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시작 시스템
에디터 / 연푸른
수연
A: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2월 6일, 8시 뉴스를 시작합니다. 내년 ‘재시작의 해’를 앞두고 대한민국이 들썩이고 있습니다. 매년 재시작의 해를 앞둔 12월이 그랬던 것처럼, 대규모의 기부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특히 ㈜코코넛전자의 이사진 중 한 명이죠, 최덕훈 이사의 경우 올해 11월에만 총 1700억 원에 달하는 비용을 저자산층 주거 환경 개선 및 직업 교육 확대에 사용하라고 기부하며 큰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이렇듯 전 국민의 관심이 12월 30일, ‘재시작의 날’로 모이고 있는 현재, 재시작 시스템의 관리청의 함지연 청장님을 모셔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청장님.
B: 안녕하세요.
A: 네 반갑습니다. 매년 재시작의 해를 앞두면, 재시작 시스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굉장히 높아지고는 하는데요. 모든 국민 여러분이 이미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그래도 간단히 시스템에 대한 소개를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B: 네, 재시작 시스템은, 이제 정식 명칭은 ‘정기 국민 자산 재배치 정책’인데요, 그 정책이 시행되는 메커니즘과 전체 제도를 통틀어서 ‘재시작 시스템’으로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는 7년에 한 번 컴퓨터 프로그램을 돌려서 전 국민의 자산을 무작위로 재배정하는, 그런 정책이고. 그 외에 이 정책이 원활히 시행될 수 있도록 자산 규모를 정기적으로 신고하거나, 일정 기간 동안 공개하도록 하고 있는데요, 이런 정책도 다 ‘정기 국민 자산 재배치 정책’에서 파생된 제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A: 이 정책이 도입된 것이 올해가 70주년이었죠. 이런 정책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은 뭔가요?
B: 시스템이 도입되던 당시에는 사회 불평등이 굉장히 심화되고, 당시 기득권층, 지금 말하면 고자산층이죠. 그런 계층이 대를 이어서 부를 세습하고, 그러면서 가난한 사람은 점점 가난해지고, 부자인 사람은 점점 부자가 되는 현상이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능력주의’라고 하죠. 내가 능력만큼의 대가를 받을 수 있다, 능력이 있으면 있을수록 좋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 이런 가치관을 ‘능력주의’라고 하는데, 이게 과연 사실이냐, 능력도 결국 잘 사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 아니냐. 이런 식의 지적도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문제의식을 느낀 ‘개발자’가 해킹으로 국가 시스템을 장악한 후에 재시작 시스템을 도입했고, 그 이후에 여러 절차를 거쳐서 정식 정책으로 자리를 잡은 겁니다. 시스템 이름도 ‘재시작’보다는 ‘재배정’이 정확하지 않으냐는 지적이 많은데, ‘개발자’가 직접 사용한 ‘재시작’이 지금은 일상적 명칭으로 굳혀졌습니다. 아무튼 정식 절차를 거쳐서 도입된 정책이 아니다 보니, 초기에는 많은 반발이 있었습니다만 현재는 70년 동안 잘 보완이 되면서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겠죠.
A: 들어보니까, 굉장히 갑작스럽게 도입이 된 것 같습니다. 많은 혼란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이 되는데요, 재시작 시스템이 이렇게 자리를 잡기까지 시행착오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B: 뭐 당연히 있었죠. 모든 자산이 전부 랜덤으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니까, 백만장자가 한순간에 가난해지기도 하고 그런 경우가 꽤 많지 않습니까? 시행 첫해에는 그런 식으로 저자산층으로 배정된 사람 중 일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는데요, 대표적으로 물류 사업을 하시던 사장님 한 분이 재배정 이후 1년 조금 넘은 시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하셨어요. 나중에 보니까 그분이 반지하방에서 거주하시면서 남은 6년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경제적인 상황에서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 문제가 참 많이 있었습니다만, 현재는 ‘이게 나의 상황이 될 수도 있구나’하는 사회적 깨달음이 생기면서 점차 저자산층을 위한 기부라던가, 다른 제도적 보완이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올해도 보시면 대규모 기부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 여러 보완의 결과로, 지금은 저자산층이 되어도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은 생계에 그 정도의 어려움은 겪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초기에 비하면 혼란이 훨씬 덜하죠.
A: 확실히 재시작 시스템이 도입된 이후 쪽방이나 비닐하우스 같은 열악한 시설에 거주하는 사람의 수가 현격히 줄어들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바 있죠.
B: 맞습니다. 그 외에도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다양한 제도에 변화가 생겼는데요. 계층을 부르는 이름도 함께 변했죠. 70년전에는 저소득층, 고소득층 이렇게 소득으로 경제적 계층을 지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재시작 시스템은 자산을 재배정하기는 하지만 직업은 유지가 되거든요. 그렇게 소득으로 경제 계층을 칭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면서, 저자산층, 고자산층, 이런 식의 단어가 통용되기 시작한 겁니다.
A: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아무튼 재시작 시스템이 경제적 불평등의 개선에 확실히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개발자’도 이런 결과를 염두에 두고 시스템을 만든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을까요?
B: 사실 저희가 재시작 시스템을 처음 도입한 세력을 ‘개발자’라고 부르기는 하는데요, 사실 이분들의 어떤 의도나, 시스템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라는 식의 조언 같은 것은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제 추측을 하기로는, ‘롤스’라는 정치 철학자가 있지요? ‘무지의 베일’이라고 해서, 내가 어떤 사회적 위치에 가게 될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제도를 만들고, 정의의 원칙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개개인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이 아니라, 모두에게 최소한의 피해가 가는 방식으로 제도를 만들 수 있다는......
수연은 이쯤에서 휴대폰 화면을 껐다.
