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기 – 벗어나기
에디터 / 연푸른
나는 스무 살 때부터 서울에서 자취를 했다. 좁은 방은 쉽게 지저분해졌고, 나는 늘 방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할만큼 성실하지는 못했다. 지저분한 방을 보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방에서 나가는 거였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집 밖을 돌아다녔다. 카페로, 도서관으로, 학교 과방으로. 심지어 수업이 없는 주말 아침 8시부터 과방에 기어들어가 그곳에서 잠을 청한 적도 있다. 과방도 내 방 못지않게 지저분한 곳이지만, 적어도 그걸 내가 치워야 한다는 부담은 없다. 또 과방에 죽치고 있으면 누군가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과방에 들어가기 민망한 고학번이 되어서는 주말마다 동아리방으로 출근했고, 혹은 교내 휴게실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내 방은 편하지만 그래서 외로운 곳이었다.
코로나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어쩔 수 없이 방 안에 머무는 시간도 길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에 방 안에 머물게 된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제 집 밖에 나가도 누군가를 우연히 만날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점이 날 방 안에 있게 했다. 내 방은 잠을 자는 공간일 뿐 아니라 먹고, 운동하고, 공부하는 공간이 되었다. 아니 그런데 공부는 말이지, 솔직히 카페나 도서관을 가서 해도 잘 안되는 일 아닌가? 그런데 이제는 그걸 집에서 해야 한다니……. 나의 사랑스러운 침대를 옆에 두고 공부를 하려니 집중이 안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매일 똑같은 벽, 똑같은 책상 앞에 있는게 지루했던 나는 내 방을 더 재미있고, 나다운 공간으로 만들어보려고 노력했다. 어떻게 보면 거의 발악이었다. 내 방은 변하기 어렵지만, 내 상상을 동원해서라도 내 방을 바꿔보려는 발악. 무슨 뜻이냐고? 일단 말해 둬야 한다. 나는 망상을 좋아하는 INFP라는 것을.
망상 속의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치히로와 함께 목욕탕을 구경하고, 엘리니아 숲을 돌아다니며, 가끔은 한 나라를 책임지는 군주가 되기도 한다. 공부도 그렇게 하면 더 재미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해야 덜 노잼이다.
첫 시작은 평범한 study with me였다. 공시생 중에는 하루 11시간씩 공부하는 모습을 스트리밍하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들의 시간표에 맞추어 같이 공부하고 쉬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study with me의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한 영상에 정착했다. 어느 고급져보이는 미국 도서관에서, 백금발로 탈색한 치의대생 언니가 공부를 하고 있는 영상이었다.
그 영상을 틀어 두고 공부를 하면 마치 나도 어느 외국 대학도서관에 있는 것 같았다. 수업을 위해 영어로 된 논문을 읽을 때는 그런 뇌내망상이 꼭 필요했다. 나는 지금 미국에 있다, 미국 하이틴 영화 속 주인공들과 함께 시험 공부를 하고 있다……. 내 옆에는 블레어 윌도프가 공부를 하고 있고, 물론 블레어가 공부하는 장면이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아무튼 성적은 좋다는 설정이니까…….
한동안 그 영상을 보며 공부를 하다보니, 알고리즘을 타고 이것저것 다른 영상이 추천되기 시작했다. 다음에 꽂힌 영상은 해리포터 asmr이었다. 헤르미온느와 같이 공부하기, 드레이코 말포이와 공부하기, 해그리드의 오두막에서 공부하기. 해그리드의 오두막이 공부하기에 썩 좋은 환경이 아닐 거라는 점만 잊을 수 있다면, 그런 영상은 내가 OWL을 위해 공부하고 있다고 망상을 하기엔 충분했다. 나는 부엉이가 울면 공부를 시작했고, 50분 후에 부엉이가 다시 울면 쉬었다. 그렇게 시험 기간을 보냈다.
컨셉질은 날이 갈수록 발전해서, 어느 날부터는 소리로는 만족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시각, 후각, 촉각. 아무튼 뭔가가 더 필요했다. 그래서 패브릭 포스터를 샀다. 처음에는 외국 대학 도서관 같은 그림을 사려다가, 비 내리는 날 숲 속 오두막에서 한 번 공부를 해본 후에는 숲 속에서 하는 공부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열대 우림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패브릭 포스터를 책상 앞에 붙여 두었다.
다음은 디퓨저였다. 당연히 숲이고 비가 오면 축축한 이끼 냄새와 나무 향, 미세한 꽃 향기가 나야 하니까. 은은한 시더우드 향이 숲 속을 거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디퓨저와 생화가 가득한 꽃집에 온 느낌이라는 룸스프레이를 샀다. 놀랍게도 디퓨저는 정말로 시원한 숲 향기가 났고, 지금은 같은 향의 룸스프레이를 하나 더 구매한 상태다. 혼자 공부를 할 때는 늘 앞에 있는 패브릭 포스터에 룸스프레이를 뿌렸다.
