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가는 곳 2
에디터 / 연푸른
“야 마셔, 마셔.”
“여기 진짜 얼마만이냐?”
“짠해 짠!”
“야, 기다려봐. 부메랑 찍자.”
“어우, 언제적 부메랑이냐.”
“나둬~ 감성팔이 하겠다잖아~”
언제나처럼, 오늘도 영상을 찍자고 제안하는 사람은 역시 B였다. 잔을 모았다 빼기만 하면 자동으로 그 장면을 반복해 건배를 만들어주는 게 부메랑의 핵심이었지만, B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잔이 부딪치는 타이밍에 맞춰 촬영 버튼을 눌렀다. 덕분에 스토리 속 맥주잔들은 제작기 다른 타이밍에 아무렇게나 움직였고,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부딪혀 애써 거품 파도를 만들어 냈다. 아이, 박자 좀 제대로 맞춰보지. 그 지저분한 움직임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에라 모르겠다. B는 다른 두 친구를 태그하고는 그냥 그대로 스토리를 올려버렸다.
“야, 너 이번 학기에 복학하냐?”
“어. 빨리 다니고 졸업이나 해야지.”
“난 이번에 교환 갈 것 같은데.”
“갑자기? 어디로 가는데.”
“준비야 예전부터 했지. 프랑스 가려고.”
“오 프랑스? 의외네.”
“그냥 유럽이면 다 괜찮을 것 같아서. 교환 가서 뭔 공부냐, 여행이나 존나 다녀야지.”
“그치. 교환 가서 여행 안 다니면 억울하지. 야, 프랑스 유경험자. 뭐 팁이라도 줘봐.”
대화의 흐름이 B에게로 옮겨갔다. 아니, 이 년 전에 짧게 여행을 다녀온 것뿐인데 대체 무슨 팁을 달라는 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B는 기억을 더듬어 어떻게든 프랑스의 모습을 생각해내려 노력했다. 난 파리가 진짜 좋았는데 좀 지저분해서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더라. 하긴, 지하철에서 찌린내가 좀 나긴 해. 아 그리고 신기한 게, 거기는 지하철 문을 열려면 니가 직접 손잡이를 돌려야 된다. 안 그럼 문이 안 열려.
“구라치지마, 뭔 지하철에서 사람이 문을 직접 열어.”
“아니 진짜라니까, 거긴 레버를 돌려야 문이 열린다고. 그리고 진짜 신기한 게 뭔지 아냐? 거긴 지하철에도 창문이 있다?”
“뭔 개소리야. 지하철에 창문이 어떻게 있냐?”
아니 진짜라고..! B가 억울해하며 술을 들이켰다. 야, 니네 빨리 인터넷에 검색해봐. 이것들이, 안 보여주면 계속 안 믿겠네? 아니기만 해보라며 으름장을 놓는 친구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준 B는, 두고 보라며 자신도 함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페이스 아이디로 잠금을 해제하자, 휴대폰에는 아까 접속한 인스타그램 화면이 그대로 켜져 있었다.
열심히 ‘프랑스 지하철’, ‘프랑스 지하철 손잡이’ 따위를 검색하는 친구들을 훔쳐보며, B는 원래의 목적은 친구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스토리 방문자나 확인하려 프로필사진을 눌렀다.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벌써 스물세 명의 사람이 스토리를 확인했다고 적혀 있었지만, 자기도 끼워달라고 찡얼대는 동기의 디엠 하나를 제외하곤 딱히 반응을 보낸 사람이 없었다. 누가 누가 내 스토리를 봤나 확인하며 스크롤을 내리다, 붉은빛이 점점이 채워진 프로필 사진 하나에 눈이 멈췄다.
철제 난간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인 채 상체만 뒤돌아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A의 뒤로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거기에 대조되는 붉은색 지붕이 보였다. 지붕과 같은 색의 옷을 입은 A는 카메라를 쳐다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고, 바람은 그런 A의 머리카락을 있는 힘껏 불어대고 있었다. 이 누나는 요즘 어떻게 지내려나. 마지막으로 연락을, 아니 연락 비슷한 상호작용이라도 한 게 언제였더라. B가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진위확인을 마친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새끼 말 진짜였어.”
“지하철 문을 손잡이를 돌려서 연다고? 난 아직도 납득이 안 되는데.”
