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에디터 / 바투
4가지 기준으로 짜여진 16가지 조합에 의존하여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오늘날의 흐름 속에서 각자 본인의 MBTI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검사를 할 때마다 언제나 같은 결과가 나오는 극단적 E이다. 주말을 집에서 보내는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약속을 못 잡았거나 며칠째 연속되는 약속으로 피로한 때로 한정된다. 평일은 내내 출근하느라 바람 쐬러 가지도 못하고 마음 놓고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질 수도 없었으니, 주말은 토요일 아침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여행과 약속으로 꽉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다. MBTI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물론 아니겠지만, E 성향이 짙게 나타나는 사람들은 주말에 나가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힐링이라는 나의 말에 공감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극 외향형인 나에게 여행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다. 지리를 전공한 아빠를 따라서 어릴 때부터 주말만 되면 차를 끌고 전국을 누볐다.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도 두꺼운 지도 책을 들고 여행을 다녔으니 그 역사가 꽤 길다고 할 수 있겠다.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풍경을, 발길이 뜸한 로컬 맛집을, 파도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섞여 기분 좋은 분주함이 느껴지는 바다를 찾아 다녔다. 주말에 느낄 색다른 즐거움을 생각하며 평일의 단조로움과 무료함을 견뎠다.
외향형 수치만큼 나에게 높게 나타나는 성향은 계획형이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인정하는 프로 계획러다. 매일 다이어리를 열심히 쓰고, 다이어리에 적은 계획을 하나씩 해나가는 것이 나의 하루이자 삶이다. 오늘 하지 못한 일은 내일의 칸에 옮겨쓰고, 빨간색 펜으로 하나씩 지워나가기 위해 살아온 것만 같다. 이는 모두 앞으로 나에게 닥칠 상황을 내가 스스로 컨트롤하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머릿 속에 그려보는 시뮬레이션이 되어야지 마음이 편한 사람이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위해서 빠른 하차 승강장을 알아두는 것은 기본이요, 자주 다니는 교차로에서 시간을 아끼기 위해 신호가 바뀌는 순서 정도는 가볍게 암기한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오늘 해야 할 일과 무엇을 하면서 쉴 지를 메모한다.
그래서 나는 탄탄한 여행 계획을 필요해서 세운다기 보다는 세우는 그 자체를 좋아한다. 이러한 성향이 심하게 나타났을 때에는 여행가기 한 달 전에 엑셀로 30분 단위로 계획을 세웠을 정도다. 꼼꼼한 여행 계획이 가져다주는 장점과 단점은 꽤나 명확하다. 든든한 계획이 뒷받침하고 있을 경우 낯선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어 안심한 상태에서 여행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계획이 틀어졌을 떄의 불안함도 동시에 함께 온다. 그리고 미처 예상하지 못한 돌발 상황, 또는 여행지에서 새롭게 가거나 보고 싶은 것이 생길 때마다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 계획을 꼼꼼히 짜는 데에 들인 시간과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계획을 수정하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최근에 주말 여행을 다녀왔다. 늘 다녀오던 주말 여행이지만, 여행 전날까지 숙소를 예약하지 않은 여행은 거의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여행을 떠나는 아침까지도 과연 숙소도 예약을 안 했는데 여행을 떠나는 것이 맞을까 몇 번이고 의심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도 숙소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느라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실 이번 여행은 일부러 의식적으로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는 것을 모토로 잡고자 했다. 평일 내내 해야 하는 일과 규칙에 나를 옭아매었는데, 여행 마저 계획하고 생각한대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면 나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참 희한하게도, 잘 알아보지 않고 즉흥적으로 숙소를 잡고 식당에 들어간 것은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계획을 한다는 것은 최선의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다. 계획을 짜면서 이것저것 알아보는데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것은 완벽한 여행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만에 하나 생길지도 모르는 구멍을 막기 위한 고군분투의 일종이다. 그런데 계획 없이 가보니 오히려 재고 따지고 했을 때보다 더 좋은 결과가 생기기도 한다. 이것이 내가 그동안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즉흥의 매력일 것이다. 나는 그동안 즉흥을 즐기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계획을 짰던 사람이다. 그렇지만 너무 만족스러웠던 이번 여행을 통해 모든 것은 사전에 계획되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완성될 수 있다는 생각을 조금 비워버리게 되었다.
나에게 여행이란 고정되어 있다고 믿었던 나의 성격과 성향에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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