수연은 지금 졸업 논문의 주제를 정하기 위해 ‘재시작 시스템’의 운영에 관한 온갖 자료를 다 조사하고 있었다.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철학자의 이름이 난무하는 논문을 몇 시간째 붙잡고 있던 수연은 머리도 식힐 겸, 혹시라도 쓸만한 내용이 있을까 기대하며 어제자 뉴스를 틀었다. 하지만 그럼 그렇지. 뉴스룸에 등장한 시스템 관리청장이라는 사람은 수연이 이미 수십 번은 더 읽고 들었을 내용을 그대로 읊을 뿐이었다. 저런 기본적인 이야기만 할 거라면 굳이 뉴스룸에 부를 필요가 있었나? 수연은 책상 가득 펼쳐진 종이 뭉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저 정도 인터뷰는 나도 할 수 있겠네.
수연은 앉은 자리에서 상체를 좌, 우로 비틀며 쭉 기지개를 켰다. 책상 외곽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던 종이 뭉치 몇 개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후루룩 책상 아래로 탈출했다. <70주년 기념 학술 발표회: 정기 국민 자산 재배치 정책의 변천과 과제>, <’재시작 시스템’의 민주성 논의 – 4차, 5차 개정안을 중심으로> 따위의 제목이 멋없는 명조체로 적혀 있었다. 수연은 떨어진 종이를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의자 등받이에 축 몸을 기댔다. 스테이플러에 한쪽 귀퉁이가 찍힌 상태로 바닥을 나뒹구는 종이 뭉치가, 엉덩이만 의자에 붙인 채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있는 수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 지루한 논문의 숲에서 헤맨 것이 벌써 며칠째지만, 여전히 수연은 논문의 개요는커녕 세부 주제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연은 재시작 시스템에 대해 도무지 궁금한 것이 없었고, 그나마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주제는 이미 누군가 다 연구를 해둔 상태였다. 세상엔 왜 이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많지. 수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그 똑똑한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때 수연의 휴대폰 화면이 소리 없이 켜졌다. 소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오늘 한 시에 문밖으로 나오시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수연은 퍼덕거리며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10시 32분. 휴대폰 화면을 확인한 수연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분명 이 메시지는 예약 메시지일 것이다. 아직 소라는 자고 있을 게 뻔했으니까. 소라는 늘 새벽 서너 시가 되어서야 잠들었다가, 열한 시가 넘어서야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사실 서너 시에 잠드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열한 시에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는 건 확실했다. 방음이 잘 안 되는 오피스텔에서, 옆 방의 휴대폰 진동 소리가 들리는 건 일상이었고, 소라의 방에서는 늘 11시, 11시 30분, 11시 45분, 11시 50분 그리고 12시에 진동 소리가 났다. 그렇게 다섯 번이 울리고 나면 조용했다. 수연은 늘 12시가 되면 소라가 오늘은 과연 일어났을지가 궁금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소라는 수연의 오피스텔 옆집에 사는 이웃 주민이었다. 처음에는 술에 취해서 자기 집도 못 알아보고 수연의 집 도어락을 열려고 애쓰는 소라가 참 한심해 보였는데. 그래도 자취 선배에 수연보다 세 살이나 나이가 많았던 소라는 그 뒤로 곧잘 미안해하며 수연을 챙겼다. 덕분에 수연은 소라에게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급하게 공구가 필요하거나 화장실에 갇히는 등 문제가 생길 때에도 소라의 도움을 받고는 했다. 가끔 소라와 함께 전시나 공연을 보러 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런 곳에는 늘 소라의 친구들이 있었고, 수연은 소라와 친구들이 연극이나 전시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옆에서 흥미롭게 지켜보고는 했다.
‘난 대학 안 나왔어.’
졸업 후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조언을 구하는 수연에게 소라는 이렇게 말했다.
‘성적은 중간 정도였는데, 서울에 있는 대학에 붙을 정도는 아니었고. 난 대학보다는 서울에 오고 싶었거든. 대학에서 어떤 경험을 할 수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서울에서 어떤 경험을 할 수 있는지는 알겠더라. 그게 탐났어. 강의실에서 배우는 내용 말고. 홍대 뒷골목이나, 대학로 소극장 같은 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 그런 걸 배우려니, 대학은 못 가겠더라고.’
‘불안하지 않았어요? 재배정 잘못 받아서 저자산층되면, 엄청 빠듯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거야 대학을 가도 똑같잖아.’
‘음, 그런가? 사실 7년이면 돈이야 다 랜덤으로 돌아가는 게 맞지만, 직장은 계속 유지되잖아요. 저희 부모님은 늘 그랬거든요. 저자산층으로 내려가게 되면, 믿을 건 직장밖에 없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결국 남는 건 안정적이고 좋은 직장뿐이니까. 그거라도 얻으려면 대학을 졸업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어요.’
그때 소라는 한참을 말없이 수연을 쳐다봤었다. 대학을 가지 않았다는 사람 앞에서는 못할 말이었나. 수연이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입을 열 때쯤에야 소라가 대답했다.
‘너처럼 계획적으로 사는 사람들 보면 멋있긴 하더라.’
‘…….’
‘그런데 난 잘 모르겠어. 난 돈은 먹고살 수 있을 정도만 있으면 되니까, 그냥 진짜 하고 싶은 걸 찾고 싶었거든. 내가 보기에, 재시작 시스템은 가난하게 살지도 모르는 7년을 평생 대비하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야. 언제든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라고.’
“재분배 시스템은 가난하게 살지도 모르는 7년을 평생 대비하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
수연은 바닥에 떨어진 논문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소라는 수연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편의점 앞에서 기타를 치며 직접 만들었다는 노래를 불렀고, 어느 날은 이름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지역 예술가들과 전시를 열기로 했다며 수연을 초대하기도 했다. 요즘은 또 뭘 하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매일을 똑같이 논문 속에서 보내는 수연보다는 더 재미있는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아냐, 논문을 읽고 새로운 문제를 탐구하는 것도 나름은 재미있어. 수연은 바지런히 정리한 논문을 책상 한쪽에 올려 두며 생각했다. 문제는 내가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야. 수연은 올려둔 논문을 한 손으로 살짝 들춰보았다. 이 사람들은 뭐가 이렇게 궁금한 게 많아서, 이렇게 많은 자료를 읽고 연구를 했을까. 수연은 쌓아놓은 종이 탑의 높이를 가늠해보다가, 다시 모서리를 맞춰 깨끗하게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종이 탑 가장 위에 있는 논문에는 수연이 그어놓은 줄이 잔뜩이었다.
