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가는 곳 1
에디터 / 연푸른
*스쳐가는 곳은 1,2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2부는 내일 (12월 5일 일요일) 8시에 업로드됩니다.
아직 거품이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맥주잔 세 개가 공중에서 부딪혔다. 갑작스러운 방해에 신경질적으로 몸을 들썩인 하얀 거품은 투명한 유리잔 안쪽에 파도 자국을 남기고는 이내 제자리를 찾아 낮아졌다. 미련 없이 멀어지던 맥주잔이 버벅거리더니, 갑작스레 되돌아와 부딪히고 떨어지고를 반복했다. 되풀이되는 맥주잔 옆으로 타자를 친 듯 글자 몇 개가 - “@KK.Min98 @IAM100 백만 년 만에 동기들이랑” – 떠오르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사진은 왼쪽으로 넘어가 휴대폰 모서리로 모습을 숨겼다.
A는 아슬아슬하게 모서리에 걸쳐진 스토리를 엄지손가락으로 잡아 붙들었다.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쓸자, 손가락 끝에 매달려 다시 화면으로 끌려 나온 맥주잔들이 방금의 그 버벅거리는 움직임을 반복했다. 빛을 받아 태양처럼 빛나는 생맥주가 두 잔. 나머지 한 잔은 흑맥주였다.
‘맥주 맛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친구들이랑은 맨날 소주만 마셔서…….’
‘그래도 흑맥주는 구분이 되잖아요. 이름도 있어 보이고 시나몬도 뿌려주고. 그렇지 않아요?’
이 흑맥주의 주인도 B이려나. A는 제작년 이맘때를 떠올리며 엄지손가락을 화면에서 슬쩍 뗐다. 사라진 상태였던 메시지 보내기 창과 B의 프로필 사진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 마스크 없는 맨얼굴에 목에는 여행 사진을 찍기 위해 샀다는 카메라를 매고, 한쪽 입꼬리만 슬쩍 올린 어색한 표정의 사진이었다. 얘는 활짝 웃는 표정이 예쁘다고 말해도 늘 이런 사진만 프사로 올린다니까. 메시지를 보내볼까 고민하는 사이, 영상 위의 흰색 바가 다 채워지며 B의 영상이 다시 모서리를 돌아 사라졌다. 화면 위에서 갈 곳을 잃고 꿈틀거리던 엄지손가락도 뜨뜻해진 휴대폰 액정 위로 맥없이 툭- 떨어졌다.
그래, 지금 마시고 있는 맥주가 흑맥주인지 생맥주인지를 물어볼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니까. A는 거리낌을 덜어낸 손짓으로 화면 오른쪽을 몇 번 툭툭 쳤다. A가 화면을 터치할 때마다 화면 속 사진은 누군가의 셀카에서, 푸른빛 가을 하늘로, 다시 보고 있는 영상을 캡쳐한 화면에서, 크로플 사진으로 넘어갔다. 누가 올린 스토리인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하릴없이 화면을 왼쪽으로 넘기던 A는 곧 얕은 숨을 쉬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휴대폰을 든 손을 내리자 보이는 하얀색 벽에는 재작년 이탈리아에서 사 온 엽서가 한가득이었다.
그래. 이탈리아. B와 처음 만난 건 재작년, 이탈리아의 베니스에서였다. 1월의 베니스에서는 오후 4시 반부터 해가 지기 시작한다. 처음 길을 잃었을 때는 조금 어둑어둑할 뿐이었는데, 30분쯤 지나고 고개를 들자 언제 이렇게 됐는지 모를 짙은 남색 하늘이 A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든 건지…. 정신을 차려보니 A의 눈앞엔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길이 끝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었고, 아무리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도 익숙한 풍경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늘은 점점 더 새까매지고, 휴대폰 배터리가 7%를 지나 3%, 1%로 떨어질수록 A의 속도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보조배터리와 휴대폰을 연결하는 충전잭은 예민하기 짝이 없었다. 특정 각도에서 특정한 크기의 압력이 정확히 가해질 때만 휴대폰을 충전해주던 연결잭은 A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새침하게 충천을 멈췄다. 진작 연결잭을 새로 샀어야 했는데. 아니, 애초에 왜 아까 숙소에서 휴대폰을 충전하지 않았지?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길 한쪽, 덩그러니 켜져 있는 가로등 아래. A는 발만 동동 구르며 절전모드의 휴대폰이 죽어가는 모습을 비통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발만 동동 구른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적인 묘사였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골목길의 어둠 속 멀리서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린 A는 언제라도 뛰어 도망갈 수 있도록 한쪽 발에 무게중심을 싣고는, 이미 꺼진 휴대폰을 들고 통화하는 척 흘끔흘끔 그 인영을 관찰했다.
