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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_2021/6호_환경, 초여름의 환기

6호_항상성을 끊어내는 용기 / 바투

by 밍기적_ 2021. 7. 1.

항상성을 끊어내는 용기


에디터 / 바투



사회의 여러 문제 중 특히 노동, 인권, 페미니즘에 가장 많은 관심이 간다. 기후 위기가 당장 우리에게 닥친 위협임을 머리로는 알지만 사실 나의 일상 속에서 피부로 느껴진다거나 실천으로 옮기지는 않고 있다. 부끄럽지만 이러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기 위해 작년부터 동료 선생님들과 환경에 관한 다양한 활동을 함께 하는 모임을 진행 중이다.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내 스스로가 너무 비참할 것 같아 일말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발버둥이다. 그 모임에서 소개받은 2021 서울환경영화제에 다녀온 후기를 짤막하게 쓰려고 한다.

우리가 본 영화는 <붉은 땅(Red Soil), 2020> 이다. 여기서 붉은 땅은 공장에서 배출된 오염물질을 비용 절감을 위해 땅에 그냥 흘려보낸 결과로 붉게 물들어버린 땅을 말한다. 사실 붉게 물든 것은 비단 땅 뿐만이 아니라 오염 물질이 제대로 걸러지지 않은 생산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건강까지도 적색 신호를 보였을 것이다.

딸은 아버지가 30년을 넘게 몸바쳐 일한 공장의 간호사로 새로 취직하게 된다. 딸은 공장 사람들의 건강 상태가 예사롭지 않은 것과 함께 아무도 노동자들의 건강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원인이 공장에서 방출하는 오염물질이라는 사실을 금새 알게 된다. 그렇지만 공장은 이미 이 지역 사람들의 유일한 생계 유지의 수단이자, 아버지가 그렇게나 지키고 싶어 하는, 이미 아버지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런 공간이다. 이 공장에서 일한 덕에 너와 네 언니까지 먹여살리고 키웠는데, 그깟 오염물질 하나로 공장을 문닫게 둘 수는 없다는 아버지의 강경한 모습에 금새 딸과 아버지의 거리는 한없이 멀어진다. 딸은 이 사태에 관심을 보이는 기자와 환경단체의 도움을 받아 진실을 파헤치기 일보 직전까지 갔지만, 증거를 채취하는 과정에서 크게 다치게 된다. 이러한 딸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결국 아버지의 마음이 돌아서고, 이 공장의 환경 오염 사태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공장을 문을 닫게 된다. 오랜 시간 몸 담았던 공장과 동료들은 순식간에 해체되고, 아버지는 근처 마트에 일용직으로 취직하여 생계를 이어나간다.

외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환경을 파괴하는 오염물질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을 당연히 두고만 볼 수 없다. 분명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고, 특히 독성 물질의 위험성조차 인지하지 못한채 매일 오염물질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의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제동이 걸려야 하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러한 문제를 바로잡는 것이 나의 일상을 파괴한다면? 문제를 밝힘으로써 일어날 결과들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면? 나의 생계와 연관되어 있다면? 타자가 아닌 당사자의 입장에서 ‘당위성’만 물고 늘어질 수는 없다. 이것이 나의 문제라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나는 과감히 나의 당연한 일상을 포기하고 환경오염을 멈출 수 있게 용기를 낼 것인가.

환경 의제가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아직 우리의 일상에 그렇게 크게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없다. 자리 잡지 않았을 뿐더러, 당장의 먹고 사는 문제가 급급한 사람에게 불편을 요구하는 환경 문제를 강요할 수 있는가. 경제 문제와 맞닿아있는 환경 문제는 해결이 어렵다. 저 멀리 떨어져있는 남극의 빙하가 녹는 것보다 내일 내가 밥 한 끼를 사먹는 돈이 있는가가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일 테니까.

그러한 의견의 연장선에서 ‘환경세’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보자. 조금 불편해지긴 하지만 줄일 수 있는 플라스틱 사용을 막기 위해 플라스틱 제품에 세금을 매기자는 주장은, 기후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불평등을 해소에는 역행하는 방안일 것이다. 플라스틱이 비싸진다? 텀블러를 들고 다녀야 한다? 그러한 불편함을 감수할 것이냐, 그 불편함을 돈으로 구매할 것이냐의 선택의 문제로 전환된다. 당연히 당장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타의에 의해 환경을 보호하는 방향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여유가 있는 중산층은? 불편함을 대체할 만한 대가를 치르면 그만이다. 결국 경제적 약자들은 환경 보호의 몫을 떠안고 상층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환경 파괴와 함께 편안함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난 환경세에 반대한다.

그렇다면 늘 우리는 당장 우리의 삶에 급급한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러한 선택에 전혀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해답은 이러한 양자 택일의 선택에 놓인 상황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사회 안전망.
대의를 위한 내부 고발이든, 양심 선언이든 더 나은 방향을 위해 용기를 낸 사람들을 보호하는 장치만 잘 되어 있더라도 우리가 이렇게 끈질기게 고민을 해야 하는 필요는 없다. 앞선 영화 속에서 아버지도 머리로는 환경 파괴를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곧 자신과 동료들의 생계를 끊는다는 것을 알기에 쉽게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큰 목적을 위해 잘못을 지적하고 인정할 줄 아는 자세를 크게 사서 그에 응당하는 보상과 안전망을 제공한다면, 어쩌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남몰래 자행되고 있었던 악행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을까.

항상성을 끊어내는 용기. 당연한 것을 끊어낼 줄 아는 힘. 순간의 귀찮음을 이겨낼 수 있는 확신과 신념.
완벽해질 수 없는 나의 삶에서 그나마 부끄러움을 덜어내 주는 것들. 그 무엇보다 현재의 우리 사회에 담보되어야 할 것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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