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에게 친절해지기
에디터 / 연푸른
자기개발에 진심인 나는, 새해가 될 때마다 혹은 더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부채감을 느낄 때마다 습관 형성 어플을 다운받는다. 가장 단순한, 목표 습관을 지킨 날에는 O를 지키지 못한 날에는 X를 표시하는 캘린더 어플부터, 습관 지키기를 게임 속 퀘스트처럼 만들어 습관을 지킬수록 내 캐릭터나 마을이 성장하는 걸 보여주는 어플까지. 습관 만들기는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습관 형성 어플에도 정말 온갖가지 종류가 있고, 나는 그 대부분의 것들을 모두 한 번쯤은 설치한 전적이 있다.
이렇게 혼자서 사용하는 어플 외에 누군가와의 경쟁 혹은 협력을 통해 습관 형성을 도와주는 어플도 있는데, 이 글에서 설명하고 싶은 어플은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내가 사용한 어플 중 경쟁을 동기부여의 도구로 쓰는 어플로는 ‘챌린저스’가, 협력을 도구로 쓰는 어플로는 ‘그로우’가 있었다.
챌린저스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단 내 목표 습관에 보증금을 걸어야 한다. 돈을 걸고 챌린지에 참여한 후에는 습관 달성률에 따라 내가 회수할 수 있는 돈의 양이 정해지는데, 85%를 달성하지 못하면 달성률에 비례해 상금이 깎이고 85% 이상을 달성하면 원금 회수가 가능하다. 그리고 습관을 100% 달성하면 상금이 주어진다는 것이 바로 챌린저스의 셀링포인트. 즉 습관 달성률 100%를 달성한 사람에게는 85%를 달성하지 못한 이들에게서 깎여나간 돈 – 에서 수수료를 뺀 – 만큼의 상금이 주어진다. 그러니까 상금을 많이 받기 위해서는 내가 습관을 잘 지키는 것만큼 남들이 습관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챌린저스에서 ‘주중 7시 기상 2주 챌린지’와 ‘일주일에 5일 책 10분읽기 2주 챌린지’에 참여했다. 나는 챌린지를 시작한 후 일주일동안 100% 미션을 달성했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하게 미션을 성공하고 있었는지 챌린저스가 예측해 보여준 상금은 고작 몇백원에 불과했다. 상금이 얼마 안된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매일매일, 아 사람들이 좀 많이 실패를 해줘야하는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그 창을 닫곤했다. 그래서 결론이 어떻게 됐느냐고? 그 챌린지에 실패해서 남들에게 더 많은 상금을 안겨준 사람은 내가 됐다. 나는 7시 기상 챌린지에서는 이틀동안 미션에 실패해 원금 회수조차 하지 못했고, 책 읽기 챌린지는 한 번 실패해서 원금만 받아갔다.
이후 챌린저스 어플을 사용한 적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돌아오는 보상이 적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게 참 모순적이다. 애초에 습관 형성이 목표였다면, 결과가 어찌되었든 습관만 형성되면 되는 건데. 100%를 달성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순식간에 의지가 떨어지는 건 뭐며, 매일 습관 인증 후에 ‘예상 상금’을 확인하며 남들의 실패를 바라게 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반면 내게 굉장히 좋은 어플로 기억되고 있는 그로우는 일종의 SNS다. 목표를 정한 후 스케줄에 따라 목표를 실행하고 인증샷이나 후기를 올리는 것까지는 챌린저스와 동일하지만, 그렇게 올린 인증샷이 피드에 나열되고 사람들이 좋아요 누르거나 댓글을 달면서 응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피드에 게시글을 올리는 것 외에, 사용자끼리 감사 편지 주고받을 수 있는 통로도 있었다.
사실 그로우의 강제성은 챌린저스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내가 목표를 수행하지 않더라도 그냥 기분이 좀 찝찝할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2주만 간신히 채우고 삭제된 챌린저스와 달리, 그로우는 내 휴대폰에서 두 달이 넘도록 제 자리를 지켰다. 모르는 사람의 응원과 메시지가 생각보다 강하게 동기부여가 됐기 때문이다.
피드를 보다 보면 매일 같은 목표에 도전하는 사람이 보이고, 며칠이 지나면 여러 낯선 계정 중에서 그 사람의 계정이 식별된다. 그냥 좋아요만 누르던 게시물을 어느 날부터는 좀 더 유심히 보게 되고, 그러다 가끔은 댓글을 달기도 하며, 어느 날은 ‘어 왜 오늘은 이분이 피드를 안올리셨지’ 하고 기다리는 나를 발견한다. 누군가에게는 나도 그렇게 기다려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 역시 열심히 목표를 지키고 인증샷을 올렸더랬다.