아테네 민주정의 기본적인 원칙은 교체였다. 누군가를 다스릴 수 있는 권리는 이전에 한때 그 반대되는 위치에 있어 보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재시작 시스템’이 담보하는 무작위의 교체성은 만인의 모든 경제적 계층에 대한 당사자성을 강화하며, 이는 아테네 민주정의 추첨 제도를 연상시킨다.
수연은 밑줄이 그어진 문장을 잠시 읽어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수연이 보기에, 수연은 학문에 재능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는 꽤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대학에 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수연이 잘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었다. 암기였다. 수연은 주어진 대로 생각하는 게 편했다. 외우라는 것을 외우고, 풀라는 문제를 풀고. 그렇게 자신의 미래도 누군가가 다 정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건 바보 같은 바람이었다. 수연은 이제 스물여섯 살이 되었고, 이미 동기 중에는 졸업을 하고 취업에 성공해 돈을 벌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수연은 여전히 대학에 속해 있었다. 이제 졸업까지는 금방이었지만, 수연은 그러고 난 다음이 더 무서웠다. 졸업하고 난 다음에는 뭘 해야 하지?
내년은 재시작의 해라서, 올해 말이면 다음 7년 동안 수연이 어느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살게 될 것인지가 정해질 터였다. 자산 규모가 넉넉하게 배정되면 좋겠지만, 수연은 늘 저자산층에 배정될 때를 걱정했다. 아직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지? 부모님이 넉넉한 자산 규모로 배정을 받게 되면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겠지만, 그것 역시 지금 당장은 확실치가 않았다. 휴학을 하지 말고 빨리 졸업을 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수연은 지금쯤 어디든 취업을 했을 것이다. 그럼 내년에 어느 자산층에 배정이 되더라도, 월급만큼의 안정성은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세상엔 정해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수연은 가끔 재시작 시스템이 도입되기 이전의 세상을 생각했다. 그때는 좀 달랐을까? 적어도 일이 년 후의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지금보다는 더 잘 상상할 수 있지 않았을까? 수연이 보기에 재시작 시스템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환경도, 평등을 만들어주는 무지의 베일도 아니었다. 그냥, 어떻게 살든 결국은 운에 따라 모든 것이 정해지는 불안정한 시스템이었다.
수연은 소라를 생각했다. 소라는 자유로워 보였지만, 그래서 불안했다. 수연은 소라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게 안정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소라는 멋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멋은 운에 의존하고 있었다. 수연은 소라를 동경했지만, 자신이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지속되지 않는 세상 속에 유일하게 지속되는 건 수연의 능력과, 그 능력으로 얻은 일자리뿐이다. 수연은 언제든 자신의 지속성을 지킬 수 있으려면, 일단 능력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려고 최선을 다했다. 운이 자신을 흔들어 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실 이것도 내가 잘해서 얻은 건 아니지만.’
세수를 하러 들어온 화장실에서 수연은 거울을 보며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거울 속으로 머리를 치켜 묶은 수연과, 깔끔하게 정리된 화장실이 보였다. 수연은 대학로에 위치한 오피스텔에서 작년부터 혼자 살고 있었다. 그전에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7년 전, 수연의 가족은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 단지로 배정을 받았다. 원래도 그리 저자산층은 아니었지만, 그 집은 이제까지 수연이 살아본 집 중 가장 좋은 집이었고, 수연의 가족은 한강의 야경을 즐기며 주말마다 와인 파티를 열고는 했다. 하지만 25살이 되면 독립 가구로 취급되는 정책상, 수연은 작년부터 집에서 독립해 나와 따로 배정을 받게 되었다. 새로 배정받은 자산 규모는 평균 이하였지만, 고자산층에 배정되었던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수연은 역세권 오피스텔에서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집도 수연이 노력해서 얻은 것은 아니었다. 수연의 부모님이 운이 좋아서. 슈퍼컴퓨터가 그들을 그렇게 배정했기 때문에 살 수 있게 된 집이다. 그래도 수연은 이 집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내년에 지금보다 낮은 자산대로 배정을 받게 되면, 괜히 손해 보는 기분일 것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기적인건가?’
우우우웅-
그때, 옆집에서 작은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11시가 되었나 보다. 그래, 그만 생각하자. 어쩌면 아침부터 논문을 너무 많이 읽었는지도 모른다. 수연은 수도꼭지를 올리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오늘만 생각하자. 지금 중요한 건 소라와의 약속이니까.
소라
우우우웅-
휴대폰 진동 소리에 소라가 몸을 뒤척였다. 아직 피로가 덜 풀린 상태였다. 소라는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로 오른손만 슬그머니 이불 밖으로 내밀어 침대 옆을 뒤적였다. 어제 잠들기 전 메모를 해둔 노트 아래로 드디어 휴대폰이 손에 잡혔다. 소라는 눈을 최소한으로만 뜨고는 휴대폰 화면에 적혀있는 ‘종료’ 버튼을 클릭했다. 이내 진동이 멎은 휴대폰을 한쪽 손에 쥐고,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우우우웅-
잠깐 눈만 감은 것 같았는데 그사이에 벌써 30분이 흘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실눈으로 본 화면에는 예상과는 달리 11시 50분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중간에 두 번의 알람 소리를 아예 듣지 못한 거였다. 그제야 소라는 비적비적 이불을 걷어차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지도 않을 거면서 11시엔 왜 알람을 맞춰 놓는 거예요?’
‘…? 뭐야 어떻게 알았대.’
‘아침에 진동 소리 맨날 들려요. 한 네 다섯 번 울리는 것 같던데.’
‘…. 그게 들리는 줄 몰랐네. 미안하다.’
‘아, 어차피 전 일어나 있어서. 미안할 건 없어요.’
