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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_2021/12호_일상을 이야기로, 기념

12호_특별할 것 없는 날 / 연푸른

by 밍기적_ 2021. 12. 31.

특별할 것 없는 날


에디터 / 연푸른

일어나자마자 생각했어. 오늘은 너를 보러 가야겠다고.
특별히 날이 좋거나, 특별히 날이 좋지 않아서 그랬던 건 아니야. 어느 때와 다름없는 그냥 평범한 아침이었어. 창문을 통과한 찬 기운이 왼쪽 팔을 간질이고,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을 길거리의 정적을 쓰레기차만이 깨고 있었지. 아, 쓰레기차 소리가 기억나는 걸 보니 아침이라 부르긴 너무 이른 시간이었나 봐. 그 쓰레기차는 늘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에 우리 집 앞을 지나거든.
새벽 5시, 어쩌면 하루 중 가장 추운 시간에 눈을 떴기 때문이었을까? 내 학창 시절을 조금 더 따뜻한 시간으로 만들어줬던, 너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말이야.

그날도 이런 평범한 겨울이었어. 나는 체육복 바지를, 너는 무릎이 살짝 덮이는 길이의 교복 치마를 입고 있었지. 첫눈이 내리고 일주일이 막 지난 12월, 다들 검은 스타킹을 신고 있는 와중에 너만 새하얀 맨다리를 드러내고 운동장을 돌고 있었어. 추위 같은 건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한 손에는 메론 맛 아이스크림을 – 그거 알아? 사실 메로나는 참외 맛이래 - 쥔 채로 말이야.
나는 너를 알고 있었어. 선생님들은 가끔 네 이야기를 하시곤 했거든. 7반의 누구는 쉬는 시간마다 깨끗하게 칠판을 닦아 놓는다거나, 7반의 누구는 단순한 숙제도 결코 뻔하게 해오는 법이 없다거나, 7반의 누구는 늘 아침 일찍 등교해 운동장 한쪽에서 혼자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 말이야. 너는 알았을까? 괜히 경쟁심이 붙은 우리 반 친구들은 그 이야기를 들은 후엔 두세 배나 더 공들여서 칠판을 닦았어. 7반의 누구보다 3반의 누군가가 더 깨끗하게 칠판을 닦아 놓는다는 말을 듣고 싶었나 봐.
하지만 아쉽게도 그 목표는 학년이 끝날 때까지도 달성되지 못했어. 선생님께서 칭찬하고 싶었던 건 칠판의 청결도가 아닌 너의 꾸준함이었겠지만, 우리는 칠판의 청결도에 더 많은 신경을 썼거든. 그리고 그건 늘 두 주를 넘지 못했지. 우리가 들은 말이라곤,
“3반은 한동안 칠판 깨끗하게 닦아놓더니, 이제는 안 하나? 이 칠판 지저분한 것 좀 봐라.”
정도였어. 선생님들은 늘 참 너무하시지? 그동안 꾸준히 칭찬해주셨다면, 우리도 더 꾸준히 칠판을 닦았을 텐데. 우린 아직 어렸잖아. 칭찬 한마디, 지적 한마디에 기분이 휙휙 바뀌는 사춘기의 소녀들은, 그 말은 들은 후로 다신 전만큼 칠판을 깨끗이 닦지 않았어. 그리고 여전히 너는, 쉬는 시간마다 칠판을 깨끗하게 닦아 둔다는 유일무이한 7반의 누구로 남았지.

참외 맛 아이스크림을 쥐고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을 돌고 있는 너를 봤어. 눈썹을 들썩이며 무언가 말을 하다가, 잠시 후엔 깔깔깔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렸고, 너는 배를 잡고 웃다가, 숨을 고르곤 참외 맛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어.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 옆 벤치에 앉아 너를 보고 있었어. 옆에선 내 친구들이, 쟤가 7반의 누구구나, 그 국어 선생님이 매일 이야기하시던, 같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지.
난 네가 평범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국어 선생님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몰라. 선생님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네가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이인지는 잘 모르겠던데? 저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우리 반 실장도 낼 수 있는데, 우리 반 주번도 칠판은 엄청 깨끗이 닦을 수 있는데, 우리 반 13번도 메로나를 좋아하는데, 우리 반 1등이 너보다 훨씬 더 성적이 좋은데. 네가 특별할 건 전혀 없어 보였어. 그래서 나는 조금, 오기가 생겼던 것 같아.
그 다음 날부터는 나도 일찍 학교에 왔어. 아침마다 운동장 한쪽에서 스트레칭을 한다는 너를 이기고 싶었거든. 근데 막상 옆구리를 늘리고 있는 너를 보니까, 내 생각만큼 쉽게 다가가지는 못하겠더라. 이미 수 달 동안 너에게 길들여진, 아침 운동장의 왼쪽 구석. 그곳은 너만을 위해 할당된 공간 같았어. 다른 사람이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 자리 같았지. 어쩌다 일찍 등교한 다른 친구들도 아마 다 비슷한 걸 느꼈을 거야. 너를 흘끔흘끔 쳐다보고 지나치는 사람은 있어도 너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어. 그렇게 너는 늘 운동장 왼쪽 구석에서,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몸을 풀고는, 가볍게 운동장 두어 바퀴를 뛰고 교실로 들어갔지.
그 후론 나도 늘 일찍 학교에 왔지만, 여전히 너에게 말을 걸지는 못했어. 나는 교실 창문에 기대서, 가끔은 네가 스트레칭 하는 걸 따라 하면서, 가끔은 오늘은 두 바퀴를 뛸까 세 바퀴를 뛸까 혼자만의 내기를 하면서, 그렇게 너를 보기만 했어. 넌 가끔 새로운 동작을 추가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하던 동작을 안 하기도 했지. 몸 어딘가가 불편했는지, 아니면 그냥 동작 순서를 까먹은 건지 알 수 없지만, 그걸 관찰하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었어. 그리고 여전히 너는,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장 한쪽에서 혼자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는 유일무이한 7반의 누구로 남았지.