그 중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도 있다. 그 분은 매일 시 쓰기를 목표로 삼은 분이었는데, 인스타그램에 시 쓰는 계정을 운영하면서 그 화면을 캡쳐해 인증샷을 올리시곤 했다. 그 분의 시는 결코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루도 빼지 않고 피드가 올라왔기 때문에. 나는 그 인내심과 창작을 향한 욕심에 감탄하며 매일 좋아요를 눌렀다.
그러다 하루는 늘 올리는 인증샷에 더해 긴 고민이 적힌 글이 올라왔다. ‘이렇게 매일 시를 올리는데, 왜 내 계정에는 유입이 적을까. 내 시가 별로인가? 동기부여가 안된다.’ 이런 느슨한 커뮤니티에서는 그냥 안타깝다 생각하며 지나치면 될 글이었지만, 그날의 나는 그 글을 보고 동료애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인증샷 속 아이디를 검색해 그 분의 시 계정을 찾아간 나는 게시글에 좋아요를 잔뜩 누르고는, 피드를 보면서 느낀 몇 가지 생각들 - 디자인을 통일하면 피드가 더 깔끔해 보일 것 같아요! – 과 시에 대한 리뷰 – 저는 이 시와 이 시가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 를 담아 그 분께 메시지를 보냈다. 너무 스토커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이런저런 쿠션 멘트도 함께 적었다 – 갑자기 이렇게 장문의 메시지를 받아서 당황하실까봐 걱정되네요! 사실 저도 취미로 글을 쓰는데, 매일 피드 올라오는 것 보고 응원하고 있었거든요. 남 일 같지 않아서 보내봅니다.
메시지를 본 그 분은 깜짝 놀라며, 그냥 혼잣말처럼 불평을 올렸을 뿐인데 일부러 시를 읽어주고 피드백을 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누군가의 반응을 받아볼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 너무 감사하다며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내가 내 인스타로 그 분의 계정에 좋아요를 눌렀기 때문에, 그 분 역시 내 인스타 게시물 몇 개에 좋아요를 눌러 주셨지만, 우리는 서로를 팔로우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고, 그 메시지가 오간 후에도 여전히 모르는 사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계속해서 응원할 수 있었다.
결국 지금은 두 어플 모두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이 두 어플의 차이는 나에게 굉장히 크게 다가왔다. 나의 발전을 위해, 나는 타인과 경쟁할 것인가 혹은 협력할 것인가?
특히 후자의 경험은 정말 독특한 경험이었다. 나는 내 주변 사람에게도 그렇게 친절했던 적이 드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신경을 쓰는 일은 그 자체로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고, 나는 나에게 쓸 에너지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온 시간이 길었다. 그러니 그날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는지. 얼굴도 이름도, 심지어 나이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내 몇 시간을 쏟아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그 사람이 계속 글을 쓰기를 진심으로 응원해줄 수 있다는 거. 그날의 나는 내가 낯선 사람에게도 친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게 서로에게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건 내 주변 사람이 내게 친절한 것, 혹은 반대로 내가 주변사람에게 친절해서 기분이 좋은 것과는 약간 다른 느낌의 기분 좋음이었다.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상대에게 보답을 받을 가능성은 적고, 솔직히 말하면 보답을 해줄 필요 자체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친절할 수 있었고, 의외의 관계에서 오는 친절함은 마땅히 그래야 할 관계에서 오는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로우가 나에게 보여주는 습관 형성은 그런 거였다. 너가 얻으면 내가 잃고 너가 잃은 만큼 내가 가져가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습관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거고, 우리는 서로에게 주는 응원과 인사로 이를 도울 수 있다. 우리는 선한 영향력을 주고 받을 수 있고, 이는 낯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며, 낯선 사람에게 받기 때문에 더 응원이 되는 응원도 있다.
이 사회의 연결성은 이미 고도화되었고, 우리가 맺을 수 있는 관계는 이미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관계 이상으로 넓어져 있다. 나는 내 주변 관계를 내 친구, 가족, 회사 사람들. 기껏해야 같은 학과, 같은 학교에 소속된 학생들 정도로 이해하지만 세상의 연결성은 우리가 얼굴을 모르는 사람과도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더라도, 우리는 사실 연결되어 있다.
이런 세상에서 공존을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한다. 만나본 적 없는 남 역시 ‘우리’라고 느낄 수 있도록, 내 ‘주변 관계’에 대한 상상력을 넓혀야 할까? 혹은 반대로 ‘우리’가 아닌 완전한 ‘남’의 일이더라도 공감하고 응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할까? 그리고 그 둘은 서로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일까?
옆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지하철을 타지 못하는 사람들이 시위를 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낯선 사람에게 친절해지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을 익히는 순간, 우리의 세상은 조금 더 끈끈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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