그러게 내 말이 맞다니까, 속고만 살았나. B는 혀를 끌끌 차며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맥주잔을 들었다. 맥주잔 위에 묻은 설탕이 먼저 혀를 달콤하게 깨우고, 이어서 시나몬 향이 나는 흑맥주가 B의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할짝할짝, 입가에 묻어 있는 달콤함까지 삼켜낸 B에게 친구 중 한 명이 물었다.
“너 유럽 여행 한 달 넘게 가봤잖아. 어디가 제일 좋았냐?”
어디가 제일 좋았더라. B는 눈동자를 굴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독일에서 먹은 소시지가 그렇게 맛있었는데. 아니야, 그래도 프랑스 몽생미셸이 제일 독특했던 것 같다. 낮에는 라퓨타, 밤에는 디즈니가 되는 현실 속 천공의 섬. B는 몽생미셸이라고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가, 뭔가 마땅치 않다는 기분이 들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진짜 아름다운 공간이었는데, 뭐가 부족했지?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고민에 빠져있을 때, B의 머릿속에 붉은 지붕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래, 가장 좋았던 여행지는 거기였다. 종탑 위로 올라가 붉은 돔과 붉은 도시를 끝도 없이 구경했던,
“피렌체.”
“피렌체?”
“응. 이탈리아, 피렌체.”
“어?”
“어??”
검은색 장갑을 낀 손가락이 소심하게 B를 가리켰다. 막 핸드크림을 발라 허브향이 나는 손가락으로, B도 상대방을 가리키며 놀라움을 표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둘이 서로를 마주 보며 멈춰 있는 동안 주변 사람 두어 명이 그들을 흘깃거렸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역시 B였다.
“여기서 또 만나네요.”
“와, 피렌체에서 만나다니.”
“역시, 다들 비슷한 루트로 다니나 봐요.”
“그러게요. 혹시 다음 목적지는 로마?”
“와, 진짜 똑같네.”
A와 B가 서로를 마주 보고 킥킥 웃었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함께 야경을 구경한 후 이틀이 지난 오후였다. 그날 밤 둘은 서로의 사진을 잔뜩 찍어주고는, 함께 A의 배터리 충전기를 산 후 헤어졌다. 어차피 스쳐 지나갈 인연. 사진을 받을 이메일 주소만 주고받았을 뿐인데,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다니. 역시 이탈리아는 좁고, 관광객들 가는 곳은 똑같구나...
그때 A의 뒤에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들의 눈치를 보며 몸을 기웃거렸다. 아이고, 우리가 통행을 방해하고 있었네. B는 A에게 옆으로 살짝 비키자는 손짓을 보냈고, A는 아이코, 소리를 내며 슬쩍 옆으로 돌아섰다. 덕분에 둘의 묘한 대치 상태가 깨지고, B의 내적 고민이 시작됐다.
이렇게 만났는데, 같이 다녀도 되겠지? 나를 좀 부담스러워하시려나. 하지만 여기서 먼저 가겠다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괜히 그렇게 선을 그었다가 관람 속도가 어긋나버리면, A와 B는 계속해서 마주쳤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끝없는 어색함의 루프로 들어가게 될 터였다. 그럴 거면 그냥 같이 다니는 게 낫지. B는 생각했다. 그다음 그림, 또 다음 그림. 누구도 같이 다니자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둘은 서로에게 박자를 맞춰 걸으며 한 방에서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회화엔 크게 관심이 없는 B와 달리, A는 한 작품 한 작품을 신중하게 구경하는 것 같았다. 특히 이 미술관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라는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를 봤을 때는 눈썹이 확 쳐지며 팔(八)자를 만들었다. 어, 그 표정이다. 베니스에서 길을 잃었다고 울먹거릴 때 지었던 표정. 그림을 보는 게 그렇게 감동적일 일인가. B는 딱히 공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A의 표정을 관찰하는 건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다음 작품인 비너스의 탄생이 보이자 A의 눈썹은 한 번 더 쳐지며 ‘힝’ 하는 표정을 만들었고, B는 그림보다 그런 A의 눈썹이 더 신기했다. 눈썹이 저렇게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구나.
