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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_2021/7호_내일은 내 일이 될, 노동

7호_노동, NO 同 / 바투

by 밍기적_ 2021. 7. 30.

노동, NO



에디터 / 바투




개운하게 샤워를 끝낸 후 침대에 누워서 내일 아침 메뉴를 생각한다. 깨끗하게 세척된 사과에 닭가슴살 하나? 여러 영양소가 고루 들어가 있는 다이어트 도시락? 어플을 뒤적거리다 몇 가지를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완료 버튼을 꾸욱. 아침에 일어나면 집 문 앞에 와 있길 기대하며 잠에 든다.

최근 이커머스(e-commerce)가 성행함에 따라 ‘배송’ 또한 하나의 경쟁 대상으로 급부상했다. 로켓처럼 빠른 배송, 새벽에 도착하는 배송, 내일 바로 도착하는 배송, 쓱-하고 도착하는 배송 등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할 만한 단어를 붙여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배송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두 팔 들고 환영할 만큼 즐겁고 편리한 일이다. 언제 택배가 오나, 하고 배송 날짜를 계산해서 제품을 주문해야만 하는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물건을 주문해서 당장 7-8시간 뒤에 배송받는 것이 디폴트값이 되어버렸다. 밖에 나가지 않고도 전국 팔도의 별미를 맛볼 수 있는, 이것이 진정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과연 소비자 입장에서, 이 빠른 배송의 혜택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누려도 되는지 질문을 던져본다.

‘로켓배송’에서의 ‘로켓’은 누구인가?
‘새벽배송’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일배송’의 보장은 어디서부터 나오는가?

결국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있어 더 싼 값에 노동력을 제공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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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쿠팡 노동자들의 사망은 물류센터와 배송 업무 모두에서 발생하고 있다. '로켓배송'이라는 쿠팡의 전략이 물류 노동자와 배송 노동자 모두에게 극단적인 노동 강도를 강제하기 때문이다. '로켓배송'의 핵심은 빠른 배송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배송의 지연'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고객이 상품을 주문하는 것과 동시에, 노동자의 노동 강도는 주어진 인력과 노동시간과 상관없이 무조건 달성해야 하는 과업이 된다. 주변 동료가 미처 채우지 못하는 업무량은 곧 다른 노동자들의 추가적인 노동량으로 부여된다.

당일 소화해야 할 업무량을 정해진 시간에 달성하기 위해 쿠팡은 노동자 내부 성과를 경쟁적으로 강제하기 위한 상대평가를 불안정 고용 형태와 결합해 불안정 노동의 불안을 원료로 삼아 극단적인 노동 강도를 추구하고 있다.

물류센터 노동자들은 개별적인 UPH(Unit Per Hour/시간 당 생산량)를 실시간으로 측정해 실시간으로 순위를 매기고, 하위 성과자들에게 은근한 불이익을 줄 뿐만 아니라, 전체 방송을 통해 성과가 낮은 노동자를 직접 호명, 호출하며 모욕감을 주는 방식으로 노동 강도를 강제한다.”(출처:배달노동, 쿠팡이 쏘아올린 로켓배송과 노동자의 죽음(21.04.28.)



많은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사회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배송시스템. 배송을 하다가 과로사를 하는 사람과 배송을 통해 물건을 빨리 받는 사람들. 누군가는 이미 이렇게 보편화된 빠른 배송 시스템을 금지하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회에서 여러 서비스를 돈을 주고 구매해서 사용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배송 제도 자체가 바뀌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이겠지만,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그 ‘이상'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소비자로서의 역할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기본적인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더 빠른 배송'을 우리는 누려도 되는 것일까? 이러한 새로운 질문에 고민을 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더 빠르게 배송받는 서비스가 아무리 인권 침해적이라 하더라도 정당한 대가를 치르면 용인할 수 있는 류의 노동인가? 인간의 노동은 어디까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일까? 노동을 구매하는 데에 있어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이 있는가? 어떠한 유형의 노동이든 대가를 지불하고 구매할 수 있는가?”




노동의 문제는 한 마디로 ‘먹고 사는 문제’라,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민감하고 당장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일 수도 있다. 먹고 사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처우 개선, 비정규직 철폐’ 등의 외침이 배부른 소리로 느껴질 수도 있다.

노동자와 근로자의 어감 차이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다들 근로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노동자를 떠올리면 대부분 블루 칼라는 떠올리기 쉽다. 모두가 노동자이지만 ‘노동 문제’에는 정작 관심이 적은 현실. 헌법에서 보장하는 노동3권은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다. 이 중 가장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단체행동권은 노동조합(이하 노조)와 사용자 간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노조가 노동 조건의 향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노조들의 파업, 집회에 따가운 눈살을 보내곤 한다. 또 집회야? 또 파업이야?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초래하는 파업은 시민들에게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파업의 여파로 전해지는 불편함 이전에, 그들이 파업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지, 파업을 통해 내고자 하는 목소리가 무엇인지 귀기울여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구의역 김모군, 고 김용균씨 사망 이후에 노동현장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여러 법안이 추진되었고, 그 중 노동계에서 가장 필요를 느낀 것은 ‘2인 1조’규정이다. 위험한 현장에서 작업을 수행할 경우 2인이 1조를 이루어 무조건 들어가 작업을 하는 것이다. 최근 평택항에서 철근 콘크리트에 깔려 숨진 고 이선호씨의 사망도 이 2인 1조 규정이 통과되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엄연히 ‘막을 수 있었던’ 재해인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주어진 일을 하는 데에 들어가는 인건비 등 효율성의 측면에서 사용자는 당연히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고, 이렇게 생명과 안전보다 이윤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계속해서 이 당연하고도 당연한 2인 1조 규정의 법제화를 가로막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노동을 하거나, 하게 되거나, 하기를 희망한다. 학교에서도 꼭 학생들에게 진로교육을 한다. 각자의 적성과 흥미에 맞는 꿈을 꾼다. 어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당연히 그 직업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안전이 담보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는 안전이 담보되지 않아, 일을 하다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거나 자칫하면 목숨을 잃기도 하는 노동현장이 즐비하다. 당연히 이렇게 위험한 일자리를 희망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당장의 돈을 벌기 위해서, 혹은 할 수 있는 마땅한 다른 일이 없어서, 집이 가난해서, 공부를 잘 못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서, 번듯한 직장을 잡지를 못해서 등의 각자의 다양한 이유로 이러한 위험한 곳에서 일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 자리를 메꾸어서 일을 해야 한다. 매일 몇 십만명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지하철.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는 스크린 도어를 관리하고 수리하는 김군이 필요하다. 사회는 부분 부분이 연결되어 있는 총체성을 그 특징으로 가진다. 선택할 수 없는 각자의 적성과 능력과 집안과 성격과 그 모든 것을 타고나 시작점이 다른 우리는 한 사회 안에서 다양한 직업을 선택해 살아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실 따위로 연결되어있는 것처럼 어떻게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들의 외침이 정말 나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일까?

사회 교과서에 등장하는 개념 중 ‘문화지체’라는 것이 있다. 기술의 빠른 발전 속도를 문화나 태도, 제도가 따라잡지 못하는 현상이다. 사회는 점차 더 많고 다양한 류의 서비스를 원하고 만들어내고 있지만, 이를 감당하는 노동자에 대한 처우 개선은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들의 외침이 정말 나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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