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이야기로, 기념
편집장 / 연푸른
12월은 동화 같은 달이다. 길거리에는 줄지어 손 잡은 꼬마 전구의 불빛이 반짝거리고, 옷 가게에서는 찰랑이는 슬레이벨 소리로 채워진 캐롤이 흘러나온다. 텅 빈 광장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지고, 사람들은 나뭇잎을 떨어뜨려 앙상해진 가로수 나무에 알록달록한 털실 옷을 입힌다. 눈이 내리면 누군가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뛰쳐나온다. 눈사람과 눈 오리가 여기저기 만들어지고, 이들의 주인은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창조물을 귀여워해 줄 것이라 기대하며 다시 따뜻한 실내로 들어가 몸을 녹인다. 크리스마스라는 세계적 기념일 때문인지, 혹은 검은 하늘에 흰 눈이라는 환상적인 풍경이 연상되기 때문인지. 12월은 어쩐지 마음 한 켠이 간질거리는, 동화 같은 달이다.
밍기적에게도 12월은 특별하다. 작년 12월은 밍기적이 첫 시작을 하게 된 달이고, 그렇기에 이번 12월은 술기운으로 처음 달아오른 프로젝트가 한 해를 쉼 없이 달려 1년을 오롯이 채운 달이기 때문이다. 얼마전 밍기적들은 우리의 일년을 기념하며 종로의 어느 술집에 앉아 소소한 축하 인사와 술잔을 나누었고, 서로에게 박수와 다음해를 위한 응원을 건네기도 했다. 무려 ‘밍기적 1주년 기념일’이었다.
이렇듯 우리의 12월은 수많은 기념으로 가득 차있다. 한 해 가장 큰 기념일 중 하나인 크리스마스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혹자에겐 크리스마스보다 세계 인권 선언 기념일이 더 큰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런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기념일’이 아니더라도 기념할 일은 많다. 연말마다, 연초마다. 우리는 지나온 한 해를 보내주고 다음 일년의 안녕을 비는 수많은 연말 모임과 행사에 참석한다. 새해를 기념해 새로운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그 버킷리스트을 달성하는데 도움을 주겠다며 자신의 서비스를 파는 수많은 연말 세일을 마주한다. 1월 1일 12시에 맞춰 친구에게 보내는 해피뉴이얼 인사도, 굳이 떠오르는 첫 해를 보겠다며 나라의 동쪽 끝으로 향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기념은 ‘어떤 뜻 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하다’는 의미라는데, 위에 나열한 모든 행위는 ‘내가 올해 얻은 인연, 배움, 경험을 잊지 않고, 더 나은 내년을 도모하려는 마음을 간직’하기 위한 일이 아닌가. 결국 모두 연말을, 연초를, 지나온 일년을 기념하는 행동이다.
연말 연초를 벗어나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달력은 온갖 기념일로 채워져 있고, 유적지엔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기념하며 만든 동상과 기념관이 잔뜩이다. 노래나 그림, 예술로서 무언가를 기념할 수도 있고, 누군가를 기념하며 그의 이름을 따 도로와 마을의 이름을 정할 수도 있다. 우리가 흔히 ‘기념일을 챙긴다’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모습 (선물과 편지를 주고 받고,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하며 서로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등 등) 외에도, 기념을 하는 데에는 수많은 대상과 방법과 목적이 있다. 같은 일도 사람에 따라 다른 목적으로 기념되고, 목적이 다르면 방법도 달라진다. 그러니 누군가에겐 매일 저녁 집으로 들어와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일기를 쓰는 일도 충분한 기념 행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기념일 같은 거 잘 안챙겨’라고 말하는 사람도, 실은 무언가를,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념하고 있을 수도 있다.
밍기적의 12호 <기념>은, 이런 온갖 기념에 대한 에디터들의 생각의 담았다.
연푸른은 그가 기획한 아카이빙 <2021, 나의 기념비>에서 그의 친구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2021년을 마무리하며, 올해의 무엇을 기념하고 싶나요?’ 직장 없이 자유롭게 살아온 일년을 기념하는 이부터, 가족과 보낸 소중한 시간을 기념하는 이까지. 우리는 이 기사에서 무엇이 기념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훑어볼 수 있다.
