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통
에디터 / 온기
성장이라는 단어의 신봉자인 내 자신
나는 성장하는 내 자신이 좋았다. 젊은 날의 성공, 그것은 언제나와 같이 가지고 있던 나의 가장 흔들리지 않는 목표였다. 그게 조금은 잘못되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성장을 멈추면 그대로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닷 속의 상어처럼 나는 부단히 지느러미를 흔들었다. 나는 안주해있는 스스로가 싫었고 그것은 지금도 다름이 없다. 그래서 잠시라도 멈춰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 혐오한다는 단어를 서스름없이 내뱉었다.
성장에 대해 내가 느끼는 이러한 감정은 아마도 더는 어릴 적 내 성장을 북돋우던 주변인들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성장의 속도, 유무, 방향 등 이제 그 모든 것들을 이제는 온전히 내가 결정하고 끌고나가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가장 강하게 확신하고 있다. 신체의 성장이나 배움의 속도가 더디더라도 ‘대기만성'이라는 워딩을 사용한다던가, 재능을 찾아주려 여러 방면으로 부단히 노력하며 내 기 죽이지 않으려던 이들은 더 이상 없다. 나의 성장을 북돋우던 혹은 재촉하던 존재의 부재는 오히려 성장에 대한 나의 조바심을 만들어냈다.
성장은 언제부터 내게 조심해서 써야할 단어가 되었나? (1)
성장이라는 단어 자체에 반감을 품은 것은 아니다. 성장은 여전히 내가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는 단어이다. 어느 분야에서든 조금이라도 성장한 부분이 있는 것은 기분 좋은 경험이다. (파를 조금 더 반듯하게 썰었거나, 전기 장판을 버려야 할 때, 앱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음을 알아낸 것과 같은 사소한 경험들까지. 어느 하나에 국한되지 않는다.) 내가 조심스러워 하는 이유는, 세상에 중요한 건 성장 뿐만이 아니기 때문임을 알아서이다. 또 나의, 우리 집단의 성장만 중요한 것도 아니다. 성장이 더뎌지더라도 지켜내야할 가치가 있다. 지금은 성장에 집중할 때가 아닌 시기도 있다. 성장에만 정신이 팔려 지켜내지 못한 것들이 있지는 않은 지 가끔 정신이 번뜩 드는 경험을 하곤 한다.
또, 성장이라는 단어에 반감을 느낀다기보다는, 고속 성장이라는 단어 뒤에 잊혀지고 희생된 사람들 그리고 묵인된 불편한 사실들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같은 경우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을 적절히 받아들임과 동시에 더디게 혹은 다르게 성장하는 본인의 모습을 견딜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안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디폴트 값이 되어버렸다. 성장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것만같은, 본인만 한참 뒤쳐지는 것 같다는 불안과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너무나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성장통 혹은 겪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통증이라는 생각에 (2)
일에는 다 순서가 있는 것인데, 처음에는 일의 순서같은 건 하나도 모른 채로 뛰어들다가 지치고, 다치고, 좌절을 겪는 일이 빈번했다. 그 후에는, 실패를 통한 경험으로, 일의 순서와 요령과 동료를 얻는 과정이 있었다. 특히, 그 일을 처음 하는 사람에겐 그보다도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없겠지만, 조금의 숙련도만 얻고 나면, 그보다도 간단한 일은 없을 그런 종류의 일들에서 말이다. “그래도 어제보다 오늘 하나라도 더 알고 조금이라도 더 능숙한 사람이 되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나는 한뼘 성장한 사람인걸까?
이미 지나가 버린 일들에 대해 연연하는 속 좁은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일명 정신 승리를 하다가도 이따금씩은 의문이 든다. 나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던 성장통을 겪은 것일까? 그 성장통을 겪고 나는 생존해있는 걸까? 아니면 나를 거의 죽일 뻔한 통증을 겨우 지나온 걸까? 겪는 당시에는 그것이 성장통인지 그냥 고통인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나를 죽이지 않을 정도의 고통만이 나를 성장시킨다. 성장을 하려면 일단 죽지 않아야 한다. 사멸하지 않아야 다음이 있다.
실제 육성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손님으로부터, 또 고용주로부터 “요즘 애들은" 쉽게 돈을 벌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누군가는 실제로 그런 사람을 대면할 일이 있냐는 말을 할 정도로 꽤나 충격적인 언사였다. 도전 정신이 없고, 세상이 만만한 줄 아냐는 말이 정말, 혹시나, 질문이였다면 지금이라도 대답해주고 싶다. “단 한번도 세상이 친절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도전하고자하는 마음으로 발버둥이라도 쳐서 시도해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일에 대해 그것까지도 성장이라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단계에 와있다고.”
제 멋대로 성장이라는 단어를 남용하는 사람들을 목격해서일 수도 (3)
성장의 기준은 결국 각기 다르다. 이는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 성장이라는 단어의 주관적 특성을 악용하는 경우도 더러있다. 자신만의 스토리를 가진 사람에 대해 정성적인 평가와 더불어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보기 위해 본인의 성장 경험을 기재하게 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는 데, 이 부분을 진심으로 사력을 다해 적어내는 지원자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여럿 목격하곤 한다. 필자 본인도 그렇게 악용한 적이 없냐는 질문에 확신을 가지고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성장이 포괄하는 범위는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고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기준으로 성장했다라는 느낌과 인상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명확하게 성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만족할 만큼의 성장을 거둔 이후의 삶은 과연 행복할까 하는 고민은 불안을 심화시킨다 (4)
성공의 의미에 대해 되새기는 과정에서 나는 성장의 의미를 함께 되짚어보았다. 눈에 띄게 성장한 사람을 두고 성공한 사람, 눈에 띄는 성장률을 보인 회사는 성장한 기업이라 자주 일컬어지니 말이다.
젊은 날의 성공이라.. 그렇다면 젊은 날에 이미 이룰 수 있는 최대치의 성장을 이룬 사람이 된다는 뜻인데, 그 이후에 낢은 삶에는 무엇이 있을까? 더는 성장이나 성공이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본인의 삶을 개척하게 될 것인가? 혹은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최대의 성장, 성공을 거두기 위해 또 혹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인가? 제 2의 목표와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를 목격하기도, 길을 잃은 누군가를 보기도 했지만, 나는 그 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성장은 파도에 투박하게 깎인 돌 하나를 그 자리에 다시 쌓는 것
여전히 성장은 나에게 중요한 단어이다. 성장하지 않고 그저 늘 하던 일만 별 생각 없이 해내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아득해지는 정신과 풀린 동공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언제나 역동적인 삶을 살고 싶었고, 마음이 이따금씩 요동치지만 그 파도에 몸을 맡기고 싶다. 내가 호기롭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집채만한 파도가 되려 나를 집어삼킬 수도 있다고 해도 여전히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더이상 변화가 두렵지 않고 변화에 적응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설명할 수 없어진 지금에도, 나는 여러 모양과 색깔, 온도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그런 마법같은 일들이 내 삶에서 일어났으면 한다.
나는 성장하는 내 자신만 사랑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렵지만, 성장이라는 단어의 포용력을 넓히는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 생기고만 삶의 여러 위기들을 말이다. 공들여 높은 탑을 쌓는 과정과, 하나 하나 손길이 더해져 쌓인 탑을 우리는 분명히 성장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공든 탑이 무너져 잠시 좌절을 겪더라도, 내 손으로 다시 돌 하나를 쌓은 것 역시 충분하고도 넘치는 성장이다. 누군가에게는 경고일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위로일 메시지를 전달하며 2022년도 첫 온기의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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