검은 인영은 빛 속으로 모습을 드러낸 후에도 전혀 밝아질 기미가 없었다. 머리부터 종아리까지, 그림자인 줄 알았던 검은 뭉텅이는 사실 갑옷처럼 몸을 꼼꼼히 둘러싸고 있는 롱패딩이었다. 같은 색의 백팩에, 한쪽 손은 패딩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꽂아두고 다른 손에는 휴대폰을 든 모습. 시선을 휴대폰에 고정한 채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는 모습에서 A는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저 롱패딩, 휴대폰을 든 손목의 각도…. 저 사람은 분명 한국인이다!
“저… 혹시, 한국인이세요?”
“…….”
“저… 저기요…?”
“어? 아?”
“혹시 한국인이세요?”
“오! 아 네, 맞아요. 우와, 안녕하세요!”
놀란 눈으로 허둥지둥 에어팟 한쪽을 뺀 B가 얼레벌레 인사를 건넸다. 아니 이렇게 한국인이 반가울 줄이야! A는 구원자라도 만난 것 같은 기분에 깊은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느 관광지든 한국인 무리가 하나쯤은 있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한국인이 이렇게 반가웠던 적은 없었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아쉬운 게 있어야 이렇게 남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니까. A가 통찰과 반성에 잠겨있는 동안 B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A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30%의 반가움, 이 사람이 왜 갑자기 나를 붙잡았을까 하는 의아함이 50%, 낯선 사람에게 보이는 본능적인 경계심 20%가 섞인 눈빛이었다.
“아, 진짜 다행이다. 아니 제가 길을 잃어버렸는데, 배터리가 없어서 길도 못 찾고…. 어디 가지도 못하고 여기만 빙빙 돌고 있었거든요. 아,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아… 여기 골목이 좀 복잡하죠?”
“그러니까요! 아니, 대체 어디서 길을 잘못 들었는지도 모르는데, 또 갑자기 너무 어두워져서… 뭐 보이는 것도 없고, 휴대폰은 꺼지고… 아니 그리고, 여긴 왜 골목길에 가로등도 없어요? 지금 길 잃은지 벌써 몇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추워 죽겠는데 또 어디 가기는 무섭고….”
갑작스럽게 울먹이는 A에, B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흰자 위를 사방팔방 날아다녔다. 위로를 해야 하나 고민하며 들어 올린 손도 뻗을 곳을 찾지 못해 공중을 맴돌다 떨어졌고, 입에서는 멍청하게 어… 어… 같은 소리만 흘러나왔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고뇌에 빠진 듯한 B의 표정을 본 A는 갑자기 훅 정신을 차렸다. 나보다 더 어린 친구 같은데, 말 통하는 사람 만났다고 초면에 이렇게 징징거리다니!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해진 A는 큼큼 헛기침하며 마음을 추스르고는 조금 전 울먹임을 만회하려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큰길까지만 좀 같이 가주시면 안 될까요? 골목이 다 너무 어두워서 지나가기도 무섭고…. 어느 길이 맞는지도 모르겠어서요. 그냥 밝은 곳까지만 같이 가주시면, 그다음엔 제가 어떻게든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네. 그럼요! 당연히 괜찮죠! 사실 저도 약간 헤매는 중이라, 다시 큰 길로 나갔다가 들어오는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음, 그런데 혹시 어느 쪽으로 가셔야 하나요?”
“그, 그냥 아무 큰길까지만 데려다 주시면 되는데….”
“어… 아무 큰길이요…?”
난처한 듯 A의 말을 반복하는 B의 목소리에 A는 또다시 아차, 정신을 차렸다. 점심 메뉴를 고를 때도 가장 안 좋은 대답은 ‘아무거나’랬는데, 같이 가달라고 부탁하는 처지에 ‘아무데나’같은 매너없는 대답을 해버린 거였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A는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아! 이렇게 말씀드리는 게 더 애매하겠죠…? 아, 죄송해요…!”
“네? 아니, 아니에요! 이왕 큰길로 나갈 거 숙소 근처로 나가면 더 편하실 테니까 여쭤본 거였어요. 혹시 숙소는 어디로 잡으셨어요?”
“숙소요?”
“네. 아니,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그 방향으로 나가는 게 더 편하시잖아요.”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A는 눈을 크게 뜨고 B를 바라보며 잠시 굳어 있었고, B는 굳어버린 A를 보면서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당혹스러움을 담은 B의 눈동자가 도르륵 눈 양옆을 굴러다니던 것이 몇 초. A는 우물쭈물하면서 입을 뗐다.