예전에 수연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나 조금 민망해졌다. 다시 잠들 거면 알람을 끄고 잠들었어야 했는데. 혼자서 3분은 윙윙거렸을 휴대폰을 생각하며 소라는 괜히 눈썹을 몇 번 긁적였다.
소라가 늦게 일어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어제저녁부터 책상에 앉은 소라는 새벽 네 시가 넘어서까지 글을 쓰다가 다섯 시쯤 되어서야 겨우 침대에 누웠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바로 잠들지 못한 소라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로 여섯 시가 지나도록 깨어 있었다. 침대 옆에 놓인 노트에는 그렇게 누운 상태로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단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그중 일부는 심지어 다른 단어에 겹쳐져 쓰여 있기도 했다. 소라는 노트를 집어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열세 번째 소나무, 도깨비, 방울뱀, 솟대, 혼령,
노트에는 맥락을 이해하기 힘든 단어가 잔뜩 나열되어 있었다. 잠들기 전, 소설의 도입부를 어떻게 만들어 볼까 고민하며 써 둔 단어들이다. 분명 뭔가 구상을 하면서 이 단어를 썼을 텐데. 소라는 노트를 째려보며 양치를 하기 시작했다. 잔뜩 찌푸린 미간 사이로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도 같았다.
소라는 작가였다. 엄밀히 말하면 작가로만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라는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고, 나름대로는 인디 앨범까지 발매한 가수기도 했다. 그래도 누군가 굳이 한 단어로 직업을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소라는 자신이 행위 예술가라고 답했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난데없이 시를 읽는 퍼포먼스를 하거나, 뱅크시처럼 미술관 벽에 낙서를 할 수도 있고, 설치 예술 한 가운데서 춤을 추거나, 한쪽 벽면을 글자로 가득 채우고 마치 판소리처럼 그 글을 읽는 전시 퍼포먼스를 할 수도 있었다. 아이디어는 넘쳐났다. 다만 그 아이디어에 꾸준히 돈을 써줄 사람을 찾지 못했다.
아무튼, 최근 소라는 글을 써서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신춘문예니, 언론사 문학상이니, 청소년 문학상이니. 글을 출품하면 그 중 서넛을 뽑아 시상한다는 대회가 워낙 많아서, 소라는 자신이 금방 그런 상을 받게 될 줄 알았고, 상을 받고 나면 금방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물론 몇 번 작은 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작은 문예지에서 인터뷰를 요청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소라의 글이 대중적이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름값 없는 대부분의 작가가 그렇게 사는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수상이나 작은 인터뷰가 제대로 된 수익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7년 전에 배정받은 돈은 조금씩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소라는 휴대폰으로 통장 속 남은 돈을 확인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이달 말에 있을 재시작의 날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7년 전, 나름 넉넉한 자산을 배정받고 이 오피스텔을 구한 후, 남은 자산은 모두 현금으로 바꾸어 통장에 넣어 두었는데. 지난 7년간 이것저것 배운다고 쓴 돈은 많은데 번 돈이 없어 돈이 줄기만 하고 늘지를 않았다. 그나마 이번 7년은 자산 규모가 넉넉해서 다행이었다.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는 오전 6시부터 오후 2시까지 매일 일해야 간신히 월세를 내고 밥을 사 먹을 수 있었다.
‘드디어 돈 걱정 없이 창작에만 집중할 수 있어.’
7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전까지는 매일 여덟 시간을 일하고 나면 기운이 빠져 제대로 글을 쓰거나 노래를 만들 여력이 없었지만, 앞으로 7년 동안은 그런 걱정 없이 꿈을 좇을 수 있게 되었다고. 그러고 나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될 거라고. 하지만 크게 일군 것 없이 7년이 지나고, 또 한 번 재시작의 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저자산층에 배정을 받게 되면 어떡하지. 소라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제는 정말 포기하고 늦게라도 돈 되는 일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과, 저자산층에 배정이 되더라도 7년만 버티면 다시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머릿속에서 부딪혔다.
누군가는 돈 안 되는 예술이라도 해야 하잖아. 돈을 벌어야만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여유가 있을 때는 돈 생각 없이 예술을 좀 해도 괜찮은 거 아니야? 남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니잖아. 소라가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돈 벌 생각 때문에 예술을 안 할 수는 없는 거잖아.
우웅-
‘언니 일어났죠?’
수연의 문자. 아마 3분 넘게 울리는 진동 소리를 들으면서 또 내가 못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
‘당연히 일어났지.’
‘오늘 춥대. 옷 따듯하게 입어.’
옆집에 사는 수연은 야무진 사람이었다. 적어도 술에 취해 옆집 문을 두드리는 소라보다는 훨씬 더. 그래서 올해 여름에 수연에게 했던 말만 떠올리면 늘 귓가가 조금 뜨거워졌다.
‘난 돈은 먹고살 수 있을 정도만 있으면 되니까, 그냥 진짜 하고 싶은 걸 찾고 싶었거든. 내가 보기에, 재시작 시스템은 가난하게 살지도 모르는 7년을 평생 대비하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야. 언제든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라고.’
틀린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애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니. 내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소라는 괜히 민망해져 잘 빗어 둔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수연은 소라와 달리, 체계적인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언제 어느 자산층으로 배정되든, 자신을 믿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소라처럼 운에 기대어 남은 인생을 계획하지 않을 사람. 소라의 눈에 수연은 어리지만 단단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소라는 수연이 걱정됐다. 수연은 늘 최악의 상황을 걱정했고, 그 최악의 상황을 걱정하느라 지금의 행복을 즐기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소라는 괜히 수연을 이곳저곳에 데리고 다니고는 했다. 같이 영화를 보거나,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거나. 소라가 친구들을 소개해주고 같이 대화를 나눌 때, 수연은 늘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소라를 지켜보고는 했다. 소라는 그런 수연을 보는 게 좋았다.
“근데 우리 어디 가요?”
“너 진짜 나만 믿고 나왔구나.”
“아니, 매일 언니가 가고 싶은데 가잖아요. 어차피.”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억지로 데리고 다니는 것 같네.”
“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이게.”