너는 학교의 어디에든 있더라. 플라스틱 물통을 버리러 간 체육관 뒤편 쓰레기장에도. 음악실로 향하는 길목 복도에도. 점심시간마다 걸었던 운동장 트랙에도. 읽지도 않을 신간도서를 구경하러 갔던 도서관 문학 코너에도.
학교의 어디에서든 너를 볼 수 있었어. 처음엔 이틀에 한 번쯤 네가 보였는데, 몇 달이 흐른 후엔 하루에도 두어 번씩 너를 본 것 같아. 너는 영어실 앞 스탠딩 책상에서 친구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잖아. 네가 점심시간에 굳이 교실에 있던 스탠딩 책상을 영어실 앞까지 끌고 가는 모습을 봤어. 왜 하필 영어실이었을까? 너희 반에서 두 교실이나 떨어져 있는 곳이었는데. 그리고 너는, 점심시간보단 저녁시간에 운동장 돌기를 더 좋아했어. 사실 그게 네 선호였는지, 아니면 너와 함께 운동장을 도는 다른 친구들의 선호였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석식 시간이 되면 나는 먹고 싶지도 않은 과자를 사러 매점에 가곤했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다 보면, 네가 오늘 들고 있는 게 무슨 맛 아이스크림인지가 슬쩍 보였거든.
어느 순간부터 네가 보이지 않으면 난 심지어 조금 아쉽기까지 했는데. 내가 너를 볼 수 있었던 만큼 너도 나를 볼 수 있었겠지? 너는 나를 봤어? 내가 보이지 않으면, 조금은 아쉬웠어?

