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agazine_2022/14호_사람 옆에 사람이, 인간관계

14호_사람 옆에 사람이, 인간관계 / 편집장의 인사

by 밍기적_ 2022. 3. 31.

사람 옆에 사람이, 인간관계


편집장 / 연푸른

3월이다. 여전히 학교를 벗어나지 못한 나는 올해도 어김없이 새학기가 시작된 캠퍼스를 지켜볼 수 있었다. 방학 동안 비어있던 강의실 복도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고, 막 배송되어 아직 때묻지 않은 과잠을 입은 학생들이 무리 지어 식당 한 켠을 지나간다. 강의실에선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찡긋 눈인사를 보내고, 조별과제를 위해 만들어진 단톡방에서는 ‘안녕하세요. 저는 00과 000입니다. 잘 부탁드려요.’같은 판에 박힌 인사가 오간다. 나의 첫 기억이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나는 늘 학교나 유치원에 속해 있었고, 그 곳의 3월은 늘 이렇게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뜻했다.
학교라는 공간을 벗어난 사람들에겐 더 이상 3월이 이런 집단적 관계 맺기를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관계맺기는 본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크든 작든 우리의 일상 구석구석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니까.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캠퍼스엔 아직 방학 특유의 적막이 감돌고, 밍기적마저 쉬어 갔던 2월. 나는 살사와 바차타를 배우는 춤 동아리에 새로 들어갔다. 살사와 바차타는 라틴 소셜 댄스로, 두 사람이 한 짝이 되어 정해진 안무없이 즉흥적으로 추는 춤이다. 이 춤에는 몇 가지 패턴이 있어서 동작을 리드를 하는 쪽이 특정 동작을 하라는 신호를 주면 상대방은 이에 맞추며 함께 동작을 만든다. 이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춤이 이어질 수 없기 때문에, 소셜 댄스를 출 때는 서로에게 집중하는 것이 필수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팔과 다리의 텐션을 느끼고.
난데없이 춤 동아리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면, 춤을 추는 것이 사람간 관계를 맺는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뭐, 사람과 함께 추는 춤이니 당연하겠지만. 두 사람이 작용과 반작용을 주고받으며 추는 춤이기 때문에, 같은 동작 같은 패턴을 추더라도 함께 추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누구는 신호를 부드럽게 주고, 누구는 상대를 더 강하게 밀며, 누구는 모험적인 동작을 시도하고, 시선이나 팔의 움직임에 본인만의 개성을 담는 사람도 있다. 함께 춤 추는 파트너가 누군지에 따라 나의 춤도 매번 변하고, 이에 따라 최애 파트너가 정해지기도 한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 사람이지만, 내가 모든 사람에게 늘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누구와 어떤 상황에 만나 이야기를 하는지에 따라 나는 내 행동과 말투를 달리한다.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유하다가도 다른 이에게는 엄격하며, 어떤 집단에선 듬직하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다가 또 다른 곳에선 분명히 썅년일거다. 나는 한 사람이지만 내가 맺고 있는 관계는 무한한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다. 누구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누구에게 나의 어느 정도를 공개할지를 내가 직접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살사와 바차타 이야기로 돌아가자. 춤을 추다 보면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 파트너를 만날 때도 있다. 우리 동아리가 아닌 사람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그들 중 일부는 내가 배웠던 것과는 묘하게 다른 방식으로 신호를 주는데, 그럼 난 그 신호를 해독하지 못해 하던 동작도 틀리게 된다. 같은 동아리 사람이라도 내가 배우지 않은 동작을 지나치게 많이 시도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렵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하나 있다면, 3분여의 노래 한 곡이 끝날 때까지 함께 춤을 추기 때문에 그 사이에 그 사람의 스타일을 습득할 수 있다는 거다. 같은 패턴과 같은 신호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노래가 끝날 즈음이면 그 사람의 신호와 스타일에 조금은 적응이 된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을 만나 더 많은 춤을 출수록 내가 출 수 있는 춤의 범위도 넓어진다.
나는 이것이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관계 맺기를 통해 나를 확장하고, 나의 무한한 변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한 명의 사람은 하나의 세계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어떤 이와의 만남은 두 세계의 정면 충돌이다. 두 세계가 부딪혔다 지나간 자리에는 이국풍의 랜드마크가 건설될 수도, 다 쓰러져가는 폐허만이 남을 수도 있다. 누군가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내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이 확장된다면 그건 정말 좋은 일이겠지만, 우리가 늘 좋은 관계만 맺을 수는 없으니까. 때로는 누군가와의 만남이 나를 힘들게 만들기도 하고, 혹은 그런 사람을 만나고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내가 더 단단해질 수도 있다.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이 있고, 내가 그 사람과 맺을 수 있는 관계 양상도 무수히 많다. 인간 관계는 ‘인간’과 ‘관계’의 합성어인데, 전자도 후자도 하나로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으니. 그 둘이 합성어인 ‘인간관계’가 표현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또 얼마나 많겠는가? 밍기적의 14호 <인간관계>는 많은 경우의 수 중 일부라도 담아 내고자 노력한 결과물이다.
바투의 글 <보편적인 고민>에서 보듯,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겪는 일반적인 고민이다. 바투는 그 중 몇가지 고민거리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더 성숙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한 방법을 고민한다.
연푸른은 그의 글 <낯선 사람에게 친절해지기>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과 있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그의 글은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인간관계의 범위가 우리의 일상적 상상의 범위를 벗어나는 현대 사회에서, ‘남’ 혹은 ‘낯선 사람’을 대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망의 <관계의 시작>은 데이팅 프로그램인 넥플릭스의 ‘솔로지옥’을 본 후 에디터가 느낀 것들을 담아낸 글이다. 사람간의 관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작되고, 관계가 진전되는 속도와 과정도 모두 다르다. 망은 그의 글을 통해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만나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자세가 필요할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온기는 그의 글 <경계를 넘는다면>을 통해 정의되지 않은 인간관계가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가치를 탐구한다. 그는 사랑과 우정사이, 가족보다 깊은 친구 등. 사회적으로 규정되고 정의된 관계의 양상을 뛰어넘으면 우리는 더 많은 인간관계를 향유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더 다채로운 삶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터넷 창에 ‘인간관계’를 검색해보자. 검색창 가장 위에 자리를 잡는 글들은 보통 ‘인간관계가 힘든 당신을 위하여’, ‘인간관계가 힘들 때 기억해야 할 것들’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다. 혹자는 사람이 하는 고민 중 80%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라 말하고, 이는 가장 사랑하는 사이든 혹은 가장 혐오하는 사이든 비슷한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관계를 맺고, 이전의 관계를 갱신하며 살아간다. 결국 인간 옆에는 인간이 있을 수 밖에 없으니까. 이에 대해 내가 좋아하는 칼럼의 한 구절을 공유하면서 글을 마친다. ‘잡지’와 ‘구독자’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당신과 나의 관계도 점점 따스해지는 3월의 날씨 같을 수 있기를.

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한겨례.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 신형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