소라와 수연은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천천히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오늘따라 하늘은 금방 비라도 내릴 것처럼 우중충했고, 대학로 골목은 평소보다 훨씬 시끄러웠다. 소라와 수연은 종이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 무리를 두 번 정도 마주한 후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오늘은 ‘평등 집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공터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돗자리를 깔고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만들어진 피켓을 들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앞쪽에 설치된 가무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 국민의 평등한 삶, 정부가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불평등한 배정 말고, 완전 평등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소음과 인파를 피해 슬그머니 오른쪽으로 돌아가던 수연과 소라 옆으로 집회 스태프로 보이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뛰어갔고, 전단지 묶음을 들고 있는 또 다른 스태프 두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따라가던 스태프 중 한 명이 수연과 소라를 발견하고는 들고 있던 전단지 두 장을 내밀었다. 수연은 패딩 주머니에 손을 더 깊숙이 넣으며 오른쪽으로 피했지만, 소라는 순순히 전단지 한 장을 받아들었다.
평등 집회는 매달 주기적으로 열리지만, 특히 재시작의 해를 앞두고는 훨씬 자주 열렸다. ‘재시작의 날’이 가까워질수록 규모도 점점 커졌다. 아마 다들 불안해서 그런 거겠지. 소라는 생각했다. 전단지에 적혀있는 내용은 이번에도 비슷했다. 전 국민의 경제적 지위가 단순히 재배정되는 것은 넘어, 모두가 같은 규모의 자산을 배정받아야 한다는 것이 평등 집회의 핵심 주장이었고, 전단지에는 ‘모두가 같은 자산을 배정받으면 서로 시기할 이유도, 걱정할 필요도 없이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내용과 함께 ‘평등 공동체’의 연락처가 같이 적혀있었다. 소라는 전단지를 대충 눈으로 훑고는 두 번 접어 코트 자락 안으로 집어넣었다.
“늘 평등 집회만 보면, 진짜 재시작의 해가 다가오는구나 싶어요.”
“그러게,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네.”
“…….”
“…….”
계단을 내려가는 사이,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재시작의 날이 지나고 나면, 소라와 수연은 아마 높은 확률로 따로 떨어져 다른 곳에서 다시 7년을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소라는 무의식적으로 코트 주머니 속에 넣어둔 전단지의 한쪽 끝을 매만졌다. 소라과 수연의 등 뒤로, 집회의 외침 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평등한 삶, 보장하라! 보장하라!”
아현
아현의 눈앞에 지민의 모습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현을 보고 있는 지민. 한껏 올라간 오렌지빛 입술 옆으로 수줍게 들어간 보조개. 조금 더 시선을 올리면 살굿빛으로 물든 볼이 보였고, 그 위로는 황금빛 펄이 잔뜩 올라가 있어 빛에 따라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꺼풀이 보였다. 지민이 감았던 눈을 뜨자, 그 자체로 태양인 듯 환하게 반짝이는 연갈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지민이 아현과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 한번 살포시 웃었다. 지민의 입술이 열렸다.
‘당신의 하루에 반짝임을 더하세요. 지민이 함께하는 클리아의 신상 펄 에디션’
이어 화장품 브랜드 클리아에서 새롭게 런칭하는 아이섀도우 시리즈가 아현의 시야를 채웠다. 화면 속 지민은 그중 하나를 집어 눈가에 바르다가, 이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거리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다시 아현과 눈을 마주치는가 싶더니, 곧 지민은 사라지고 클리아의 메인 컬러인 보랏빛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아현은 잠시 생각했다. 물론 화면 속 지민은 아현이 기억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미소와, 웃을 때 오른쪽 눈을 유독 찡긋거리는 습관까지. 살이 조금 붙었나, 아니면 빠진 건가. 아현은 이제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몇 년 전의 지민을 떠올리려 애썼다.
“아현씨.”
“…….”
“아현씨?”
“…아.”
“아현씨, 괜찮아요?”
“아, 네. 잠깐 딴생각이 나서…….”
“그래, 한창 생각이 많아질 때니까.”
“……. 그렇죠.”
“…….”
“그, 저는 이제 무슨 일을 하면 되죠?”
“아, 혹시 이 전단지 좀 같이 들어줄 수 있을까요? 혼자 옮기려 했더니, 생각보다 양이 많네.”
“네. 저한테 반 주세요.”
아현은 전단지 반을 나눠 들고 주연의 뒤를 따랐다. 주연은 주변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배부하며 천천히 이동했다. 가무대 근처에 설치된 천막에 도착한 주연은 플라스틱 의자 위에 남은 전단지를 올려두고는 말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다음 퍼포먼스 준비를 좀 해야 하는데, 혹시 아현씨 지금 빨리 점심 먹고 와서 이따가 전단지 배부 작업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두 시에 교체하기로 했거든.”
“아, 네 알겠습니다. 두 시에 돌아오면 되나요?”
“응응. 아, 가능하면 조금 더 일찍 와주면 좋구요.”
“네, 금방 먹고 올게요.”
아현은 방금 주연이 올려둔 전단지 위로 다시 전단지 뭉치를 올려두고는 빠르게 천막을 나왔다. 평등 공동체에 들어온 지는 이미 삼 년 정도 되었지만, 평등 집회를 도우러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을 동시에 만난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아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배만 채울 요량으로 근처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 컵라면 하나와 삼각김밥 하나를 구매한 아현은 편의점 내부에 설치된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대학로에는 여전히 사람이 너무 많았고, 저 멀리서는 평등 집회의 함성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주연과 집회의 스태프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길거리를 나다니는 사람들의 손에는 저마다 붉은색과 노란색의 피켓과, 같은 색의 전단지가 들려있었다. 이미 바닥에 버려져 검은 신발 자국이 가득 찍힌 종이도 있었다. 내가 만든 건 아니지만. 아현은 안타까운 마음에 버려진 전단지를 한참 바라보았다. 전단지의 가장 위에는 볼드체로 커다랗게 이런 문장이 적혀있었다.
