 포함한 개념이다. 부자는 돈을 써서 시간을 사고, 돈이 없으면 시간을 팔아서 돈을 구걸해야한다. 수많은 친구와 함께해도 돈이 없으면? 카톡에 2천 개의 연락처를 쌓고 살아도, 밥 한번 먹자는 공허한 약속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다.
사람들과의 기억, 당연히 아깝다. 근데 인간관계는 새로 만들 수 있더라도 71억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잠재적 수익은 뚝딱 만들 수가 없다. 71억이 생기면 그 돈으로 조금 더 풍족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새로 만날 좋은 사람들에게 불로소득으로 잘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기억을 잃는다고 인간관계가 아예 초기화되는 게 아니라면 뭐, 다시 친해지면 되겠네.
2. 방금 답변에서는 기억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적인 기억에 한정해서 말해주셨다. 그 외에 수업을 통해 얻은 지식이나 언어 능력 같은 일상적인 기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생각보다 인간관계를 많이 신경 쓰는 사람이었나보다. 그러게, 지식도 생각을 해봐야 하는데. 기록이 남아있다면, 처음부터 열심히 공부해보겠다. 지금까지 쌓아둔 것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한글로 써놓은 문제의식을 그득그득 쌓아 뒀는데 한글도 못 알아본다? 이것까지 건드릴 줄은 몰랐는데…. (고민) 그런데 결국 내 기억은 어떻게든 재구성할 수 있다. 24년 동안 쌓아온 지식이니까, 마흔 중반이 되면 지금까지의 기억은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고. 71억 없이도 기억을 잃는 사람이 있지 않나. 그런 사람들을 너무 동정적이고, 안타깝다는 식으로만 보지도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71억이면 뭐 막말로, 언어고 뭐고 다 털어가도 괜찮다.
3. 그렇게 기억이 털리면 본인은 어떤 사람이 될 것 같나?
몸 큰 갓난아기. 기억이 없다고 하면, 뇌에 있는 모든 연결을 끊어놓는 것 아닌가? 그건 백지다. 이 질문은 거의 인간의 본성을 묻는 말이 아닌지.
4. 그럼 다시. 기억을 지운 후 24년이 지났다. 기억을 재구성한 본인은 어떤 사람이 될 것 같나?
이건 지금의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대해주냐에 따라 다를 것 같다. 그 친구들이랑 만나면 나이 사십 먹고도 보드게임 하면서 놀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 친구들이 나의 1차 집단이 되어 준다면 사회성이 그렇게 없지는 않을 텐데, 손절당한다면 뭐…….
내가 내 정체성이 없어도, 친구들이 공유하고 있는 내 정체성이 있으니까. 그걸로 어떻게든 재구성 가능할 것 같고, 그렇게 재조합 할 수 있다면 내가 내 뇌세포에 있는 나 혼자만의 기억을 잃는 게 큰 손해는 아닌 것 같다. 또 한 편으로는 솔직히 기억을 다 잃은 판국에 과거의 정체성이 알 바인가 하는 마음도 있다.
5. 기억을 지우겠다고 한 사람들에게는 지우기 싫은 기억에 관해 물어보고 있다. 지우기 싫은 기억, 본인의 근간이 된 기억이 있는지?
방금 말한, 나의 네트워킹 된 정체성. 친구들이랑 놀고 여행 다니고 했던 기억들. 과거에 형성해 둔 네트워크는 혼자 만들 수가 없다. 상대방과의 교류가 있어야 하고, 적어도 50%의 지분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건데. 사실 책이야 언젠가 읽으면 되고, 혼자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뚝딱뚝딱한다고 쳐도 인간관계는 혼자 못하니까. 친구들, 주변 사람들과 함께했던 기억은 잊고 싶지 않다.
6. 71억이 생기면 무엇을 하고 싶나?
일단 한글부터 배워야 한다. 다시 짐승에서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나는 추한 70킬로짜리 유기체 덩어리일 뿐이니, 믿을만한 사람한테 연락해서 세상 물정부터 배우는 거다. 그 친구가 재산의 절반을 가져가도,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남은 35억으로 이제 건물을. 사실 돈으로 돈을 불리는 게 아닌 이상 할 수 있는 게 뭐가 얼마나 있겠나. 건물을 살 것이다. 지금 당장은 다른 하고 싶은 일은 없다. 그런데 돈이 생기면 하고 싶은 것도 생기지 않을까?