바투는 그의 글 <기념하기 위해서라도>에서 밍기적이 처음 시작된 날과, ‘밍기적 1주년 기념일’의 추억을 불러온다. 그는 일년동안 쉼없이 밍기적을 만들어온 소감을 이야기하며, 무언가를 기념한다는 행위가 우리의 행동과 마음가짐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연푸른의 <특별할 것 없는 날>은 학창 시절의 친구를 회고하는 누군가의 속마음을 담아낸 소설이다. 소설은 평범한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되고, 특별할 것 없는 날이 특별한 날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특별해서 기념하는게 아니라 기념하기 때문에 특별해지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위의 세 기획과 달리, 온기의 <기념하지 않는 삶>은 기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그는 한 때 전세계를 여행하며 연말을 기념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러한 행위가 때로는 유난으로, 과시로,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글을 통해 우리는 현대의 ‘기념 문화’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은 망의 <275일 기념일>에서도 이어지지만, 그가 비판하는 지점은 온기가 비판하는 지점과는 다르다. 온기가 기념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비판했다면, 망은 기념일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을 비판한다. 평범한, 그저 숫자만 다른 것에 불과한 특정한 하루를 우리는 왜 기념하게 되었는가? 그는 글을 통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 이번 기념일은 어떻게 보냈나요?’
먼저 이 글을 모두 읽어 본 편집자는, 서로 다른 이야기들 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념이 가지는 특성 하나를 발견했다. 기념은 서로 다른 행위들과 아무 상관없는 날들을 하나로 묶어 그 안에 이야기를 부여한다. 오늘과 오늘로부터 100일, 200일이 지난 후의 어느 날은 사실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날을 기념하는 순간, 그 날은 100일, 200일을 거슬러와 오늘과 합쳐진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단순한 날들의 배열, 단순한 행위의 반복은, 그 안에 기념의 의미가 실리는 순간 하나의 흐름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기념을 하고, 혹은 기념을 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며, 가끔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기념 행위를 하며 유난을 떨거나 과소비를 하고, 일상에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굳이 숫자를 조합해 ‘기념일’이라는 가짜 이야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가 재미있든, 아니든, 진정성 있든, 그렇지 않든. 어찌됐든 기념은 이야기를 만드는 행위가 아닐까.
자, 그럼 밍기적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적어보자. 밍기적에게 12월은 특별하다. 작년 12월은 밍기적이 첫 시작을 하게 된 달이고, 그렇기에 이번 12월은 술기운으로 처음 달아오른 프로젝트가 한 해를 쉼 없이 달려 1년을 오롯이 채운 달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며 밍기적의 1호 <시작의 시작>을 다시 읽었다. 거기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아직은 아지랑이처럼 흐릿한 끝을 그려가는 과정속이지만, 이제는 조금씩 방향과 형태에 대한 고민이 마무리되고 틀이 잡혀간다. 그리고 독자를 만날 때 즈음이면 비로소 반에 가까운 시작이 되겠지. 결국 1호 시작은 밍기적의 시작의 시작이자, 동시에 반이 된 시작이다. 직선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에 도달한 밍기적을 그려본다. 그 끝에서, 네 명의 에디터 모두 각자의 모습으로 변화해 있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지금 2021년이라는 직선의 한 쪽 끝에 서서, 내가 이미 지나쳐온 다른 쪽 끝을 보고 있다. 12개의 서로 다른 주제들이었지만, 1주년을 기념해버렸으니 그 점들은 모두 하나의 선 위에 존재하게 되었다 (당연히 같은 잡지의 주제들이었으니, 원래부터 한 선 위에 있었을 거라는 지적은 받지 않겠다). 지난 11개, 그리고 이번의 12호를 지나는 동안 나는, 밍기적의 네 에디터들은, 밍기적은 어떻게 변화해왔을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썼을까? 지나온 점들을 하나씩 두드려보며 밍기적의 첫 일 년을 마친다. 모두에게 연말이 따뜻하게 나를 돌아보고, 나의 다음을 격려할 수 있는 시간이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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