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의 궤적을 따라, 성장
편집장 / 연푸른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시기에는 늘 지난 일년을 돌아보는 컨텐츠가 유행한다. 올해 나온 최고의 작품과 최고의 인물에게 상을 주고, 올해 최고로 이슈가 되었던 사건 사고에 등수를 매기는가 하면, 올해의 트렌드를 몇 개의 키워드로 정리해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다.
같은 시기는 개인의 삶에 대해서도 지난 시간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올해 잘 쓴 물건을 리뷰하는 영상이 유튜브 곳곳에서 추천되고, 사람들은 새로운 다이어리나 스케줄러를 사며 지난 해의 다이어리를 – 꾸준히 썼든 그렇지 않든 – 뒤적인다. 인스타그램 피드는 올해의 나를 기록하는 친구들의 게시물로 가득 찬다. 올해는 이런 해였고, 이런 것들을 배웠고. 1년동안 수고했다, 장하다 나!
이렇게 내 일년을 정리하는 글을 쓰다 보면 내가 지난 한 해 동안 어떤 일에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는지, 어떤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몇 년 동안 묵혀둔 기록을 살펴보는 것도 꽤 재미있다. 과거의 내가 적어둔 짧은 글들은 내 생각의 궤적을 훑어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도 과거의 내가 써 올린 기록을 조금 뒤적여 봤다. 그 중 일부를 여기에 공유한다. 아래는 2020년 12월 31일에 쓴 글의 일부다.
올해 나는 내가 조금은 컸다고 느낀다. 물론 매년 나는 조금씩 컸겠지만.
2019년의 나는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상태, 그래서 완벽한 상태를 설정해뒀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서 이탈해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이상적인 상태로 들어가려고 애썼다. 그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고 나는 내가 많이 나아졌다고 느꼈다.
올해는 그 '완벽한 상태'에 의문을 던질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완벽하고 이상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사람이 뭐 얼마나 있겠어. 다들 자기만의 부족함을 안고 살아가는 거지. 이상적인 상태만 정상적이라고 불리는 건 이상하다.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사람들만 정상인 세상이라면 그건 그 세상이 이상한 거다. 그래서 올해의 나는 그냥 내가 있던 자리에서 앞으로 갔다. 작년에는 내가 나아졌다고 느꼈다면, 올해는 내가 컸다고 느낀다.
지금 보니 상당히 의미심장한 글이다. 도대체 큰다는 건 뭘까? ‘컸다’와 ‘나아졌다’의 차이는 뭘까?
2022년의 여는 밍기적의 13호 주제는 <성장>이다. 성장의 사전적 정의는 (1)사람이나 동식물 따위가 자라서 점점 커짐 (2)사물의 규모나 세력 따위가 점점 커짐 (3)생물체의 크기, 무게, 부피가 증가하는 일이다. 사전이 정의하는 성장은 그 방향성이 정해져있다. 성장하려면 커지거나 증가해야 한다. 작아지거나 감소하는 건 성장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젠 커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부피가 커지는 것만이 성장이 아님은 확실한데, 무형의 커짐을 우리는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생물이 내적으로 ‘성숙’해지는 것, 국가와 같은 조직이 ‘발달’하는 것, ‘민주주의’와 같은 개념과 체제가 더 ‘구체화’되고 ‘발전’하는 것. 이 모든 것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그 방향성은 정해져 있는 걸까? 각각의 대상에 대해 ‘성장’이 일컫는 방향성은 모두 같은가?
밍기적의 13호는 다양한 성장에 대한 각 에디터의 이야기를 담았다.
바투는 그의 글 <국가의 성장>에서 체제의 성장에 대해 말한다. 한국은 빠른 경제 성장 속에서도 민주주의적 가치를 잘 정착시켜 온 것으로 평가받는 몇 안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 그러나 올해 대선을 앞두고 제시되는 공약과 후보의 여러 발언을 보며, 바투는 과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실제로’ 전진하고 있는지 의문을 던진다.
망의 <성장 가능성을 갖고 태어난 우리는 모두 은수저가 물려 있음을>는 인간의 성장을 다룬다. 인간의 성장은 헤맴과 쉬어감, 뒷걸음질 속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의 성장과는 다른 평가를 받는다. 이 글은 애니메이션과 웹툰 속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의 성장을 살펴보며, 인간의 보편적 성장 가능성을 긍정한다.
연푸른의 글 <다육과 나>는 반려 식물과 이를 기르는 에디터 본인의 성장기를 함께 엮은 에세이다. 커가고, 죽어가고, 다시 살아내는 다육 식물을 보며 에디터 역시 함께 크고, 치유 받고, 가지를 내렸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가지가 발달하는 것만이 성장인 것은 아님을 살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온기의 글 <성장통>은 성장에 압박을 다룬다. 뒤쳐지지 않으려면 성장을 해야만 하지만,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고통스럽다. 끝없는 성장에 대한 압박을 받아온 온기는 그런 고통 끝에 성장을 이루고 나면, 그 뒤에는 또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묻는다.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성장과 혹사 사이의 경계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
다시, 도대체 큰다는 건 뭘까? ‘컸다’와 ‘나아졌다’의 차이는 뭘까?
내가 생각하는 답을 말해보자면, 컸다는 나아졌다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무언가가 ‘나아졌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상태가 있어야 하고, 여기에 가까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특정한 지점으로 쏘는 레이저가 아니라, 수만가지 다른 길로 뻗어나가는 달빛을 보고도 우리는 ‘커졌다’고 말할 수 있다. 커졌다는 표현은 변화의 방향과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는다. 나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나아지지 못한 움직임까지 포함할 수 있다. 그것이 커짐이니, 성장이 뜻하는 바도 비슷하지 않을까?
지난 일년을 함께하며, 나와 밍기적은 모두 조금씩 성장했다. 밍기적과 함께하는 2021년을 정리하며, 나는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올해 난 별다른 고민 없이 행복하게 잘 살았나 보다. 바쁠 땐 바빴겠지만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닌 일의 연속이었나보다. 어제를 오늘로, 오늘을 내일로 끌고 가지 않는 일 년을 보냈나 보다. 잘했네 나. 잘 살았네.
내년에는 나를 좀 모아봐야겠다. 지난 몇 년간 알록달록 살아봤으니 이제는 채도를 높일 거고, 물감을 모았으니 그림을 그릴 것이다.
어제를 오늘로, 오늘을 내일로 끌고 가지 않은 덕분에 무엇 하나 눈에 띄게 ‘발전’시킨 것이 없었다. 다만, 늘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며 매일 새로운 궤적을 그었다. 밍기적이 추구하는 성장은 그런 것이다. 어마어마한 발전이 아닌, 자그마한 움직임의 흔적 하나하나. 2022년에도 우리는 이런 움직임을 이어갈 것이다. 올해도 우리가 함께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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