7년마다 자산이 완전히 재배정되는 세상 속에서도, 어째서 불평등은 유지되는가?
점점 더러워져 가는 전단지를 보던 아현은 다시 지민을 떠올렸다. 아현이 지민을 처음 만난 건 열다섯 살 때였다. 비슷한 자산 규모를 배정받은 덕분에 둘은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고, 같은 중학교를 졸업해,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함께 추억을 쌓았다. 미용을 전공하고 싶어 했던 아현은 이후 미용예술대학교에 입학했고, 지민은 근처 4년제 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한 이후에도 둘은 동네 친구로, 심심할 때 같이 편의점에서 맥주를 마시며 농담을 주고받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로 몇 년을 지냈다.
아현과 지민이 멀어지기 시작한 건 4년쯤 전이었다. 아니다. 어쩌면 7년 전 일 수도 있다. 7년 전 재시작의 해. 같은 아파트, 같은 동네에서 살던 지민과 아현은 7년 전에 완전히 다른 자산층으로 배정되었다. 아현의 가족은 조금 더 낮은 자산층으로 이동했지만, 지민의 가족은 고자산층으로 배정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친했던 친구와 멀어지는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아현은 진심으로 지민을 축하해주었다. 그 후에도 둘은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함께 어울렸다. 고급 펜션에서 며칠을 묵으며 레저 스포츠를 즐기기도 하고, 같이 해외여행을 가는 등 고등학생 때부터 꿈꿨던 로망을 이루기도 했다.
뷰티 아카데미를 다니느라 경제적 부담을 느끼는 아현에게 지민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
‘야,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그냥 내가 내줄 테니까 가자.’
‘그래도. 나 맨날 너한테 얻어먹기만 하는 것 같은데’
‘뭐, 이게 내가 일해서 번 돈도 아니고. 그냥 운 좋아서 생긴 돈인데 좀 얻어먹으면 어때. 그냥 가자. 나 너 아니면 같이 갈 사람 한 명도 없단 말이야.’
‘아 이러면 내가 너무 미안한데.’
‘뭐가 미안해. 너도 나중에 나 저자산층 배정되면 이렇게 같이 다닐 거잖아. 아니야?’
‘그야 그렇지만…….’
‘그래! 그럼 그냥 지금은 나한테 좀 얻어먹고 살아. 언니 믿지?’
‘뭔 언니야 또.’
‘우리 아현이 이 언니만 믿고 가는 거다?’
‘으...’
말은 틱틱거렸지만, 아현은 그런 지민이 싫지 않았다. 고마웠다. 정말로 나중에 지민이 저자산층에 배정되고, 아현이 고자산층에 배정되면. 그때는 룸메이트로 같이 살자고 해야지.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매일을 함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지민과 싸운 것은 아니었다. 그냥 어느 순간 지민과의 연락이 뜸해졌다. 처음에는 아현도 자격증을 따느라, 학원 실습비와 실습용 도구를 마련하느라, 여기저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돈을 버느라. 지민도 그러려니, 이제 우리 둘 다 이십 대 중반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바쁘려니 생각했다. 연락의 주기가 점점 뜸해져 지민이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즈음, 아현은 지민을 봤다. 유튜브 영상 속에서.
지민은 뷰티 유튜버가 되어 있었다. 깔끔한 스튜디오와 편집. 파티 메이크업과 분장을 하는 영상도 있었고, 모 명품 브랜드에서 새롭게 런칭한 립스틱의 전 색상을 모두 리뷰해보았다는 영상도 있었다.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 수준은 아니었지만, 지민은 나름대로 채널을 잘 운영하고 있었다. 구독자 수도 꽤 많았다. 뭐야, 아직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더니, 아현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지민을 보며 아현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하긴 몇 년을 같이 어울렸으니까, 지민의 관심사도 나와 비슷해진 건가.
‘뭐야, 너 유튜브 시작한 거 왜 말 안 했어. 오늘 영상 보다가 갑자기 너 나와서 깜짝 놀랐잖아.’
‘아……. 그거 봤어?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자리 잡으면 말하려고 했지.’
‘구독자 꽤 많던데?’
‘…….’
‘야아. 나도 나름 미용 배우는데, 이런 거 시작하면 나한테도 말해 줬어야지.’
‘미안, 미안.’
‘아유, 나도 빨리 자리 잡아야 하는데’
‘…….’
‘…그래 아무튼. 앞으로 자주 구경할게. 나 구독도 눌렀다.’
‘고마워, 아현.’
분명 응원을 해주려고 전화한 거였는데. 아현을 통화를 하는 도중에서야 자신이 느끼던 감정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 나보다 먼저 유튜브를 시작해 이미 나름대로 팬층을 만들어가고 있는 지민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질투.
지민의 침묵과 주저 속에서 아현은 자신에 대한 불편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지민도 연락을 해야할지 망설였을 것이다. 이미 같은 길을 오래 꿈꿔온 친구보다, 자신이 먼저 커리어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가 조금은 불편했을 것이다. 지민의 잘못은 아니었다. 친구의 눈치를 보느라 할 수 있는 일을 안 할 필요는 없으니까.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지민은 아현이 하지 않았던 도전을 했을 뿐이니까. 아현이 하지 않은 것이니, 지민을 질투할 이유는 없다고, 친구를 질투하는 사람은 정말 최악이라고. 아현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질투심인지 억울함인지 정확히 분간할 수 없는 감정이 조금씩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게 점점 연락이 뜸해진 이유였구나.
그 후로 몇 년이 더 지나더니, 이제 지민은 유명한 뷰티 유튜버가 되어, 화장품 브랜드의 간판 모델이 되어 있었다. 아현은 속으로 지민의 광고 문구를 조용히 따라 했다.
당신의 하루에 반짝임을 더하세요. 지민이 함께하는 클리아의 신상 펄 에디션.
당신의 하루에 반짝임을 더하세요. 아현이 함께하는 클리아의 신상펄 에디션.
