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시작.
에디터_연푸른
내게 있어서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시작을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글쓰기를 생각해보자. 나는 글을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첫 문장을 쓰는데 걸리는 시간이 비슷할 정도로 첫 문장 쓰기를 어려워한다. 앞으로 적을 글의 논리 구조와 결론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으면 타이핑을 시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지 앞에서는 늘 막막해진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종이에 내가 첫 획을 그어야 하는 순간이 부담스럽다. 미룰 수 있는 최대한까지 미루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시점에서야 후회하며 서둘러 글쓰기를 시작한다.
나는 모든 일을 시작할 때 이런 자세를 취하고는 한다. 시작과 동시에 끝을 생각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내가 낼 결과물, 내가 있을 도착지를 상상한다. 시작은 도착지를 향해 그어질 선의 한쪽 끝이고, 나는 내가 도착해야 할 다른 어느 지점을 표시한 후에야 자를 집어 들 수 있다.
그렇기에 끝을 알고 있는 것은, 적어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불명확한 이미지로라도 형태화할 수 있는 것은 시작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다. 뭐가 있을지도 모를 끝을 향해 달려가는 건 피곤한 일이니까. 마지막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어쩌면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이 한 번 머릿속을 스치면, 내가 굳이 이 일을 시작해야 하는지 망설여진다. 내가 있는 지금 여기의 아늑함과 익숙함을 붙잡고 싶어지고, 안주하고 싶어진다. 끝을 상상하는 것은 따뜻하고 친근한 지금에서 벗어날 하나의 이유를 제공하는 행위다. 내가 가야할 마지막 지점에 작은 연필 자국을 내 두는 일이다.
가끔은 끝만으로는 부족할 때도 있다. 끝이 너무 멀고,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만들어져 있으면 당장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그럴 때는 끝으로 가는 길목을 알아야 한다. 내가 어떤 길을 밟아서 끝에 도달하게 될지, 그 과정이 얼마나 길 것이며 어떤 장애물을 만날 수 있을지. 과정 없이 끝만 남으면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를 모르게 된다.
시작을 하기 위해서, 결국 나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어야만 할 것 같다. 나의 다음 발걸음이 향할 곳은 어디인지, 얼마나 큰 보폭으로 걸어야 하는지 혹은 뛰어야 하는지, 중간에 쉬어갈 곳이 있는지, 어떤 신발을 사야 하는지, 그리고 나서 도착할 곳은 어떤 모습인지. 이 모든 것들을 이미 알고 나서야 비로소 첫 문장을 쓰고, 첫 발걸음을 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시작은 어렵다. 시작은 시작이지만, 사실은 시작이 아니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려고 의자에 앉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던가. 얼마나 많은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쳤고, 그중 얼마나 많은 것이 폐기되었으며, 때로는 메모조차 되지 못하고 잊혔던가. 그중 한 아이디어를 골라 잡고, 결론을 내리고, 거기로 가는 길을 다듬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가.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사실 시작은 시작이 아님을 의미한다. 시작을 하기까지 당신이 거쳐왔던 고민, 그 고민으로 인해 정해진 방향성, 그리고 아직은 허무맹랑해 보일지 모르는 끝에 대한 상상까지.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기어코 반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시작'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거다. 시작에 대한 고민이 만들어지는 시점, 즉 시작의 시작과 그러한 고민이 비로소 행동으로 옮겨가서 이미 반이 된 시작이.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시작의 시작에 와있다. 글을 완성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이 글이 실릴 잡지가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 어떤 식으로 만들어져 당신에게 읽힐 것인지를 감히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 끝이 정해지지 않은 시작. 시작의 시작점에서 겁도 없이 문장들을 써 내리고 있다. 그리고 《밍기적》의 창간호 <시작>을 완성하는 모든 과정은 아마 이렇게, 그리 체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하지만 겁 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시작>은 2021년이라는 새로운 시간 속에서, 그러나 동시에 지루하게 이어지는 팬데믹의 연장 속에서 각 필진이 경험한 ‘시작’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에디터 '온기'의 <시작은 반이 아닌 이유>는 무수한 시작과 완결을, 그리고 가끔은 실수를 경험해온 온기가 2021년의 시작과, 잡지 <밍기적>의 시작을 맞이하며 되새긴 짧은 다짐과 스스로에 대한 격려를 담고 있다. 에디터 '망'의 <인테리어의 시작>은, 이미 시작되어 때로는 지루하게 이어지는 일상 속에서도 갑작스럽게 일어나 마음에 안착하는 크고 작은 시작이 있음을 보여주며, 에디터 '연푸른'의 <새롭게 시작하게 된 일이 있나요>는 그런 크고 작은 시작의 이야기를 짧은 인터뷰로 담아낸다. 한편 에디터 '바투'의 <너와 나의 시작은 다르다>는 ‘같은 시작점’을 전제로 하는 능력주의 담론의 도덕적 부당성을 고발하고, 이는 7년마다 경제적 지위가 재배치되어 ‘같은 시작점’이 더 이상 의미 없어진 세상에서 평등은 어떤 모습일 것인가를 상상한 연푸른의 <재시작 시스템>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시작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잡지 《밍기적》의 출발이기도 한 1호 <시작>은 여전히 프로젝트 《밍기적》의 반이 되지 못한 시작의 과정 속에 있다. 아직은 아지랑이처럼 흐릿한 끝을 그려가는 과정 속이지만, 이제는 조금씩 방향과 형태에 대한 고민이 마무리되고 틀이 잡혀간다. 그리고 독자를 만날 때 즈음이면 비로소 반에 가까운 시작이 되겠지.
네 명의 에디터가 함께 상상하고 그려온 끝으로의 직선은 그때부터 시작될 것이다. 결국 1호 <시작>은 《밍기적》의 시작의 시작이자, 동시에 반이 된 시작이다. 직선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에 도달한 《밍기적》을 그려본다. 그 끝에서, 네 명의 에디터 모두 각자의 모습으로 변화해 있기를 기대하면서.
_project. 밍기적.
'내가 일으킬 수 있는 가장 작은 기적, 밍기적'이라는 밈에서 영감을 얻어 기획한 월간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들'을 소재로 4명의 에디터가 각자의 글을 펼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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