그런 날은 조명도 바꿨다. 천장에 있는 하얀색 형광등은 컨셉에 취하기엔 지나치게 밝았다. 분홍색 이불이 깔린 침대나, 제대로 꽂히지 못한 책들이 가로로 꾸깃꾸깃 들어차 있는 책꽂이, 어수선하게 놓여있는 약통과 화장품 통을 형광등은 지나치지 않았다. 형광등만 키면 현실이 너무 잘 보였기 때문에, 그 불 대신 나는 오렌지색 스탠드 조명을 키고 공부했다. 여기까지 오는 날은 정말 공부가 힘든 날이다. 도무지 이렇게 하지 않고는 레포트를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날.
적다 보니 내 자신이 조금 안쓰러워졌다. 그냥 카페를 가 이 사람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편하게 갈 수 있는 프랜차이즈 대형 카페에는 늘 사람이 너무 많았고, 프리미엄 카페를 매일 가기에는 돈이 많지 않았다. 내 방을 어떻게든 머물기에 재미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했다. 근데 이제, 가성비 있게.
그 결과 지금 우리 집엔 두 개의 패브릭 포스터가 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열대우림이지만, 지금 책상 앞에 붙어있는 포스터는 노을지는 하늘이 그려진 포스터다. 새벽에 밤새워 공부를 하면서도 하늘을 보기 위함이랄까? 룸스프레이는 6개, 디퓨저는 2개가 되었다. 매일 컨셉에 따라 다르게 뿌리지만, 계열은 대체로 자연 향기로 비슷하다. 나는 보통 꽃 향기와 허브향, 과일 향을 조합해 뿌린다. 디퓨저도 늘 침대 머리맡에 놓아 두는데, 향이 잘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가끔 누워있다가 예상치 못하게 훅- 향이 불어오는 날에는 기분이 좋아진다. 블루투스 스피커는 지금도 내 등 뒤에서 ASMR을 들려주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는 메이플스토리 에레브 테마의 asmr을 들었다. 형광등은 끄지 않았다. 오늘은 그 정도는 아니다.
이 짓을 일 년 넘게 하고 나니, 이제는 실제로 집이 공부하기에 편한 공간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침대는 외면하기 힘들고, 급한 과제가 있을 때는 학교 도서관이나 과방을 찾게 되지만. 그래도 이제 마음만 먹으면 집에서 뚝딱뚝딱 밤샘 정도는 거뜬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글도 새벽 4시에 쓰고 있다. 이제는 카페에 가려다가도 ‘아, 거기선 ASMR들으려면 헤드셋 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든다. 이게 맞나 싶지만, 아무튼 내 방을 즐기는 방법을 찾아낸 거니까 좋은 일이라 생각하고 싶다. 아니, 내 방을 즐기는 법이 맞나? 계속 방 밖만 상상하고 있는걸.
내 방에서 뭔가를 더 바꿀 수 있다면, 난 이불을 바꾸고 싶다. 솔직히 분홍색 침대 커버에 꽃 무늬 이불은 에바다. 질 좋고 부드럽지만, 컨셉에는 안 어울린다. 나는 짙은 초록색 침구가 가지고 싶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는 시원한 나무 향기과, 풀 냄새, 들꽃 향이 섞인 드레스 퍼퓸을 뿌리는 거다. 그럼 잠자는 내내 여름의 스위스를 여행하는 기분이겠지? 결국 나는 방 안에서도 방 밖을 꿈꿀 수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머물기에 안락하면서도, 언제든 나갈 수 있어야 하는 곳. 안으로 파고 들어와 있지만, 결국은 밖을 향해 열리는 곳. 머물기와 벗어나기가 함께하는 곳.
아래 내가 좋아하는 ASMR의 유튜브 주소를 몇 개 남기고, 나는 이만 여행하러 간다. 오늘은 메이플스토리 리스항구 테마곡을 들으면서 잠들거다. 꿈에서는 빅토리아 대륙을 여행해야지.
[Dr. Sarang Choi] 뉴욕공립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해요 https://youtu.be/VKKIdQu_WeU
[낮잠 NZ Ambience] 말포이의 공부 https://youtu.be/PfqRyzUuHnM
[낮잠 NZ Ambience] 헤르미온느의 공부. 해그리드의 오두막 https://youtu.be/Nt0aof0MyOg
[asmr soupe]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입체 음향 https://youtu.be/xlOgAqz4N_Q
[asmr soupe] 메이플스토리 리스항구에서 https://youtu.be/KcmH7nWLgNk
[귀닥토닥] 비오는 숲 속 오두막 https://youtu.be/9aidoxAjt_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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