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시작은 다르다
- 능력주의의 오만
에디터 / 바투
오늘날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여러 개의 키워드 중 단연 뜨거운 것은 공정성이다. 수 십 억 원대의 횡령이나 비리보다도 기득권 자녀의 대학교 부정입학이 더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사는 시대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가 나에게 가져다주는 쓰디쓴 아픔보다도,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은 것에 더 크게 분노한다. 나 또한 그런 편이다. 이렇게 민감한 주제가 되어버린 ‘공정함’이 과연 실현 가능한 가치인지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
공정(公正)하다는 것은 ‘공평하고 올바르다’는 의미이다. 즉, 어떤 요소나 상황이 ‘공정’하려면 평등을 담보하면서도 동시에 나아가는 방향이 도덕적으로 올바를 것을 요구한다. 현 사회에서 이러한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활용되는 체제로 대표적인 것이 능력주의(meritocracy)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성취와 보상을 갖는, 듣기만 했을 때는 한없이 희망적이고 정의로워 보이는 이 달콤한 유혹 이면에는 불평등이 자리 잡고 있다.
어쨌든 한 사회 내에서 불평등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원하는 자원은 희소하고 한정적이니까. 다만 이를 보다 평등하게 나누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 몫을 조금 떼어 나누어주고, 내가 가진 것을 자만하지 않고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경시하지 않는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보상의 배분에 대한 ‘도덕적으로 올바른’ 태도는 능력주의 사회 내에서 굉장히 옅어진다. 내가 내 능력과 노력으로 이 자리까지 오게 됐는데, 나만큼 노력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내 몫을 내가 왜 나누어주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짙어진다. 또한 실패자들은 본인이 가지지 못한 능력과 노력을 비관하며 자존감이 저 밑으로 한없이 떨어진다.
분명 능력주의 체제가 가지는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나 또한 그런 체제 하에서 ‘할 수 있다’고 믿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게 하는 추진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은 내 보상을 뿌듯해하고 자랑스레 여기며, 노력하지 않으면서 성적이 나오지 않는 친구들을 남몰래 답답해하기도 했다. 부끄럽지만 나 또한 능력에 따른 보상은 정당하다는 기능론적인 시각에 사로잡혔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때 내가 간과했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가 그 자리까지 올라가게 만든 데에는 나의 노력이 미친 영향도 분명히 있지만, 동시에 그 노력이 오롯이 나의 개인 의지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타고난 재능, 가정 배경, 상황과 지역, 시대 등 내가 운 좋게 타고난 것들이 영향을 미쳤다. 노력을 쏟아 붓는 그 자체에도 여러 환경적인 요소가 개입한다. 내게 주어진 과제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가정환경이 뒷받침 되었는가, 집중과 몰두가 어린 시절부터 내게 체득된 습관인가, 슬럼프를 이겨 내는 데 힘을 주는 주변 사람들이 있는가, 효율적으로 공부하는 능력을 타고났는가, 그렇지 않다면 내가 가진 능력을 이 사회는 얼마나 높게 평가하는가. 그렇지만 경쟁의 문턱을 넘어서서 성공의 결과를 쟁취하는 동시에 내 성공은 온전히 내 덕이고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 된다, 겸손한 자세는 찾을 수가 없다. 승자의 오만함과 패자의 모멸감이 당연해지고, 따라서 사회적 연대는 약해진다.
모든 사람의 시작은 같지 않다. 모두의 시작은 다르다. 동시에 같은 시작이 같은 결과를 담보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모두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밀 때가 있다. 애초에 시작이 같지 않았음에도 각자의 능력과 환경, 재능과 노력에 귀인하고 그 결과를 오롯이 개인이 짊어지게 한다.
우리의 정말 첫 시작인, 태어나면서부터 나의 의지와 선택과 상관없이 짊어지게 되는 (혹은 누군가는 얻게 되는) 것들이 있다. 시작은 우리 때문도 아니고 우리 덕분도 아니다. 그렇게 같지 않은 시작에서부터 이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같지 않은 시작으로 모두가 불공평한 시작점에 놓일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그리고 그 타고난 행운과 불운이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같지 않은 그 시작으로 인한 격차를 최대한 줄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아닐까. 롤스가 말한 무지의 베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내 의지가 아닌 다른 요소들도 분명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각자의 시작은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연대해야 한다. 어느 누구라도 모든 부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다.
이미 모두에게 다르게 주어진 시작에서의 격차를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한 방법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교육이다. 나또한 공교육 현장에 몸담고 있지만 그리 당당하게 말하진 못하겠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교육이 사회적 이동 가능성을 높이는 통로가 되어주는가? 오히려 상층부가 누리는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데 가장 좋은 이유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교육이 아닌가. 이미 입학 때부터 다른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얼마나 그 위치가 달라지는가. 아니, 달라지길 기대하는 것이 과연 맞는가. 죽어라 공부해서 좋은 대학가서 성공하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교육 수준을 높여 높은 자리에 올라가라고 해도 되는가. 참 모순적이다. 능력주의에서 ‘교육’을 방패삼아 기회의 평등을 외치고 있고, 동시에 교육을 통해서는 상층부에 올라갈 수 없을 뿐더러 옳지도 않다. 교육자로서의 무력감만 짙어져간다.
앞서 공정함은 공평과 올바름을 동시에 요구한다고 했다. 사회적 이동 가능성을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제공하겠다는 능력주의가 과연 도덕적으로도 타당할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같을 수 없는 시작점을 조금이나마 비슷하게 만드는 것에 모두가 동참해야 한다. 그것이 곧 사회적 연대이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며, 능력주의에서 결여된 도덕적 올바름을 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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