구차하다. 아현이 한숨을 내쉬고는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1시 47분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소희
B: … ‘무지의 베일’이라고 해서, 내가 어떤 사회적 위치에 가게 될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제도를 만들고, 정의의 원칙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개개인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이 아니라, 모두에게 최소한의 피해가 가는 방식으로 제도를 만들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인데요. 아무래도 개발자분들은 재시작 시스템이 그런 무지의 베일의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만들 것이 아닌가. 하는 정도의 짐작만 할 수 있겠습니다.
A: 그렇군요. 시스템에 대한 설립자의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나요?
B: 네. 현재로서는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A: 아무래도 그렇게 기록이 많지 않다 보니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70년간 ‘개발자’를 소재로 한 영화나 소설 작품도 꾸준히 만들어져 왔지요. 그런데 대표님은 재시작 시스템의 관리자 역할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관리자분들은 그럼 재시작 시스템에 관여하실 수 있는 건가요?
B: 아, 관여는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이제 또 국민 여러분께서는 저희가 혹시 정치적 압력을 받거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서 시스템을 조작할 수도 있지 않으냐 이렇게 의문을 품으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몰래 시스템을 조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시스템 작동 방식이 이미 다 공개되어 있고, 조금이라도 수정이 되면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저희가 시스템을 마련해 두었거든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보완할 점이 생기기도 하고, 그럴 때는 일부 시스템을 수정하기도 하지만 그 내용이나 이런 것들이 모두 공개가 되어 있기 때문에 몰래 조작은 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A: 알겠습니다. 재시작 관리청은 7년 동안의 국민의 삶을 결정하는 부서처럼 여겨지다 보니, 국민 여러분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결과를 조작할 수는 없다는 거죠.
B: 예, 맞습니다.
A: 그렇다면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재시작의 해를 앞두면 늘 나오는 목소리죠. 재산의 ‘재분배’가 아니라 ‘초기화’를 주장하는 시민단체의 활동이 올해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불평등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요, 이런 식으로 시스템을 수정하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요?
B: 일단, 가능은 합니다. 물론 자산 종류도 다양하고, 좀 더 복잡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완전히 초기화를 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재배정을 하기에 앞서 경제적 격차를 일부 해소한 후에 배정을 하는 식으로 수정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사회적 합의도 만들어지지 않았고, 아무래도 중요한 문제이다 보니 저희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가 없는 부분인 거죠. 후에 법안이 나오고, 국민 투표를 한다거나. 이런 제도적 절차를 통해 수정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그때는 관리청에서 수정을 할 수 있겠죠.
A: 네 알겠습니다. 제도적인 절차를 거쳐야만 도입이 가능하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자 그럼, 지금까지 재시작 시스템의 역사와 관리청에서 하는 일을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나와 주신 함지연 대표님, 감사드립니다
B: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A: 네. 그럼 다음 소식인데요 …….
앵커가 뭐라고 새로운 이야기를 꺼낼 것 같더니 영상이 끝났다. 지난밤에 방송된 뉴스 클립 중, 평등 공동체에 관련된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방금 영상 속에 등장했던 함지연 관리청장은 소희의 상사였다. 직속 상사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위로 올라가다 보면 만날 사람이었다. 소희는 재시작 관리청에서 일했으니까. 이럴 거면 컴퓨터 공학과를 갈 걸 그랬어. 소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면, 소희는 재시작 관리청에서 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관리청은 ‘평등 공동체’에 소속된 컴퓨터 공학자는 뽑지 않는다. 시스템에 간섭해 마음대로 ‘초기화’ 설정을 해버릴지도 모른다나 뭐라나.
소희는 자신이 관리청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소희가 ‘평등 공동체’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른 직원들은 하나같이 소희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였다. 소희는 단순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말단 직원이었을 뿐인데도. 그런 눈빛은 소희가 평등 공동체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밝히고 나서야 조금씩 사라졌고, 그 자리엔 대신 동정의 눈빛이 들어섰다.
삼 년 전, 스물한 살이었던 소희는 양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 교통사고였다. 친척분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렀고,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도 다 정리했다. 친척 어른들은 모두 소희를 걱정했고, 소희가 사회에 나갈 준비가 될 때까지 함께 살자는 말도 해주었지만, 소희는 친척들과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다들 넉넉한 자산층도 아니었고, 소희는 자신의 불행이 남들에게 옮겨가는 것이 싫었다. 무엇보다도, 소희는 혼자 있고 싶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그럭저럭 살 수는 있었다. 딱히 행복하지 않았을 뿐, 딱히 불행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재시작의 해가 다가올수록 소희는 불안해졌다. 재시작의 해가 되면 스물다섯 살이 되는데, 그때까지 과연 안정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을까? 직접 벌어서 먹고살만큼의 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 친척분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넉넉한 자산층에 배정받게 될 가능성도 높지는 않았다. 그래서 소희는 차라리 평등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여기에서라면, 아주 잘 살 수는 없어도, 평균적인 삶을 보장받을 수 있으니까.
평등 공동체는 완전 평등을 추구하는 공동체였다. 재시작의 해가 되면,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은 새롭게 배정받은 자산 규모를 공동체 내부에 공개했다. 집행부는 이를 더하고 나눠 공동체 내부의 자산 평균값을 내고, 모두가 평균값에 해당하는 자산을 가질 수 있도록 전체 자산을 공동체 내부에서 한 번 더 분배했다. 소희처럼 중간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이 경우, 평균값 이상의 자산을 가진 이들은 자산 규모가 평균이 될 만큼 공동체에 자산을 양도했고, 평균값의 80% 이하의 자산을 가진 이들은 80% 가 될 때까지 공동체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이렇게 보면 공동체의 자산 규모는 늘 작아지기만 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평등 공동체는 외부에서 기부를 많이 받는 편이었다. 평등 공동체의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평균값이 될 때까지 돈을 내고 싶지는 않은 고자산층은 종종 많은 양의 돈을 기부했다. 자신의 돈이 평균까지 줄어드는 것은 원치 않기 때문에, 단지 자신이 내고 싶은 만큼만 돈을 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공동체에 속하지는 않으면서 돈만 기부하고는 했다. 평균값 이상의 자산을 가지고 있지만, 다음 재시작의 해를 미리 걱정하는 사람들도 공동체에 가입했다. 소희는 마지막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소희는 거실을 거실 바닥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심심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평등 집회라도 돕겠다고 하는 거였는데. 이왕 전단지도 만든 김에, 그냥 집회도 나간다고 할걸. 소희는 일어나 평등 집회 단체 채팅방에 무슨 메시지라도 오지 않았나를 살폈다.