7. 다른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71억이니까. 15억이었으면 기억 안 지웠다. 30억도.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해도 살 수 있는 돈. 71억이면 그게 가능하다. 결국 남은 평생의 삶 정도는 되어줘야 지금까지의 기억과 맞바꿀 수 있다. 지나간 삶과 남은 삶 중 무엇이 소중하냐 묻는다면 그 둘에 동일한 가치를 매기고 싶은 거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뭐나, 다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고 내 자아의 일부니까.
해삼은 자신의 근본을 이루는 기억으로 처음으로 꿈을 품었던 기억과 처음으로 직업적 목표를 설정했던 기억을 꼽았다. 그에게 '기억'은 더 행복한 나와 세상을 위한 문제의식을 접하는 과정이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걸어왔고, 걸어갈 방향성이었다.
교섬과의 인터뷰에서는 마지막 대답이 인상 깊었다. 반려 식물, 같이 삶을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기억이 곧 책임감이 되어서 나를 깨우고 움직이게 한다는 대답이었다. 그에게 '기억'은 내 주변과의 관계 속의 나를 이해하는 방법이며, 이는 삶을 살아갈 동기였다.
김선우에게도 기억은 대체로 다른 사람과 함께 만들어온 관계였다. 다만, 그렇기에 나의 기억이 지워지더라도 함께 기억을 쌓았던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이는 재구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교섬과 결을 달리했다. 김선우와의 인터뷰에서는 기억에 대한 것만큼이나 돈에 대한 그의 철학이 인상 깊었다. 돈은 더 풍부한 기억을 만들 수 있는 수단이다.
이렇게 인터뷰를 정리하고 나니, 기억과 71억에 대한 내 생각도 밝혀야 할 것 같다. 질문을 만들어 여기저기에 물어봐 놓고, 정작 내 의견을 밝히지 않는다면 그건 너무 뻔뻔하다.
여전히 갈팡질팡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내린 결론은 ‘지우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는 늘 돈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지만, 다행히도 돈이 나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적은 아직 없다. 나는 부모님의 치마폭에서 아주 부자는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여유롭게 살아온 듯하다.
돈보다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과거에 내가 저지른 실수들이다. 예의 없는 행동과 바보 같은 선택, 혐오와 편견이 무엇인지 배우기 전에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들, 멋모르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던 기억. 이런 기억들이 주기적으로 나를 찾아와 괴롭힌다. 나는 부족한 돈보다 과거의 멍청했던 나에 대한 기억이 더 괴롭다.
그럼 그 기억이 지워지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기억이 지워진다고 내가 내뱉었던 말이 없었던 것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판사님 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같은 말만 하게 될 테고, 실제로도 기억이 나지 않아 눈치 없이 또 비슷한 실수를 저지를 테니까. 그러면서, 난 기억도 하지 못하는 과거에 내가 얽매여 있다는 사실을 억울해 할 테니까. 나만 기억하지 못하는 내 과거에 붙잡혀 있을 거라면 차라리 나도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게 나을 것 같다.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만 기억을 활용할 수 있다. 앞으로 할 실수라도 줄일 수 있다.
그나마 어릴 때는 어려서 괜찮았다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 지금 기억을 잃게 되면? 나는 몸은 20대 중반인데 생각은 초등학생보다 어려지게 된다. 더 크고 멍청해진 나는 이전보다 더 큰 실수를 반복할 것이고, 그것은 더 발전한 정보통신 기술에 힘입어 여기저기에 박제될 것이며, 결국 그렇게 새로 만들어진 실수의 기억이 똑같이 나를 괴롭게 할거다. 난 지난 이십 년간 부끄러워했던 것을 앞으로 이십 년 동안도 똑같이 부끄러워하며 살게 되는 거다. 이제야 간신히 몇 가지 실수에 대해 밤마다 이불을 차지 않는 법을 배웠는데, 그걸 다시 또 배워야 한다니. 싫다. 나에게 기억은 시행착오이고,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실수 뭉텅이다.
다행히도(?) 71억이 있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71억을 가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에 대한 정보는 내 기억 속에 없다. 그래서 그 돈을 가지지 못한 것이 억울하거나 아깝지는 않다. 71억을 줬다가 뺏는다면 또 다른 대답이 나올 수도 있지만. 이래서 기억이 중요하다. 방금 난 내 기억에 기반하여 굴러들어올 뻔한(?) 71억을 걷어 차버렸다. 혹시 내 주변 누군가가 기억과 71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기회 혹은 위기에 부딪힌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상냥하게 다가가 그 71억을 함께 쓴 기억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나 되고 싶다. 돈과 기억 모두 잃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다.
시작할 때처럼 급하게 마무리를 해보자. 자, 이제는 여러분이 과몰입하실 시간입니다.
기억과 71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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