시간이 흐르고, 별다른 대화 없이 그림을 감상하던 A와 B는 복도로 나왔다. 복도 한쪽 끝에는 그들처럼 체력이 방전된 관광객을 위해 의자 여러 개가 마련되어 있었다.
“사람 구경을 좋아하신다더니, 미술관에 오셨네요.”
“아, 그죠. 그래도 유럽까지 와서 매일 사람만 볼 순 없잖아요. 일본이야 가끔 시간 내면 갈 수 있지만, 유럽은 정말 제대로 마음먹어야 올 수 있으니까.”
“하긴 그렇네요.”
“그리고 여기서도 사람 구경은 할 수 있어요!”
바로 전까지 내가 당신의 눈썹을 구경했던 것처럼. 뒷말을 생략한 B의 대답에 A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좀 더 안절부절못했던 것 같은데, 낮에 만난 A는 생각보다 차분한 사람이었다. 아니면 저번에 몇 시간 같이 있었다고 내가 좀 더 편해진 건가. B는 자신의 바람에 ‘유력가설’ 딱지를 붙이며 A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A가 등지고 있는 창문 너머로는 피렌체의 또 다른 명소라는 베키오 다리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베키오 다리 근처에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다고 했는데. 5시가 다 되어가는 시계를 확인하며 B가 생각했다. 같이 밥 먹자고 해볼까? 근데 이거 너무 집적거리는 것 같으려나. 하지만 여행 왔는데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밥 한번은 먹어봐야지. 다른 곳은 몰라도, 있어 보이는 레스토랑은 혼자 가기 민망하다구. B의 머릿속에서 두 개의 자아가 싸우기 시작했다.
“혹시 미술관 다 보고 나서는 뭐 할 계획이세요?”
“음… 딱히 일정은 없어요.”
“앗, 저, 그럼 혹시… 저랑 같이 저녁 드실래요?”
“어어, 저녁이요?”
또 그 표정이다. 내가 숙소가 어느 쪽이냐고 물었을 때의 표정. 눈썹은 위로 들리고, 눈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커지는. 놀람이 가득 담겨있지만, 왠지 모르게 억울해 보이기도 하는.
하지만 그날에 대해서라면 B도 할 말이 있었다. 그날 B는 숙소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나가야 하느냐고 물었을 뿐, 숙소까지 데려다준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감동과 감사를 잔뜩 담은 A의 얼굴을 앞에 두고 ‘전 숙소 방향으로 나가자고 했지 거기까지 데려다드린다는 말씀은 안 드렸는데요’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한국인의 정이란 게 있으니까. 그리고 덕분에 산 마르코 광장에서 사진도 잔뜩 찍을 수 있었으니까.
“네, 저쪽에 베키오 다리가 잘 보이는 레스토랑이 하나 있다고 들었거든요. 평점도 괜찮던데.”
“아…. 전 상관없어요. 앗, 또 애매하게 대답해버렸네.”
A가 오른쪽 손으로 자신의 입을 툭툭치고는, 죄송해요. 라는 말을 뱉었다. 이어서 B의 눈치를 슬쩍 보며, 알겠다고 좋다고 대답하는 A에, B는 저도 모르게 옹졸해진 입을 펴고는 활짝- 미소지었다.
“와인 드실래요?”
“와인이요?”
“네. 아, 술 안드시나요?”
“그건 아닌데, 제가 와인을 먹어본 적이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와인 맛을 잘 몰라요.”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여기는 왠지 와인이 잘 어울리는 분위기 같아서.”
그건 A의 말이 맞았다. 레스토랑 안은 고급스러움과 친숙함이 적당히 섞인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노란빛이 도는 조명은 덩굴처럼 꼬불거리는 철제 장식에 매달려 레스토랑 구석구석을 비추고, 벽에는 방금 우피치 미술관에서 본듯한 분위기의 그림 몇 점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그림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맥주와 와인을 마시며, 저마다 함께 온 사람과 재잘대며 나누는 대화 소리는 레스토랑 전체의 분위기를 너무 엄숙하지 않게 유지해주었다. 적당히 밝으면서,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부산하면서, 적당히 차분한 분위기에 B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와인을 자주 드세요?”
“자주는 아닌데, 와인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가끔 마셔요.”
“그렇구나….”