‘지금 1번 출구에서 전단지 배부하고 있는 사람?’
‘1번 출구에 아현 있어요.’
‘네, 전데요. 무슨 일인가요?’
‘아현, 2번 출구에 지금 전단지 없어서’
‘혹시 좀 나눠줄 수 있어요?’
‘주연 어디 있는지 보신 분?’
‘네. 제가 그리로 갈게요.’
‘혹시 피켓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
‘주연 가무대 쪽에 있을걸요’
‘없는데’
‘피켓 천막에 있어요.’
‘아현? 오고 계세요?’
누가 누구한테 말하는지도 모를 메시지들이 잠깐 사이에도 몇십 개씩 올라왔다. 그래, 아무리 심심해도 이 날씨에 저기 가서 일하는 건 아니야. 소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전단지를 만들고 인쇄하는 것까지 소희가 했으니까, 이미 할 만큼 한 거였다. 소희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강렬한 붉은 색의 전단지를 보면서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7년마다 자산이 완전히 재배정되는 세상 속에서도, 어째서 불평등은 유지되는가?
재시작 시스템은 누구나, 언제든 가난해질 수 있다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시스템의 도입 이후, 저자산층에 대한 공적인 복지 혹은 기부와 같은 사적인 도움이 활성화되었고, 이는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한민국의 자산 구조는 피라미드형으로,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고자산층에 배정받아 사치스러운 삶을 즐긴다. 재시작의 날이 지나면, 어젯밤보다 부자가 될 확률보다 가난해질 확률이 훨씬 높은 것이다. 이를 슈퍼컴퓨터가 랜덤으로 배정한 결과이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을 기계에 맡기자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어째서 우리는 완전히 평등할 수 없는가? 저자산층은 언제까지 소수의, 운으로 정해진 고자산층의 개인적인 선행에 기대어 삶의 질 향상을 기대해야 하는가? 고자산층의 선호가 불평등의 해소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정당한가? 7년마다 자산이 완전히 재배정되는 세상 속에서도, 어째서 불평등은 유지되는가?
재시작 시스템 도입 70년,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정부는 단순히 자산을 재배정하는 것을 넘어, 불평등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재시작 시스템 자체를 보완해야 한다. 재시작 시스템이 진정한 ‘재시작’의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재배정’이 아닌, ‘초기화’를 시스템의 기본 원리로 가져가야 한다. 평등 집회와 평등 공동체는 정부의 신속한 의견 수렴을 요구한다.
서로 시기할 이유도, 불안전한 미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이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 날을 위하여. 평등 공동체 후원계좌 000000-00-000000 / 연락처 000-0000-0000
자신의 작품을 뿌듯하게 살펴보던 소희는 전단지를 대충 아무렇게나 올려 두고는 침대에 누웠다. 그 사이에도 소희의 휴대폰 화면은 깜박거리며 단체 채팅방의 미리보기를 보여줬다 지웠다 했다.
‘대단한 사람들이야.’
공동체 사람들을 보면 가끔 진심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기꺼이 시간과 돈과 체력을 쓰고,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 멋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소희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소희 자신의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너무 어색한 그림이었다.
평등 집회에 나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소희는 평등 집회의 요구에 동의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요구는 실현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다. 모두가 같은 양의 자산을 배정받는 세상을 만들자고 하면, 과연 사람들이 좋아할까? 사람들이 정말 평등을 원할까? 어쩌면 사람들은 불평등을 원하는게 아닐까? 전단지를 만드는 중에도 늘 소희의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의문이었다.
소희가 보기에, 사람들은 평등한 삶을 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남보다 잘살기를 바랐다. 아무리 저자산층으로 배정될 위험 부담이 있더라도, 남보다 잘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위해서 그 정도 리스크는 기꺼이 감수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지의 베일?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어. 결국 사람들은 ‘내가 남보다 잘살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베팅하는데. 가끔은 헷갈리기도 했다. 가장 못사는 사람의 삶이 비참하지만 않다면, 불평등을 유지하는 것 자체에는 무슨 문제가 있지?
소희는 전단지 마지막 줄에 직접 썼던 문구를 생각했다. 서로 시기할 이유도, 불안전한 미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이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 날을 위하여.
평생을 행복하게. 행복이라는 단어는 너무 어려웠다. ‘행복’은 ‘평등’보다도 더 어려운 단어고,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었다. 소희는 평등 공동체에 살고 있었고, 그래서 불행하지는 않다고 느꼈지만 그렇다고 딱히 행복하지도 않았다. 몇 년 전부터 늘 그랬다. 소희는 천장을 보면서 천천히 두 단어를 발음해 보았다. 행복. 평등. 행복. 평등. 행복. 평등. 행복. 평등…….
중얼거리는 소리가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소희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그 사이에도 소희의 휴대폰 화면은 계속해서 깜박거렸다.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월 1일, 새해를 맞는 첫 번째 8시 뉴스를 시작합니다. 드디어 재시작의 해가 찾아왔습니다. 올해도 역시, 국민 여러분의 이목을 끄는 여러 가지 사건 사고가 발생했는데요. 인천에서는 고재산층에서 저재산층으로 배정된 권 모 씨의 가족이, 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자신이 원래 살던 집에 들어가려고 난동을 부린 사례가 있었습니다만, 이는 신고를 받은 경찰에 의해 약 2시간 만에 진압되었습니다. 한편 대구에서는 고재산층이던 70세 노인 한 분이, ‘나는 더 이상 소원이 없다. 다시 가난해지기 이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행방불명되어 가족과 시민 사회의 걱정을 사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잠시 후 더 자세히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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