“아아… 숙소 근처까지 데려다주시면… 제가 너무 죄송한데요…?”
“…어? 아? 어… 아니에요! 저 시간 많아요.”
“아 정말요? 너무 감사합니다….”
자신의 고마움이 표현되길 바라며, A는 ‘ㅠㅠ’에 가장 가까운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 보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리려던 찰나, A의 귀에 의외의 말이 들려왔다.
“저, 그럼 혹시 저랑 같이 야경 보러 가실래요?”
“야경이요?”
“네. 산 마르코 광장이 진짜 야경 명소거든요. 혹시 가보셨어요?”
A가 고개를 젓자, B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야경을 보려고 리알토 다리에도 갔었다느니, 거기는 사람이 많아서 사진만 몇 장 찍고 나왔다느니, 산 마르코 광장은 분위기가 그렇게 좋다느니, 그런데 혼자 가만히 서 있기는 민망해서 오래는 못 있었다느니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어쨌든 결론은 자신이 민망하지 않게 산 마르코 광장에서 같이 좀 서 있어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혹시 너무 피곤하시면, 굳이 안 가주셔도 돼요. 혼자서도 보긴 했으니까….”
분명 거절해도 된다는 말이었지만, 옹졸하게 모인 B의 입은 그 말이 예의일 뿐 진심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A는 자신을 구해준 사람의 옹졸한 입을 무시할 만큼 단호하거나 매정한 사람은 못 됐다. A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앞장서세요.”
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대답을 들은 옹졸한 입의 소유자는, 모았던 입을 펴고는 당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들었다. B는 휴대폰과 자신이 걸어온 길을 번갈아 보며 뭔가를 중얼거리다가 곧 휴대폰을 수평으로 들고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뭐, 뭐지. A가 당황하는 사이 코끼리코를 몇 바퀴 더 돈 B는, 이제 방향을 찾았다며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충전이 됐다 안됐다 하는 충전기를 한 번 더 고정하려고 노력하면서, A도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오른쪽, 왼쪽, 직진. 그러다 다리 하나를 건너고 다시 왼쪽, 그 다음엔…. 걸어온 길을 기억할 새도 없이 작은 골목과 더 작은 다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십여 분을 걷자, A가 그토록 찾으려 노력했던 밝고 사람 많은 대로가 나타났다. 거리 주변엔 돌인지 유리인지 모를 것들이 주렁주렁 연결된 목걸이와, 알록달록한 패턴의 스카프들, 유리로 만든 물고기와 고양이가 잔뜩 전시된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래, 이게 내가 기억하는 관광지 베니스지! A는 감격, 감동, 그 비슷한 무언가를 느끼며 평온해진 마음으로 가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때,
“여행은 혼자 오신 거예요?”
“…아, 네!”
“오, 저도요. 원래 혼자 여행 다니는 거 좋아하세요?”
“아뇨. 혼자 여행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원래는 국내 여행도 혼자서는 안 갔거든요.”
“와, 그럼 혼자 여행하는 건 아예 처음이시네요. 근데 되게 멋있으시다. 사실 처음으로 혼자 가는 거면, 유럽처럼 먼 곳에 오긴 쉽지 않잖아요.”
“그렇죠. 사실 친구들이랑 같이 오고 싶었는데…. 그냥, 같이 올 친구들이 없더라고요.”
“아…. 그러셨구나….”
셜록의 ‘난 친구 같은 거 없어’를 연상시키는 A의 고백에 B는 할 말을 잃은 듯 그렇구나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다시 찾아온 정적과 함께, A는 극도의 어색함에 내적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아마 다들 공감할 것이다. 아무 대화도 안 하는 사이보다는, 말을 하다가 끊겨버린 사이가 더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A는 대화가 완전히 종결되기 전에 무슨 말이라도 던져 보기로 했다. 그리고 여기서 대화를 이어나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되묻기였다.
“본인은요?”
“네?”
“본인은 혼자 여행하는 거 좋아하세요?”
“음,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친구들이랑 여행가려면 이거저거 맞춰야 할 것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은데. 혼자 여행하면 제 마음대로 다닐 수 있잖아요.”
“아, 그렇죠. 혼자 여행을 많이 다녀보셨나 봐요?”
“그건 아니고, 사실 이번 말고는 한 번 밖에 안 가봤어요. 작년에 일본을 갔었거든요. 한 일주일인가 있었는데, 되게 좋았어요. 오히려 일행이 없으니까 거기서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와, 여행하면서 새로 친구들도 사귄 거예요?”