B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직 B에게 와인은 어른들의 음료 같았다. 물론 B도 법적으론 성인이지만, 뭔가 와인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잘 챙겨입고 먹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니면 맥주 먹을까요? 전 맥주도 좋아하거든요.”
“아유, 와인도 좋아요! 전 사실 맥주 맛도 잘 모르거든요. 친구들이랑은 맨날 소주만 마셔서.”
“술을 잘 마시나 보네요.”
“아, 그건 아니고요. 그냥 주변에 부어라 마셔라 하는 친구들밖에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좋아하는 맥주도 없고... 굳이 꼽자면 코젤 다크? 그래도 흑맥주는 구분이 되잖아요. 이름도 있어 보이고, 시나몬도 뿌려주고. 그렇지 않아요?”
해맑기 그지없는 B의 말에 A가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름이 있어 보인다는 말은 하지 말걸. ‘다크’나 ‘흑’이 들어간 단어를 멋있어하는 건 조금 오글거리나. A의 웃음이 한동안 이어지자, B는 민망하게 머리를 긁으며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민망함을 떨치려는 듯, 자신이 주문하겠다고 말하며 메뉴판을 그러잡은 B에게 웨이터가 다가왔다. 이런저런 음식과 와인 하나를 주문받은 웨이터가 돌아가자, A와 B 사이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어색한지 손가락을 쪼물거리는 A를 보며 B가 말을 꺼냈다.
“내일은 어디 갈 계획이세요?”
“아마 두오모 쪽으로 갈 것 같아요. 혹시 가보셨어요?”
“오! 아니요. 저는 오늘 점심때 여기 도착한 거라서, 저도 내일 두오모랑 종탑 가려고 했어요. 저희 거기서 또 마주칠 수도 있겠네요!”
“음, 그러네요.”
A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잔을 들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허공을 바라보며 천천히 물을 들이켜는 A에, B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말을 이었다.
“저, 그럼 혹시...”
“네?”
“혹시 따로 동행 안 구하셨으면, 같이 가실래요?”
다 마신 물잔을 미처 테이블에 내려놓지 못한 A의 손이 허공에서 움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내려갔다. 언뜻 차분해 보이는 움직임이었지만, 침묵의 팝핀을 추고 있는 눈동자는 A의 당혹스러움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B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테이블 어느 한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A는 어… 오… 와 같은 미쳐 말이 되지 못한 소리만 흘려보냈다.
한편 그런 A를 보는 B도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아니, 이렇게까지 놀라실 필요가 있나? 내… 내가 싫은가? 조금 상처를 받을락 말락 하는 B의 마음이 이 상황을 부정하며 재빠르게 다른 가설 하나를 내놓았다. 그래. 지금 저 분은, 내가 본인한테 작업을 걸고 있다고 생각하실지도 몰라. 그럼 당황할만 하지. 이제 겨우 두 번 본 사람인데.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B는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아무말이나 되는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저, 저번에 찍어주신 사진 봤는데, 사진을 되게 잘 찍으시더라고요.”
“… 사진? 사진이요?”
“네! 산 마르코 광장에서 찍어주신 사진이요.”
“… 아, 네. 그 사진이요.”
“네. 그때 찍어주신 사진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친구들이 잘 나왔다고 반응을 엄청 많이 해줬거든요. 그래서 그냥, 두오모 가서도 같이 기념사진도 찍어주고 하면 좋으니까. 그래서 말씀드린 거였어요.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요. 아 그리고, 두오모는 입장할 때 줄도 엄청 길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혼자 서있으면 심심하잖아요. 또 동행이 있어야 줄 서 있다가 잠깐 화장실도 갔다 올 수 있고, 또, 또, 조토의 종탑 엄청 높잖아요. 혼자 올라가면 포기하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누가 또 같이 가줘야 추진력을 얻어서 끝까지 오를 수 있거든요. 어, 그리고 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말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가고 있다는 것이 인식되자, B의 입이 천천히 다물어졌다. 다시 찾아온 어색한 정적에 B는 불현듯 자아 성찰에 돌입했다. 그래,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얼마나 당황스러우시겠어. 내가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까! 망했다. 다 망했어…….