우리가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나눴던 대화를 기억해. 나는 왜 체육복 바지를 입고 등교를 하느냐며 담임 선생님께 혼이 나고 있었어.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애교스럽게, 죄송해요, 앞으론 교복 잘 입을게요, 라고 말하고 교실로 돌아가려는데, 너희 반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어. 그리고는 가는 길에 너희 반에 들러서 너를 좀 불러 줄 수 있느냐고 물었지.
몰랐겠지만, 그때 나는 이미 너와 꽤 친해진 상태였어. 너희 반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속으로 수십 번 고민했지. 너에게 친한 티를 내야할까 – “안녕, 네가 7반의 누구지? 나 너 알아. 네 이야기 많이 들었어.”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해야할까 – “저.. 너희 반 담임 선생님이 이런 애를 찾으시던데, 혹시 걔가 누구니?” 하지만 모르는 애가 친한 척을 하는 건, 좀 당황스럽잖아. 모르는 척을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앞문을 열었는데,
“어?”
“어,”
“안녕?”
“아.. 안녕.”
거기엔 네가 서 있었어. 어쩐지 뻑뻑하기로 소문난 교실 문이 너무 쉽게 열린다 싶었는데, 내가 문을 여는 타이밍에 딱 맞춰서 너도 함께 문을 열었나 봐. 내 예상보다 더 빨리 마주한 네 얼굴에, 나는 그때까지 준비했던 말들을 다 까먹어버렸어. 잠깐동안 멍하니 네 얼굴을 쳐다보다가, 네 표정에 점점 의아한 기색이 서릴 때쯤에야 정신을 차렸지. 나는 버벅거리면서,
“너희 반 담임 선생님께서, 너 찾으시더라. 교무실로 오라고 하셨어.”
라고 말하고는, 말하자마자 아차 했어. 모르는 척을 해야 했는데, 내가 너와 친하다는 사실을 들켜버리면 어떡하지? 뒤늦게라도 “네 이름이 00 맞지?” 같은 변명 같은 질문을 덧붙여볼까 고민하던 차에,
“알겠어. 전해줘서 고마워.”
하는 너의 대답이 들렸던 거야. 너는 내가 널 안다는 사실에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았어. 하긴, 국어 선생님 덕분에 ‘네가 7반의 누구구나’ 하는 말은 많이 들었을지도 몰라. 다행이다. 나는 슬쩍 웃으며 눈인사를 하고는 그 자리를 뜨기 위해 몸을 돌렸어. 네 앞에 더 오래 서 있다간, 내가 너와 친하다는 사실을 들킬 것 같았어. 네가 나한테 먼저 아는 체를 할 거라곤, 정말이지 생각도 못 했어.
“너, 걔지?”
“…누구? 나를 알아?”
“아니.”
“아, 그래.”
“근데 네가 일찍 등교하는 건 알아. 아침마다 체육복 바지 입고 등교하는 거 봤어.”
“아… 그렇구나.”
“너 선도부한테 복장 단속 안 걸리려고 일찍 등교하는 거야?”
어떻게 거기다 대고, 아니. 체육복은 그냥 입는 거고, 사실은 너를 보려고 일찍 등교하는 거야. 같은 대답을 할 수 있겠어. 그건 너무 이상하잖아. 그래서 나는 그냥, 응, 맞아. 끝을 우물우물 흐리며 말을 하고는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어. 혹시나 더 대화가 이어질까 싶었는데, 너는 그냥
“그렇구나. 아무튼 전달해줘서 고마워.”
라고 말하며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뒤를 돌아 교실 안으로 사라졌어.
남겨진 나는 잠시 가만히 서 있었어. 속에선 온갖가지 생각이 폭죽처럼 터지고 있었지만, 적어도 겉으론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였을 거야. 네가 나를 알고 있었어. 티가 나버렸나 봐, 그래서 날 알아차렸나 봐. 어떡하지? 친한 티를 내야 할까, 모르는 척을 해야 할까?
하지만 모르는 애가 친한 척을 하는 건, 좀 당황스럽잖아. 그래서 나는, 그날 이후론 전처럼 일찍 학교에 오지 않았어. 교복 치마를 입고, 네가 스트레칭을 끝내고 운동장을 돌 시간 즈음에 맞춰 교문을 지났어. 티가 나버리면 안 되니까, 날 알아차리면 안 되니까. 담임선생님께서는 나를 칭찬하셨어. 이제는 체육복 바지를 입고 등교하지 않는구나, 하고.

몇 달이 지나고, 다시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그 소식을 들었어. 사고가 났다고 하더라.
체육관 뒤편 쓰레기장, 음악실 옆 복도, 운동장 트랙, 도서관 문학 코너. 너는 학교의 어디에든 있었는데, 그날은 네가 딱 한 군데에 밖에 없었어. 너는 버스를 타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는, 다시 교문을 지나 밖으로 나갔고, 그 후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 우리는 교실 창문에 붙어서, 선생님들은 운동장에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지. 그중 몇몇은 눈물을 흘렸고, 몇몇은 그보다 더 크게 흐느껴 울었어. 복도를 타고 너희 반 친구들의 울음소리가 우리 반까지 들렸어. 심지어 우리 교실은 다른 층에 있었는데도 말이야.
나는 눈물을 흘리진 않았어. 우린 모르는 사이였고, 너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니까. 그날 우리가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말이야. 아니, 내가 너를 보기 위해 쉬는 시간마다 학교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기 전까지는. 아니, 그것도 아니야, 내가 아침마다 스트레칭을 하는 너를 관찰하기 전까지는. 아니, 아니야, 아니, 아니…
언제부터 너는 나에게 특별해졌을까? 넌 그냥 다른 반 아이였을 뿐이었는데. 굳이 너를 찾아다니지 말 걸 그랬어. 굳이 너를 이겨보겠다고 오기 부리지 말걸. 전혀 특별할 것 없던 네가 특별해져 버려서, 학교에서의 모든 날이 쓸데없이 따뜻해져 버렸어. 네가 있던 영어실 앞 복도가, 매점으로 향하는 길이, 체육관 뒤편 쓰레기장, 음악실 옆 복도, 운동장 트랙, 도서관 문학 코너가. 몽땅 쓸데없이 특별해져 버렸어. 심지어 어느 평범한 새벽 5시에 문득 네가 생각나는 바람에, 이제는 모든 평범한 아침이 너처럼 특별해져 버리겠지. 나는 조금 억울해. 늘 조금은 억울했어.

너는 늘 친구와 함께였어.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넌 목소리가 또렷하고 발음이 정확해서, 그냥 옆을 지나치다 보면 네 말소리가 들렸어. 너는 멤버가 다섯 명인 아이돌 그룹을 좋아해. 너는 판타지 소설은 좋아하지만, 로맨스 소설은 좋아하지 않아. 너는 영국인 친구와 펜팔을 하고 있고, 경영학과에 가고 싶어 했어. 나는 네 목소리를 좋아했어. 네 옆을 지나치기 위해, 늘 최선을 다했어. 난 늘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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