“네. 저는 원래 그런 여행 좋아하거든요. 그냥 여유롭게 앉아서 사람들 구경하고, 노래 듣고. 일본에서도 거의 매일 같은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사람들 구경만 많이 했어요. 근데 한 며칠 지나니까 카페 주인분이 저를 기억해주시더라고요. 막 서비스도 주시고.”
“주인분이랑 친해지셨구나.”
“음, 제가 일본어를 좀 했으면 더 친해질 수 있었을 텐데, 제가 일본어를 못해서 아주 친해지지는 못했어요. 그분은 또 영어를 잘 못하시더라고요. 오히려 일본에 놀러 온 미국인이나 유럽 사람들이랑 더 친해지기 쉬웠던 것 같아요. 숙소 근처에 펍이 있어서 거기도 몇 번 갔는데, 아무래도 술이 들어가니까 사람들이랑 친해지기도 더 쉽더라고요. 연락처도 주고받고, 같이 시내 구경도 다니고. 재미있었어요.”
A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B의 옆모습을 흘깃 훔쳐봤다. 여행지에서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건 A의 오랜 여행 로망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친해지고 싶은 사람 앞에서 굳어버리는 A의 혀와 사고회로는 그런 로망의 실현을 번번이 방해했다. 이전까지 여행은 늘 친구와 함께 다녔기 때문에 굳이 다른 친구를 만들 필요가 없기도 했다. 하긴 이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한테 야경도 같이 보자고 말하는 사람이니까, 여행지에서 친구를 만들 법도 해. 역시 사람이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A가 또다시 통찰과 반성에 빠져들려던 차, B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만난 친구 중에 이탈리아인 친구도 있었는데.”
“오! 여기 여행 오면서 연락해봤어요?”
“네? 아니요. 그 정도로 친하지는 않죠. 아마 실제로 만나면 되게 어색할걸요?”
역시 아무리 이런 사람이라도 한 번 스쳐 가는 인연과 친한 사이가 되기는 쉽지 않구나. A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후에도 이런저런 알맹이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A와 B의 눈앞에 광장으로 가는 마지막 골목이 나타났다.
골목을 지나 마주한 산 마르코 광장에는 이미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광장의 세 면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에서는 창문마다 기둥마다 노란 불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렇게 서로의 불빛을 받아내고 있는 건물 벽은 황금으로 지어진 듯 번쩍였다. 1층에서는 카페인지 레스토랑인지 모를 가게가 영업 중이었는데, 광장 쪽으로 열린 테라스에서는 너덧 명의 악사가 이름 모를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대화하며 식사하는 사람들, 은은하게 들리는 음악 소리, 광장을 채운 노란색 불빛과 베니스 전체에 깔린 물 냄새. A는 멍하게 음악 소리를 따라 걸어가, 음악 소리와 물 냄새, 이 모든 이국적인 황홀함을 몸속 가득 채우고 싶다는 듯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야광 프로펠러를 연신 하늘로 던져대는 잡상인들도 A의 마음을 소란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아니, 오히려 하늘 높이 솟구쳤다 떨어지는 색색의 프로펠러는 작은 불꽃놀이가 되어 그 공간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수 분, 멍하니 하늘과 벽을 바라보고 서 있던 A가 B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네, 네?”
“사진이요. 기념사진 찍어드릴게요.”
“아…. 네, 감사합니다.”
A는 아직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정신을 빠르게 다잡으며 B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하지만 모두들 알다시피, A의 휴대폰은 이미 죽어 벽돌이 된 지 오래였다. 약간의 당황이 A와 B의 눈동자를 스치고. A는 어색하게 웃으며 휴대폰을 돌려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아, 전원이 나간 걸 깜빡했네요.”
“그러게요….”
“…….”
“저 그럼, 제 카메라로 찍어드릴까요? 저 여행 와서 사진 많이 찍으려고 카메라 새로 샀거든요. 나름 비싼 돈 주고 산 거라서, 사진 되게 잘 나올 거예요.”
“본인 카메라로요?”
“네. 전화번호나, 아니면 이메일 주소 같은 거 알려주시면 나중에 사진 보내드릴게요.”
"…….."
그래. 굳이 친절을 베풀어 주신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이 순간을 한 장의 사진으로도 남겨두지 못한다는 건 너무 아까우니까. 그러기엔 산 마르코 광장의 공기가 너무 아름다우니까. A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광장 중앙으로 몇 걸음 걸어 들어가, B의 카메라를 향해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려 미소지었다. 노란 불빛과 짭짤한 물 냄새를 머금은 웃음이었다.
2018년, 베네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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