차라리 빨리 음식이라도 나왔으면 좋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나아갈 때쯤, B의 앞자리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B는 황망히 테이블을 보고 있던 시선을 들어 A를 마주 봤다. 어느새 안정을 찾은 듯한 A는, B의 눈을 올려보며 끅끅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그런 A와 눈을 마주친 B의 얼굴에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큼큼 헛기침한 B가 물을 두모금 마시고 내려놓을 때까지도 A는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아, 죄송해요. 너무 웃어버렸네.”
“…. 아니에요…. 즐거우셨다니 됐어요….”
그 말에 A가 한 번 더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고는 손부채질을 하며 물잔을 들었다. A가 물을 마시고, 물잔을 다시 내려놓는 잠깐의 순간 동안에도 B는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정신을 차리려는 듯 눈을 몇 번 꾹 감았다 뜨는 B를 보며 A가 말을 이었다.
“사진 잘 나왔다니 다행이네요.”
“…네?”
“친구들 반응이 좋았다면서요.”
“아, 아! 네. 맞아요. 다들 누가 찍어줬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보여드릴까요?”
B는 대답도 듣지 않고 허둥지둥 겉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는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다. 잠시 후 B가 보여준 휴대폰 화면 속에는 노란빛에 둘러싸여 한쪽 입꼬리를 싱긋 올리고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B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배경의 노란 불빛은 은은하게 번져 마치 애니메이션 라푼젤 속 연등 축제를 연상시켰고, 덕분에 B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몽환적으로 보였다.
“오…….”
“그죠. 잘 나왔죠.”
“제가 찍었지만 정말 잘 나왔네요.”
A가 여전히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B는 그렇다니까요- 라고 대답하며 사진을 몇 번 확대했다 축소했다를 반복하다, 실수로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사진에서 빠져나왔다. 덕분에 노출된 B의 계정에는 여행에서 찍은 사진 외에도 친구와 밥을 먹은 사진,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진, 할로윈 분장을 하고 셀카를 찍은 사진 등 이런저런 사진이 잔뜩이었고, A는 봐서는 안 될 걸 본 사람처럼 재빨리 시선을 옮겼다. B 역시 아이쿠, 소리를 내며 휴대폰을 회수했다.
잠깐의 정적이 테이블을 감쌌다. 타이밍 좋게 등장한 웨이터가 식전빵과 와인잔을 세팅하며 정적을 깨는 듯 했지만, 그는 곧 다른 테이블로 떠나며 다시 두 사람을 침묵 속에 던져 놓았다. 토독토독, 의미없이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 소리가 두어번. 그마저도 너무 조용해진 분위기에 슬그머니 움직임을 멈춘 B 덕분에 테이블 위에는 완전하고 명확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
“큼…. 사진, 예쁘네요.”
“아, 네. 감사합니다. 덕분에 인생샷 건졌어요.”
“카메라가 좋아서 그런 거예요.”
“찍으신 분이 금손인 거죠. 제가 찍으면 이렇게 안 나오더라고요.”
“음, 그럼 모델이 좋아서 잘 나왔나 보네요.”
“어… 감사합니다…?”
너무나 논리적인 A의 칭찬에 B가 얼떨떨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에 다시 A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고, B는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내려놓았다. 한 번 더 테이블이 조용해졌지만, 이상하게도 아까 같은 어색한 침묵은 아니었다. B는 편안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며, 옆 테이블 사람들과, 벽에 걸려있는 그림과,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와, 앞에 앉은 A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A 역시 B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레스토랑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B가 먼저 입을 뗐다.
“저기,”
“네?”
“인스타그램 하세요?”
“……네.”
“혹시, 인스타그램 맞팔 하실래요?”
B의 질문에 A가 천천히 눈을 두 번 깜빡였다. 대답을 망설이는 A의 모습에 B는 재빠르게 덧붙였다.
“아, 불편하시면 굳이 안 해도 괜찮아요.”
“음….”
“…….”
“내일, 사진 얼마나 잘 찍으시는지 보고 결정할게요.”
“…내일이요?”
“네.”
“……?”
“같이 가자면서요, 두오모.”
“아.”
“…….”
“…저는, 좋아요.”
B의 입꼬리가 숨길 수 없이 올라갔다.
A님이 회원님의 스토리에 공감했습니다: 🍻
B님이 스토리에 있는 회원님의 공감을 좋아합니다.
2018년, 피렌체
2020년, 피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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