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조건
편집장 / 연푸른
11월은 위드 코로나가 시작된 달이다. 작년 말 ‘5인 이상 사적 모임 금지’가 시작된 이후 10개월이 흘렀고, 올해 7월 수도권 4단계 거리 두기가 시작된 이후로부터는 3개월이 흐른 후에서야 부분적인 일상회복이 달성된 것이다. 이제는 다섯 명의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도 있고, 새벽까지 헤어지지 않고 웃고 떠들 수 있게 되었다. 자정이 넘은 길거리에는 여전히 술 마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득하고 내년에 대학에 들어올 새내기들은 엠티나 새터(새내기 배움터)도 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점점, 코로나 이전의 세상이 돌아오는 것 같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사이에도 코로나 확진자 수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위드 코로나, 한 달도 못 가고 중단되나’ 같은 헤드라인 역시 연일 보도되고 있지만, 이미 오랜 시간 참아온 사람들의 마음속에 충분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의 즐거운 시간 속에서,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질문도 부활했다. ‘코로나 끝나면 뭐부터 하고 싶어?’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코로나로 인해 국민들이 포기한 여가활동 1, 2순위는 해외 관광과 국내 관광, 즉 모두 ‘여행’이었다. 내 주변에도 코로나로 여행을 포기한 사람이 많다. 동기 중 한 명은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가려던 계획을 취소했고, 다른 친구 한 명은 유럽 여행을 위해 모아둔 돈으로 대신 주식을 샀다. 또 또 이런 사례를 찾을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다. 2020년 초, 설렘을 안고 리투아니아로 교환학생을 떠난 나는, 곧 유럽의 국경이 하나하나 봉쇄되는 것을 보며 교환 생활 한 달 만에 부랴부랴 한국으로 돌아왔으니까.
그리고 나서는 국외는 물론 국내 여행도 달리 가본 적이 없다. 원래 방학마다 여행을 떠나는 그런 여행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쯤 되니 몸이 근질거리고 약간은 억울한 심정도 든다. 원래라면 이번 방학에는 동남아 여행을 한 번이라도 갔을 텐데… 나는 지금 학교에서 인도네시아어 수업을 듣고 있는데, 내가 인도네시아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어제저녁처럼 자체 휴강을 하고 수업을 빠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뭐 대충 그런 말이다. 컴퓨터 화면으로라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서 검색창엔 대만 배경화면, 스페인 배경화면 따위를 검색하고 있고, 최근까지는 일본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보다가 어제 본 영화는 또 덴마크가 배경이었다. 구글 지도에서 리투아니아를 검색해서 교환학생으로 머물렀던 그 도시의 길목을 거리뷰로 돌아보다가, 조금 촉촉해진 마음으로 휴대폰 갤러리로 돌아와 지난 제주도 여행의 흔적을 훑는다. 그리고 속으로 세 번 외친다. 젠장! 여행 가고 싶다! 여행 좀 보내줘!!!
자, 여기서 잠깐. ‘여행 좀 보내줘!!’에서 말하는 ‘여행’은 뭘까? 여행의 사전적 정의는 ‘일이나 유람, 휴식 등을 위해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타 국가,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일’이라고 한다. 우리는 저 짧은 문장에서 세 가지 조건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일, 유람, 휴식 뭐가 되든 목적이 있을 것. 둘째, 일상을 벗어날 것. 셋째, 다른 지역으로 떠날 것. 첫 번째 조건에 대해 약간의 의문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아 덧붙이자면, 여기서 말하는 목적이 굉장히 대단하고 잘 정의된 것일 필요는 없다. 다만, 만약 내가 오늘 집에 가는 길에 난데없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우주선에서 막노동을 해야 할 처지가 된다면, 그건 내 공간이 아닌 장소에서 일어나는 비일상적인 일이지만 결코 여행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어쨌든 여행이라면, 여행을 떠나는 당사자의 의도가 조금은 포함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자 이렇게 세 조건을 내걸고 나니 뭔가 체계가 있어 보이는 것 같은데,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 체계가 절대 명확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여행을 정의하는 단어의 경계 자체가 모두 모호하기 때문이다. 서울 유학생인 내가 주말동안 본가에 내려갔다 오는 건 여행인가? 경기도에 있는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 놀고 오는 건? 비즈니스석에 앉아 도착 후 있을 외국 계열사와의 미팅은 준비하는 어느 회사원에게 그 비행은 여행일까? 외국에 있는 영화제에 참가하기 위해 출국하는 배우에게는? 일과 휴식의 경계는 무엇이고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는 또 어디에 있을까? 타지역은 어떤 선을 넘어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일까? 여행에서 돌아온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복귀하고, 남는 건 정말 사진뿐일까?
여행은 절대적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사람마다 휴식이 의미하는 바가 다르고, 일상이 다르며, 활동 반경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움직임은 누군가에게는 여행이 될 수도 또 누군가에게는 여행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움직임이 여행이라 이름 붙여진다고 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새롭고 설레는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안온한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낯선 경험을 하는 불편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여행을 정의하는 기준도, 여행을 즐기거나 즐기지 않는 이유도, 완벽한 여행을 즐기는 방법도, 같은 여행지에서 얻어온 혹은 잃고 온 것들도, 돌아온 자리에서 경험하게 될 것들도. 여행의 경험과 여행을 보는 관점은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그리고 이건 밍기적의 네 에디터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밍기적의 11호 여행은, 네 에디터가 생각하고 경험한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바투는 주말마다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여행을 떠나는, 극강 EJ인간이다. 그는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에서 처음으로 계획 없이 다녀온 여행이 어땠는지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여행은 때로 내가 한정 짓고 있는 나의 가능성을 확장해주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한편 여행을 그리 즐기지 않는 에디터 망은, 이번 호에 <여행은 일상의 파괴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는 여행이라는 비일상적인 환경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어려웠다고 고백하며, 자신에게 맞는 여행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연푸른의 단편 소설 <스쳐 가는 곳>도 여행과 일상이라는 두 삶에 대한 글이다. 그는 여행지에서 서로를 처음 만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비일상적 공간에서 생긴 일은 우리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온기는 그의 글 <혼자 여행하는 사람입니다만>에서 어린 나이부터 혼자 여행을 다니며 느꼈던 ‘혼여(혼자 여행)’의 묘미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의 글을 통해 여행, 나아가 여행하는 삶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다.
12월, 2021년의 마지막 달과 함께 밍기적의 1주년도 다가오고 있다. 그간 11개의 주제로 글을 써오며 이어간, 짧다면 짧다고도 길다면 길다고도 할 수 있는 여정이 곧 한주기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여정’은 때로 ‘여행’의 동의어로 쓰이며, 그 풀이 역시 ‘여행의 과정이나 일정’이다. 하지만 여정이라는 단어는 ‘여행’이라는 단어보다 조금 더 일상적이고 장기적인 무언가를 뜻하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매 순간순간은 새로우며, 그렇기에 삶이란 늘 여행의 연속이라는 뜻일지도.
이 글을 읽는 당신들의 하루하루도 궁금하다. 당신의 하루는 여행인지. 혹은 곧 겨울이 찾아오니, 정말 여행의 조건에 딱 맞는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좋겠다. 그럼, 모두 2021년의 마지막 여정을 잘 마무리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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